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정리된 한국사나 중국사 연표는 아주 많다. 그래도 다시 그렸다. 내게 필요한 만큼만 간략하게, 기억하기 쉽도록 그렸다. 평생교육원 강좌를 듣고 있는데, 워낙 기초가 없어서 대략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함께 읽으려고 한다.
<상•주 - 춘추전국 - 진•한 - 위진남북조 - 수•당 - 송•원•명•청> 은 선생님이 처음부터 외우라고 한 것이다. 한국사는 중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무조건 외우는 것 보다 맥락을 훑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나이에 막무가내 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재미도 없고.
한국사는 앞으로 하나씩 배우며 정리할 테니, 중국사 연표에 대해서 몇 가지만 짚어 보겠다. 다행히 재작년에 읽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가 도움이 된다.
역사를 배운다고 하면 일단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 뭐 이렇게 나누고 본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BC8000년) 에 시작되었고, 청동기는 언제부터일까? 발굴된 유물로 추정하기 때문에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4대 문명에는 모두 청동유물이 있으니 대략 BC 5000 ~ BC 2000 사이에 이들 지역에서는 청동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중국은 BC 2000, 우리나라는 BC 1500 ~ BC 1000 사이로 추정한다.
희랍과 중동지역에서는 철기가 이미 BC 2000년경에 시작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지역마다 편차가 매우 커서, 중국은 춘추 말에서 전국 초 (BC 5세기 경) 에 철기가 들어 왔고, 우리나라는 BC 300~ BC 400 사이로 본다.
새로운 유적이 발굴될 때마다 달라지는 이런 연대를 외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하 ․ 은 ․ 주 와 우리나라 고조선은 대략 청동기 시대라는 것만 기억해야겠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김혜린의 만화 《불의 검》은 우리 민족이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를 그려내고 있다. 불의 검이라는 말 자체가 불로 단단히 벼리어 낸 철검을 말한다.
하 왕조는 전설의 왕조 정도로 치부되다가 최근 궁전 유적이 발견되면서 실제 왕조라는 의견이 우세해 지고 있다.
상 나라는 갑골문으로 유명해서 기억하기 쉽다. (예전에는 은나라라고 했다.)
주 나라는 공자가 사랑한 나라다. 어릴 때 달달 외웠던(왜 이걸 외웠을까?) <요순우탕문무주공> 의 태평성대 중 주 나라를 통치한 인물이 문왕(무왕의 아버지), 무왕(주 건국), 주공(무왕의 동생)이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전설적 인물이고, 우왕은 하나라, 탕왕은 은나라를 통치했다. 공자는 주나라의 주공이 만든 사회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주나라의 정치제제가 봉건제이다. 우리가 서양 중세 시대를 봉건제로 알고 있지만, 봉건제란 말은 주나라의 통치 제도를 가리키던 것이다. 나중에 서양사를 번역하면서 봉건제란 말을 빌려 쓴 것이다. 형태는 비슷하다. 다만 주나라의 봉건제는 혈연적인 반면 서양의 봉건제는 쌍무 계약에 기반하고 있다.
주의 봉건제에는 천자가 있고, 각각의 영토는 제후들이 다스린다. 이 제후들이 형제, 사촌 기타 등등 천자의 혈연들이다. 결국 봉건제란 위로 천자를 모신 제후들이 아래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하나의 커다란 가족을 지향하는 체제이다.
춘추전국 시대는 주나라의 질서가 붕괴하면서 100~200여개의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던 춘추시대 (BC770~BC403)와 이 제후국들이 통합되어 7개의 군웅으로 경쟁하던 전국시대 (BC403~BC221)를 합친 기간이다. 이 시기에 도입된 철이 세상을 바꾸며, 전쟁의 규모를 키웠다. 자고로 신무기 개발은 살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춘추전국’의 대구로 보통 ‘제자백가’를 떠올린다. 춘추천국 시대는 제후들과 군웅들의 패권 다툼이 치열했던 만큼 사상의 백가쟁명도 엄청났다. 춘추전국 시대의 사명은 극심한 혼란을 끝내고 평화와 안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방법은 부국강병이며, '백가'들은 제각각 부국강병의 길을 놓고 다투었던 것이다.
