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번역된 글이 어느 만큼 제가 받았던 떨림을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책은 여고시절 선생님을 만난 이래로 수학이 詩가 되어 소통되는 두 번 째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一汝 드림
수학교사인 내게 옛 제자가 내민 책표지 말미엔 그렇게 쓰여있었다.

지난 여름, 교직 첫 해의 제자가 찾아왔다. 제자의 두 손엔 한권의 책이 들려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서점에 들러 두 권을 샀습니다. 원서로 한권, 선생님을 위한 번역판 한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란 독특한 제목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표지에서는 왠지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집에들어오자마자 책을 펼쳐든 그날 이후 난 일곱번을 연이어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요즘 내 학급의 제자들과 여덟번 째 읽기를 다시 하고 있다.

 

책속엔 수식과 야구라는 소재를 통해 아름답게 소통해가는 예순네 살의 老수학자와 스물여덟 살의 미혼모 파출부, 그리고 그녀의 열 살짜리 아들 루트-이 세 사람 사이의 따뜻한 감정과 관계의 성장이 담겨있었다.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후 기억력이 80분간만 지속되는 희귀병에 걸린 천재수학자인 박사는, 사고 이전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으나 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80분이 지난 모든 일은 까맣게 잊고만다. 매일매일이 그에겐 새로운 날이며, 모든 사고는 35살에 머물러있으니, 그에게 있어 관계 즉, 만남의 지속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리라. 그런 박사를 보살피기 위해 파견된 파출부는 매일 아침 만날 때마다 박사에게 낯선 사람 취급을 받으며 똑같은 문답을 주고받아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잠시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나 원천적으로 나눔이 불가능할 것 같은 그들 사이에 소통의 매개가 되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수학이었다. 수학이 매개가 되는 대화, 만남, 그리고 사랑이 어쩜 이렇게 잔잔하게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는지 읽는 난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녀의 아들을 처음 만나던 날, 열 살 아이에게 애칭을 지어주는 박사의 언어와 표정에서 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천진함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잘 왔다. 고맙다, 고마워. 너는 루트다. 어떤 숫자든 꺼려하지 않고 자기 안에 보듬는 실로 관대한 기호, 루트야."


사물을 온통 수학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야구로 대화하는 박사.

박사가 이끄는 수학, 그 아름다운 수의 세계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여자.

자신이 박사의 기억속에 머물지 못한다는걸 알면서도 그를 향해 내미는 母子의 따뜻한 손길...
천국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풍경이 아닐까 싶게, 세 사람이 그려내는 그림은 섬세하게 아름다웠다.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조차 이 책을 읽고나면 수학의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깨닫게 될 것만 같은 책이라 주저없이 말할 수 있는 책.

  

이책이 준 잔잔한 감동은 나의 수업과 내 교실의 풍경을 바꾸었다.  박사가 루트에게 그랬듯 내 수업에 내 수학에 귀를 기울이는 제자들에게 나역시 루트식 이름을 붙여주고자 했다. 수업 말미에 10분 쯤 다같이 이책을 읽는 시간을 갖는 요즘, 애초에 이책을 읽히고자 했던 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치 않으리라. 제자들은 자신의 감수성과 정서만큼 이책의 아름다움과 만날거란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아이들은 책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종이 치도록 책 속에 머리를 쳐박고 문학과 수학의 세례에 흠뻑 젖곤 하는 제자들의 까만 뒤통수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한 교사가 있을까 싶어진다.

 

시를 외듯 천천히 읽고 싶었으나 단숨에 읽어내릴 수 밖에 없었던 책.

읽는 중간중간 아들놈을 불러 옆에 앉혀놓고 구절구절 읽어주기를 여러 번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책.

수학은, 그녀와 루트에게 그랫듯 내게, 그리고 내 아들놈과 제자들에게...이전보다 더 아름다운 무엇이 되었다. 바로 이책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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