-
-
문재인의 운명 (양장)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만 4년이 지났다.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서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한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을 책으로 남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저술의 변을 밝힌다. 생전에 노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남길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책은 노 전 대통령이 말했던
‘함께 쓰는 회고록’의 첫 출발이기도 하다.
사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참여정부에 대해 어떤 기대도 가져본 적이 없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 집단의 정치세력화를
기대해오기는 했지만, 기성 제도정치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그 속에서 이전투구를 하느니 차라리 제도권
밖에서 건전한 비판자로 남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투표 행위에 관한 한 물론 가장 진보적인
후보에게 투표를 해왔지만, 그들이 정말 당선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는 득표수로 진보세력과 그 지자자들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바람을 몰고 왔을 때도 나는
그에게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 약속을 저버리고 노무현 후보가 위기라는 말이
나왔을 때조차 나는 여전히 권영길 후보에게 투표하겠다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나에겐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나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나 마찬가지였다.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5년 퇴보한다고, 혹은
5년 반짝한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어쨌든간에 역사는 꾸준히 점진적으로 진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러한 전반적인 입장만 가지고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는 노무현은 청문회 스타 노무현, 인권 변호사 노무현 정도였다. 사실 나는 이 두 가지 타이틀에 대해서도 그다지 큰 점수를 주지 않았다.
청문회 스타 노무현에 대해서는 일종의 쇼맨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인권
변호사로서 노무현에 대해서는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 전 대통령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확고한 신념과 결단력과 의지력이 놀라웠다. 이 책은 문재인이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1983년부터 그와
함께 한 사반세기의 기록이다. 자서전이 아닌 탓에 노 전 대통령의 깊은 속내가 다 드러나지는
않는다. 언급이 되는 에피소드들도 문재인이 그와 함께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잘 알려진 것들에 대한
해석이다. 화자인 문재인과 주인공(?)인 노 전 대통령이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연결되기 때문에 참여정부에 대한 저자의 평가도 엿볼 수 있다.
정치권의 작동방식에 대해서 잘 모르는
독자들도 이 책을 읽으면 참여정부 시절 정치권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 정치라는 게 무엇인지 윤곽도 그려볼 수 있다. 책에는 참여정부가 추진했던 많은
개혁과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졌다. 무엇을 위해 노력했으며 무엇을 이루었고 실패했는지 잘
드러난다. 다행스럽게도 낯뜨거운 자화자찬은 없다.
한나라당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없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표현된 내용은 읽기에 큰
거부감이 없다. 글도 간결해서 읽기도 쉽다.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설명은 최소화했고, 혹시나 독자가 모를 만한 용어나 사건은 각 챕터마다 미주를 달아
놓았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참여정부 시절 이렇게 중요하고 흥미진진한 사안들이 많았는데 그간 내가
너무 정치에 무관심했던 건 아닌가 후회도 되었다. 아무리 기성 제도권 정치에 대한 환멸이 컸다
해도, 참여정부만큼은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평가해주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개혁을 위해
참으로 분투했다. 한국 정치에 무엇이 문제였고, 무엇을
어떻게 고쳐나가야 했으며, 어떤 도전과 좌절이 있었는지 저자와 노 전 대통령의 절절한 심정이
드러난다. 그 중에서도 검찰과 감사원 개혁을 제도화하는 데 실패한 것이 결국 발목을 잡았다. 권력을 사유화하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근절하지 못했다. 검찰이나
감사원 같은 조직이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못하니 상대방에 대한 부당한 보복에 쉽사리 동원되고 그러다 보니 노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내몰았다.
노무현은 한국 제도정치사에서 한 번
크게 솟구친 ‘진보’ 정치인이었다. 다시 보수정권으로 넘어가버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정권이 서로 뒤바뀌기도 하면서 역사는 흐른다. 노무현이라는 큰 일렁임이 역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를 우상화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그건 그가 바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치열함은 분명 계승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단아처럼 등장해서 치열하게 싸우다 갔지만, 그는 어찌 보면 외로운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제 한 몸을 바쳐서 신념을 밀고 나갔지만 한국 정치의 벽은 너무나
견고했다.
문재인은 ‘죽지 않고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당연한 아쉬움이다. 노 전 대통령은 정말 ‘참여정부’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이해관계 당사자들을 한 발짝
다가올 수 있게 만들어주고 본인 스스로도 한 발짝 다가가려고 무던 애를 썼다. 우리나라 정치 지형에서
앞으로 조만간 그 같은 대통령이 다시 등장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영영 다시 등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살았더라면 할일이 참 많았을 것이다.
그가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단단한 기성정치에
대한 저항의식이 아니었을까? 노무현 대통령 같은 이,
세상에 없다.
[덧붙임] 정치적 입장이나 노선과 상관 없이 인간 노무현이나 그가 추구했던 이상이나 신념에 대해서는 제대로된 평가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나는 다른 건 잘 모르겠고, 이 사람이 참 순수하고 성실한 인간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진흙밭에서도 때묻지 않은 성정이라니. 내 남편이나 내가 지금의 문재인 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