이 시기 대표적 사상가가 다름 아닌 공자이다. 공자뿐 아니라 맹자, 노자와 장자, 묵자, 한비자 등 기라성 같은 중국의 사상가들이 이 시기에 한꺼번에 출현했다. 공자는 BC 551 ~ BC 479 에 살았다. 이 무렵에는 신기하게도 중국뿐만 아니라 여러 문명의 최고의 사상가들이 활동했던 시기다. 희랍의 소크라테스(BC 5세기)와 인도의 석가모니(BC6세기)도 비슷한 시기의 인물이다. 이후 약 500년이 지나 예수가 탄생했고, 다시 예수 탄생 600여 년 후에 이슬람교가 창시되었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정치 체제는 주나라의 봉건제다. 공자의 仁은 곧 克己復禮 인데, 이 때 禮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절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제도 전반을 의미한다. 공자가 돌아가고자 한 제도가 곧 주나라의 주공이 이루고자 했던 정치 체제이다. 춘추전국의 혼란 속에 공자는 옛 태평성대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길을 모색했다.
진 나라는 진시황과 만리장성, 분서갱유로 대변된다. BC221년 진시황이 군웅할거를 끝장내며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진시황과 함께 승리한 사상은 한비자의 법가였다. 법가 이외의 제자백가 특히 유가의 것들은 사람이든 책이든 산채로 파묻고 불태워 버렸다. '법대로!'를 외치던 진나라의 가혹한 통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을 불러왔고, 진나라는 15년 만에 멸망했다. 진의 통치는 비록 짧았으나, 춘추전국시대 여러 나라가 쌓아 둔 성을 연결하여 완성한 만리장성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상징이 되고 있다. 중국을 China라 부르는 것도 진 Chin에서 비롯되었다.
한 나라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한자, 한문, 한족 등의 漢이 BC202년에 세워진 한나라의 漢이기 때문이다. 진이 영토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이루었다면, 한은 문화 면에서 하나의 중국을 완성하였다. 공자의 유가사상을 국가 통치의 원리로 삼아 공자를 성인의 반열에 올린 것도 한나라다. 그러나 한나라 자체는 한무제 이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지향했다. 한무제는 비단길을 개척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무제의 명령으로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대월지를 찾아나선 장건이 대월지와의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서역으로 가는 사막길(비단길)을 개척했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에 본격 등장하는 것도 이 즈음이다. BC 2세기 무렵 고조선은(위만조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고조선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무제는 5만 대군을 보냈다. 고조선은 1년간의 치열한 항쟁 끝에, BC 108년에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에 군현을 설치했으나, 조선의 유민들은 고구려와 부여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한족의 통치에 대항하였다. 한사군을 완전히 몰아낸 것은 고구려의 미천왕 시기로, 313~314년 이다. 약 400여 년간 한반도의 중심부를 중국이 통치하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위는 우리가 잘 아는 위․ 촉․ 오 삼국시대의 그 위 나라다. AD220, 221, 222년에 나란히 위, 촉, 오가 세워졌다. 삼국지가 하도 유명해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보다 더 잘 알려졌으니 보탤 것은 없다. 그러나 조조의 위나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아니다. 조조 아래에 있던 사마 가문이 권력을 접수하여 진나라를 세우고 280년에 삼국을 통일했다. 열매를 딴 것은 조씨가 아니라 사마씨 였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중국은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나라의 불안한 정세를 틈타 대대적으로 밀고 내려온 것은 사막과 초원지대의 유목민들이었다. 진시황의 진(사마씨의 진과는 달라유~)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북방 유목민족 때문이었다. 한나라 때에는 흉노족들이 부족을 통합하여 흉노제국을 건설하고 400년간 한나라와 충돌을 거듭했다. 유럽 역사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훈족도 흉노족을 가리킨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과 중국의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표이다. 우리 역사에도 심심찮게 출몰하는 이름들이 보인다. 몽골제국(원나라)과 여진족의 청나라는 북방 유목민이 아예 중국 전체를 지배했다.
