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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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남자는 '잠이 들 무렵엔 몸에 꼭 맞는 배를 타고 먼바다로 떠내려가는 착각에 빠진다. (중략) 눈을 뜨면 머리 맡에 물이나 빵 같은 것이 놓여 있다. 상체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 곁에도 같은 것이 놓여 있따는 걸 확인한 다음 물을 마신다. 이제 열차가 옥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밤이 아주 깊었다는 뜻이다.' P15

'밤의 광장은 이상한 열기로 들끓는다. 버려진 캔이나 비닐봉지처럼 사람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고함을 지르고 웃음을 터뜨리고 통곡한다. 이곳은 감정의 소용돌이다.' P.23

그리고 그 거리에서 여자를 만난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들을 모두 지나고, 무언가 바뀔 가능성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은' 여자를.

'경계하거나 위협하는 몸짓 없이 내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여자가 처음이다. 이곳에서 나는 이런 눈을 마주한 적이 없다. 여자의 눈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것처럼 텅 비어 있다. 깊이와 너비를 가늠하기 힘든 눈동자다.' P. 35

 

그들의 만남을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맞다. 운명적이다. 그것도 아주 처절한 운명, 겨울의 한복판에서 만난 운명, 나는 그들에게서 도저한 사랑을 읽는다. 내몰리고 내몰려서 더 이상 그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는 사람들.. 나는 이들의 사랑에 깊이 빠져들고야 만다. 이토록 처절한 사랑이 있을까. 하지만 작가는 사랑의 깊이를 절절하게 드러내되 함부로 규정지으려고 하지 않고, 막거나 제지할 생각 없이 흘러가게 그대로 내버려둔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오히려 독자는 애가 탄다. 

 

'살이 맞닿아 있는 순간에 여자는 불이 켜진 것처럼 환하다. 더는 숨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정신 차려. 우리가 뭘 할 수 있니.' 차갑게 쏘아 붙이며 선을 긋는다. 그러면 나는 또 어찔 수 없이 여자가 그은 선 밖으로 물러나고 만다. 그러니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밤에는 애인이었다가 낮에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 관계를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건 거리 사람들을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이다. P. 85

'이 순간 우리가 딛고 있는 이 길이 완전히 꺼져버렸으면 좋겠다. 세상의 모든 길들이 차곡차곡 무너지고 허물어졌으면 좋겠다. 모든 게 부서지고 망가지는 순간 석에 나도 여자와 함께 파묻히고 싶다. P.190

'여자가 아니면 누가 내게 이렇게 다정한 말을 건네고 따뜻한 체온을 나눠줄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를 꿈꿀 수 없는 가난한 처지가 서로를 유일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해서 그게 사랑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P.218

'이대로 걷다가 바닥이 꺼지고 저 아래로 떨어졌으면 좋겠다. 나는 생각한다. 이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생각만 한다. 이 세계에 안과 바깥이 있다면 나는 그 경계를 걷고 있다. 안으로 뛰어들지도, 바깥으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끈질기게 타두리만 맴돌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전부 끝이 나면 좋겠다. 나는 천년을 살고 만년을 산 것처럼, 사는 동안 무수한 기대와 절망을 다 겪은 것처럼, 아득한 심정으로 한 걸음씩 내디딘다.' P.225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나는 다시 걷는다. 가다 보면 역이 나오겠지. 막연히 생각할 뿐이다. 가지 못하면 또 어떤가. 어디나 똑같이 춥고 어두울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고요해진다. 여자가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묻는다. 춥니? 아니, 고내찮아요. 나는 내 자리에서 여자를 고쳐 업는다. 당신만 있으면 난 괜찮다. 이대로도 충분하다. 어쩌면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니 그게 내 진심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건 지나가버리고, 나는 지나가버릴 말들을 함부로 지껄이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기어이 또 말하고 만다.' P. 226

'어쩌면 나는 혼자인 것이 두려워 여자를 붙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여자의 마음은 나와 얼마나 다른가.' P. 236

'바깥을 향해 쏟아내던 성난 마음들이 부메랑처럼 천천히 되돌아온다. 무수히 많은 부메랑이 공중에 날렵한 곡선을 그리고 내게와 박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를 관통한다. 모든 게 내 탓이다. 나 때문이다. P. 247

'누군가에게는 삶이 끔찍하지 않을 수도 있을까. 나는 되묻고 싶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한다. 정말 끔찍한 건 삶이 아니라 죽지 않고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스스로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라고. P. 262

'캄캄한 바다 위의 등대처럼 불빛은 먼 곳까지 나아가 거기가 역사라는 것을 알린다. 나는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내가 어디즘 서 있는지 가늠해 본다. 한때 호나한 등대 아래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적이 있다. 그곳에 닿으려고 악착같이 애썼던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역사의 불빛 대신 불빛을 둘러싼 거대한 어둠을 본다. 더는 그곳의 깊이와 너비를 의심하지 않는다.' P.276

 

밑줄 긋기를 거듭하고 마침내 나는 책을 덮는다. 어느새 가을 아침 햇살이 거실에 스며들어와 있다.  

살아오면서 몇 번이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이 소설은 어딘가 다른 데가 있었다. 작가의 문체는 담담하고, 서사는 치열하다. 그런데 독자의 가슴은  날뛰다가 고요하게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이토록 처철한 사랑의 서사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또 광장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러나 따뜻하게 바라보고 그릴 수 있다는 게 놀라워서 작가에 대한 경외감마저 든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의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이 작품 속에 깊이 빠져들었으으며, 또 얼마나 이 작품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인지 알 수 없다.

   

 

 

    

늦은 밤 공사는 중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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