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는 박완서씨가 등단을 한지 30년이 되는 해라고 한다. 책에 실린 사진을 뵈니 칠순이라는 나이가 실감되었고 조금은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그녀의 세상을 보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과 실감나게 쓰시는 글 솜씨의 건재함에 다소 위로가 되었다.

박완서씨의 글은 인간의 허위와 위선을 늘 냉소적인 시선으로 꼬집는다. 때로는 너무나 적나라해서 진저리가 날 때도 있다. 이 글 역시 물질과 권력에 대한 인간의 맹신적인 욕망이 가장 신성해야할 인간의 탄생과 죽음까지 오염시킬 수 있는 현실에 대해 적나라하게 꼬집는다. 아울러 가부장적인 사회에서의 여자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주인공 심영빈은 40대 중반의 명망 있는 내과 교수이자 의사이다. 또한 그는 홀어머니와 교사인 아내와 두 딸과 함께 40평 대의 아파트에서 안락한 삶을 사는 가장이다. 그러나 자신은 별로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진 않는다. 40평 대의 아파트에서 그가 좋아하고 즐겨 찾는 곳은 0.7평의 다용도실이다. 자신의 공간은 그 곳 밖에 없다.

그에게는 늘 가슴속에 자리한 첫사랑의 여인, 초등학교 동창생인 현금이 있다. 현금은 이혼을 하고 혼자 자신의 자유로운 삶을 즐기는 제도권을 이탈한 여인이다. 우연히 병원에서 못 본지 30년이 더 지난 어느 날 현금을 만나 그는 다시 사랑에 빠진다. 부인은 현실이고 현금은 그의 꿈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그의 꿈속으로 도피한다. 그녀는 그의 현실에 대한 갈증과 답답함을 식혀주는 청량음료 아니 신선한 공기이다.

그에게는 16살의 나이 차가 나는 유복녀인 여동생 영묘가 있다. 아버지가 죽은 해에 태어난 그녀는 그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애정이 있다. 그녀는 자칭 재벌인 Y건업의 맏며느리이다. 어느 날 그의 제부가 폐암에 걸려 그의 환자가 된다. 우리는 그의 제부 송경호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 가족들의 적나라하고 추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유산 문제 때문에 그 가족들은 송경호 자신에게 그의 병을 알리지 않는다. 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현금의 말처럼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농담일지 모른다.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들어서 즐거운 농담.

결국 송경호는 죽고 영묘는 홀로 된다. 그녀는 현실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것으로 자신의 자유를 얻지만, 그 자유는 자신이 쟁취한 것이 아니라 큰 오빠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그녀의 아내는 늘 자신이 딸만 둘을 낳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갖는다. 그 사실에 아무런 불만을 내색하지 않는 남편에 대해 오히려 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산다. 그녀는 두 번의 낙태 수술 끝에 늦둥이 아들을 갖는다. 그러나 그 사실을 남편에게 비밀로 한다. 하지만 우연히 현금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게 된 심영빈은 아들이 출산될 때까지도 모른 체 하며 그의 아내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그것도 농담일까?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기분 좋은 농담.

심영빈이 의사를 택한 것도, 결혼을 한 것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렇게 된 일이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어머니가 원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그가 현실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선택한 현금과의 사랑은 결국 제도권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돈이라던가 명예라던가 권력에 의하여 우리의 삶은 결정되어진다. 심지어 우리의 탄생과 죽음마저도...

우리의 삶은 농담의 연속일까? 자신의 죽음에 대한 진실조차도 알지 못하는...

너무나 적나라한 파헤침에 진저리를 내면서도, 나는 나의 평온한 일상의 늪에서 잠시 깨어날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