다시 위진남북조 시대의 남북조로 돌아가 보자. 간단히 말하면 만리장성 아래로 내려온 유목민족들이 중국의 화북 지방을 차지하여 다투어 나라를 세우고(북조), 한편으로 한족은 강남으로 쫓겨나서 여러 왕조를(남조) 갈아치운 시기다. 이 시기는 춘추전국 시대에 이어 중국 역사상 두 번째의 혼란기이자, 중국 최초의 호·한 융합기이다. 북쪽은 오랑캐인 유목민이, 남쪽은 한족이 차지한 채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여하튼 제갈공명이 이름을 휘날리던 삼국시대부터 수나라가 중국 땅을 다시 통일할 때까지 360여 년간의 혼란기를 퉁쳐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한다.
이 기간 동안 남북에서는 여러 왕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꼴을 보면 알겠지만 이때는 자기들 살기도 바빠 우리나라와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다. 물론 고구려가 민족의 방파제로서 이런저런 침략을 겪기는 했다. 그럼에도 남북조의 혼란기는 고구려가 재빠르게 동북아시아의 주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수와 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고구려와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 하늘에 두 태양은 없다는 거겠지. 그렇게 다가오는 7세기는 동아시아의 격동의 시대를 예고했다.
수 나라는 589년에 다시 중국을 통일했다. 수나라에 의해 유목민인 호족과 농경민인 한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호•한 일체의 세계가 마련되었다. 수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농민 봉기가 이어지자 당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단명한 왕조이지만 수나라가 중국 역사에 가지는 의의는 균전제, 조용조, 부병제, 과거제 등을 확립하여 당나라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고려시대에 처음 실시된 과거제가 이미 수나라 때에 만들어졌다는 사실!
당 나라는 618년에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북방 유목민의 세계를 아우르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위협을 느낀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나라의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에서 대패하였다.
이후의 역사는 잘 알다시피 신라의 삼국통일의 과정에서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이어진 나•당 전쟁에서 신라는 당나라를 물리치고 676년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옛 고구려의 땅을 대부분 빼앗겼다. 다행히 빼앗긴 고구려의 땅은 698년 대조영이 세운 발해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이때부터 사실상 한반도는 발해와 신라라는 두 국가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되었다. 그 결과 8세기 후반에는 당 • 발해 • 신라가 상호 견제하며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당나라는 문화의 절정기를 구가하던 현종 말년부터 쇠퇴에 접어든다. 양귀비로 인해 시작되는 쇠락은 절도사라는 무인세력들에 의해 가속화된다. 당나라는 907년 절도사 주전충에 의해 멸망하고,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까지 약 70년간 절도사 세력들이 패권을 다투는 5대10국의 혼란기가 이어진다.
송나라는 960년에 건국되어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실은 반쪽짜리에 가까왔다. 당나라가 무인세력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본 송나라는 처음부터 무인을 배격하고 철저한 문치주의를 표방했다. 이때 등장한 집권 세력이 바로 사대부이다. 어떤 강사의 표현에 의하면 돈많고 힘은 없는 글방 도령의 이미지. 힘깨나 쓰는 놈들한테 얻어 터지고 뺏기기 딱 좋은 상황인데, 실제로 송나라의 역사가 그랬다. 강성한 북방민족들에게 막대한 재물을 공납하며 평화를 유지했다. 첫 상대는 거란족, 그리고 뒤이어 여진족, 마지막으로는 몽골족이다.
중국 땅의 일부를 차지한 거란족이 916년 거란국(요나라)을 세워 송나라와 대립하였다. 이 거란이 바로 송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빌미로 고려에 쳐들어왔다가 강감찬과 귀주에서 맞붙은 그 거란이다. 까불다가 못생긴 강감찬에게 된통 당했다는 것이 어릴 때 읽은 책에 나왔더랬다.
거란의 지배를 받던 여진족이 1115년 금나라를 세우고 송나라와 손을 잡고 요나라를 멸망시켰다. 항상 그렇지만 적이 제거되고 나면 다음 차례는 동지의 뒤통수를 치는 것. 금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송나라는 강남으로 도망가 남송 시대를 맞게 되었다.
