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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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Carr, 1892-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역사 서술에서 전통적인 방법론과 관행을 거부하면서 역사  분석의 주요 요소로서 우연성을 배제하고 상대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획기적인 방법론을 제기하였다. 즉 랑케(Ranke)처럼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록으로서의 역사, 역사가에 의한 역사를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역사 서술법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역사학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역사를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보는 방식으로는 역사학의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해석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듯하다. 미래가 없는 역사학은 너무 정적이고, 특히 현대처럼 급변하는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의식하기라도 했던 것인지 카 자신도 죽기 전까지 『역사란 무엇인가』2판을 집필중이었다고 한다.

 

이에 비해 홉스봄(1917-현재)은 역사 인식에미래를 끼워 넣음으로써 좀더 동적인 역사 서술법을 주장한다. 이것은 근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동적 서구사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그에게는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면서 홉스봄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이야기하는 랑케의 역사관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즉 홉스봄은 역사 서술에서 이데올로기를 배제하였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무엇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참된 맑시스트(구 소련의 교조주의자가 아닌)로 살았던 그가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역사를 강조하다니, 어찌된 일인가? 적어도 맑시스트라면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라는 식의 입장을 취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역사가로서 홉스봄은, 아니 적어도 그의접근법은 그와 반대였다.

 

홉스봄은 청년기에는 구 소련에 동조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의 관료주의와 유사 공산주의 체제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소비에트 체제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E. H. 카와 달리 그는 1960년대 이래로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강조한 홉스봄으로서는 점점 관료제화 되어 가는 소비에트 체제를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진정한 맑스주의자였던 홉스봄은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연구하면서 그것이야말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진짜 역사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홉스봄의 역사 인식은 맑스주의를 굳건한 과학의 토대 위에 세우고 싶어 했던 알튀세르의 후기 입장을 보는 듯하다.

 

이 책은 홉스봄이 자신의 역사 인식과 방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유일한 책이다. 근현대 서구 역사를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1991년 동구권의 몰락까지 네 시기로 나누어 혁명의 시대(1789-1848), 자본의 시대(1848-1875), 제국의 시대(1875-1914), 극단의 시대(1914-1991)로 연구해온 그가 극단의 시대 이후를 조망하기 위해서 이러한 저서를 집필할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홉스봄은 이 책을 1997년에 출판했다.). 어쩌면 홉스봄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자신의 역사관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프랑스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연구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체를 새로 쓴 것은 아니다. 21편의 논문 중 3/4 정도는 이미 발표된 것이고 나머지만 새로 쓴 것이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몇몇 논문들을 빼면 다소 학술적인 내용이 많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역사학자로 꼽아도 손색이 없는 홉스봄의 탁월한 논문들 중에서도 분량이 짧고 일반적인 주제를 다룬 것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니 안 읽으면 오히려 손해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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