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권채운 지음 / 문학나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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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 전 이 작가의 작품집 <겨울 선인장>을 읽고 펑펑 울었던 생각이 난다.

작품의 면면에 감추어진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작가가 깊이 품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이 작가는 나를 그렇게 만들고야 말았다. 

지금, 여기의 노인들의 애환이 사뭇 진풍경인 까닭이다.

 

<바람이 분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나이만큼 삶을 통찰하는 힘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고단한 삶을 인정하게 하고 나아가 삶과 악수하게 만든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서사와 맛갈스러운 대화는

독자로 하여금 소설을 읽는 또다른 기쁨을 한껏 누리게 한다.

 

늙어간다는 것, 잘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어린 아이였던 시절이, 청춘이 있었듯 누구에게나 노년이 찾아온다.

어쩌면 쓸쓸한 그 노년의 풍경 속에서 이렇듯 애틋하고 따듯한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면,

노년은 결코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 노년이어서 더욱 찬란할 것이다.

작가는 노년의 이야기를 통해 오히려 청춘들에게 값진 선물을 주는 것 아닌가.

 

'바람이 분다'의 정숙처럼 우리에게는 가슴에 아로새겨진, 어떤 마음의 풍경들이 있다. 

너무 지치고 힘겨운 날엔 정숙이 그랬듯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 마음 뉘이고 싶은 밤이다.

 

산은 봄빛이 붓칠을 한 듯이 아련했고 산들바람이 볼을 간질였다. 호수 위로 잔물결이 일고 호수 가득 물별이 반짝였다. 그는 정숙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의 숨이 정숙의 등을 통해 전해졌다. 아주 잠깐인 듯도 하고 아주 오래 그러고 서 있었던 듯도 하다. 액자 속에 넣어서 벽에 걸어놓는 대신 정숙은 그 풍경을 가슴에 아로새겼다. 너무 지치고 힘겨운 날, 정숙은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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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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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제목부터 마음을 이끌었다.

'중앙역과' '어비'에서 이미 자신만의 언어로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 대해 낮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그러나 낮은 것이야말로 어찌하여, 어떻게 진정 높은 것인지를 일깨워준 작가의 작품이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또 하나의 걸작이다.

 

책장을 덮고 한동안 아무것도 못할 만큼 먹먹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있는 자리는 어디이며 나는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순조롭고 수월한 일상.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 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나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난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P.197

 

 

삼십 대의 젊은 작가의 시선이 어떻게 이렇듯 예리하며 그의 전언은 왜 이토록 절절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형식은 균형잡혀 있으며 언어의 면면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도 내가 알기로 그의 근본이 한없이 겸허하기 때문이리라.

 

이 작가가 세상을 보는 냉철한 시선과 세상에 대해 보내는 지순한 온정에 사뭇 경의를 표한다.

그게 뭐든 언제나 받는 사람은 모르는 법이다. 그건 다만 짐작이나 상상만으로는 알 수가 없는 거니까 자신이 받는 게 무엇인지, 그걸 얻기 위해 누군가가 맞바꾼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 돈이 어떤 빛깔을 띠고 무슨 냄새를 풍기며 얼마나 무거워지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런 걸 누군가에게 줘야 한다면, 줄 수 있다면, 가족이 유일하다. 숨과 체온, 피와 살을 나눠 준 내 자식 하나뿐이다. P.74

그 애를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보고 있으면 놀랍고 신기하고 잠든 그 애를 내려다보고 있으면 사랑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어요.
나는 잠시 말을 그치고, 하고 싶은 말을 자르듯 어금니를 부딪으며 딱딱 소리를 내 본다. 어떤 말들은 도저히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쇠못처럼 단단히 박혀서 결코 뽑아낼 수 없을 것 같다. 내 딸은 하필이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요.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한번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P.84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가자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어떻게든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은 걸까.
마음은 왜 한상 까치발을 하고 두려움이 오는 쪽을 향해 서 있는 걸까.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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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과 모범 사이 VivaVivo (비바비보) 27
문부일 지음 / 뜨인돌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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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는 이 시간, 나는 불량, 하고 싶어진다.

 

기왕이면 아주 많이 불량, 하고 싶다.

 

불량, 이 이토록 아름답다면, 인간적이라면, 순정하다면 말이다.

 

첫 작품에서 마지막 작품이 그라데이션을 이루는 화면처럼 그윽하다.

 

그러나 그 그윽함이 가슴을 때린다.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울컥, 하고 만다.

 

 

과연 고수의 비법이다.

 

작가의 의식은 날카롭되 손은 정교하고, 시선은 낮아서 더욱 높은...

 

불량과 모범 사이!

 

가을이 나에게 준, 귀한  선물이다.

 

눈 밝은 독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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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사장 장만호
김옥숙 지음 / 새움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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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음식으로부터 노는 것이라고 했던가.

한때 맛난 음식을 앞에 두고 넘기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작가의 전언이 애잔하다.

소설 속 감방에서 금방 나온 아들을 데리고 와 고기를 구워 먹이SMS(p.81) 아비의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

 

가난한 연인의 혹은 죄많은 아비의 심정이라면 밥은 이미 밥이 아니라 하늘이겠다.

많이 외로운, 그래서 어딘가에 홀로 서 있거나 혹은 홀로 견디고 있는 누군가와 따뜻한 밥 한 그릇 나누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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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바람 - 난 잘 지내고 있어 탐 청소년 문학 14
강미 지음 / 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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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안전하지 않지만 안녕할 거라, 잘 지내고 있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바람의 인사를 듣는다.

그런데 그 인사가 아프다.

잘 지내주기를, 네가 그렇듯 나 또한 잘 지내겠다고 안부를 전한다.

 

그때 왜 그랬는지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될 어떤 것들...

그 앞에서 망연해지는 것은 왜일까.

 

화자를 바꾸어 가며 각각의 이야기에 상징성을 부여하는가 하면

구성의 변주를 통해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는데, 그 이음새가 사뭇 능란하다.

무엇보다 절망 앞에서도 이렇게 살아가라, 당부하고 어루어주는 작가의 손길이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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