우리가 송나라로 부르는 이 시기는 실제로는 송과 요, 이어서 송과 금이 중국의 남북에서 대립한 시기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바람처럼 등장한 몽골의 칭기즈 칸에 의해 한방에 날아갔다.
원 제국은 1271년 쿠빌라이 칸에 의해 세워졌다.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다. 1206년에 칸으로 추대된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싹 쓸어 대제국을 건설했다. 다만 서유럽 일부를 눈앞에 두고 오고타이 칸(2대 칸으로 징키즈 칸의 아들)이 죽는 바람에 서유럽은 가까스로 대재앙에서 벗어났다. 1231년 몽골이 고려에 1차 침입하여 우리나라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삼별초, 팔만대장경, 충자 돌림 고려국왕 등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을 많이도 보태줬다.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양아치의 '치'에는 다루가치의 '치'라는 역사가 새겨져 있다. 치는 몽골어로 사람을 뜻한다.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되었다. 원 • 명 교체기는 여•말 선초와 겹치면서 우리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정도전> 에도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치열하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 세력은 친명파였는데, 조선 건국 후 주원장은 정도전을 엄청 미워한다. 정도전도 주원장이 죽은 어수선한 틈을 타 요동을 회복하려 했지만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후 우리민족은 요동회복의 꿈을 잃어버렸다.
중국 땅에 다시 한족 국가를 세운 주원장은 한 •당 • 송과 같은 이전 한족 왕조의 유교 전통을 되살렸다. 조선도 유교 이념에 따라 명나라와 조공의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명에 대한 사대의 전제는 명나라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사대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 실리 외교"라고 평가 받는다. 이와 달리 조선 중기의 사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부정적 의미의 그 사대이다. 「박시백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중기의 사대는 "사대란 중화의 나라 명을 정성으로 받는 것." "효와 같고 어쩌면 무조건적인 신앙과도 같은 것" 이다.
중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자금성!, 베이징에 자금성을 세운 것이 바로 명의 영락제이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이후 재정적 압박이 심해진데다 내분에 시달리다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했다.
청 나라는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1616년에 세운 후금이 이름을 바꾼 것이다. 청은 1644년 이자성의 난을 진압하며 중국 대륙을 차지하였다. 명 • 청 교체기는 조선 땅에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을 몰고 왔다. 명을 치기 전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호란을 막기 위해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펴다가 쫓겨났고, 서인 반정세력의 배금친명 정책으로 조선의 국토와 백성이 유린당했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치욕을 당했으며, 이후 북벌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노론의 강력한 집권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영화 <최종병기 활>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역사적 배경도 병자호란이다.
오랑캐라고 무시당했던 여진족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던 말갈족이다. 이들은 청대에 들어와 스스로를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의 강희제,옹정제,건륭제는 그 어느 왕조보다 훌륭한 통치를 이룩해냈다. 현재 중국 대륙의 지도를 완성한 것도 청대의 업적이다. 티베트, 신장, 몽골 등이 이때 중국에 편입되었다.
중국의 근대사는 우리와 비슷하다. 1840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이 중국 근대의 시작이다. 이후는 서양 열강에 의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신세... 그러다가 일본의 침략을 받고... 물론 우리처럼 완전한 식민지를 겪지는 않았지만, 반식민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의 시대로 접어드는데...
중화민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수립되었다.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쑨원이 군벌인 위안스카이에게 임시 대총통을 물려주면서, 중국의 미래는 혼돈 속에 빠져들었다. 배신의 아이콘이라고 불리는 위안스카이는 민중과 민족을 배반했고, 중국은 군벌 세력과 반군벌 세력으로 나뉘었다. 그에 더하여 반군벌 세력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국민당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으로 쪼개져 대립하였다.
군벌세력과 제국주의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두 차례에 걸쳐 국공합작을 하였다. 그러나 1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1차 국공내전을, 2차 국공합작 이후에는 2차 국공내전을 치루었고, 최종 승자는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이 되었다. 1949년 마침내 중국은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탄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