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압둘와합을 소개합니다 - 어느 수줍은 국어 교사의 특별한 시리아 친구 이야기
김혜진 지음 / 원더박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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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구에서 이슬람사원 건축 문제로 주민들과 갈등을 빚은 문제가 뉴스를 장식했다. 이슬람사원 건축은 정당한 건축허가를 받았다. 이에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고 허가를 내주었다는 건립반대 비상대책위원회에서 공사중지 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 항소심 모두 건축이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건축현장 앞에서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대학원 시절 내가 일했던 연구소에는 무슬림 학생들이 예배를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총 5번 기도를 해야 한다. 그 당시 유학생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었고 기도를 하기 위해 수면실이나 다른 장소를 찾는 무슬림 학생들도 늘고 있었던 듯했다. 결국 연구소에서는 따로 기도 공간을 만들었다. 종교가 없는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다. 하루에 다섯 번씩이나 기도를 하다니 얼마나 번거로운 일일까. 국교가 없는 나라에 태어난 덕에 선택권이 있어 다행이다, 등 다양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마음 한켠에는 무슬림 학생들이 그 정도로 많다는 사실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무슬림 학생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은 실제로 이슬람 학생을 알게 되면서 곧 사라졌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못 먹는 그 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매우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돼지고기가 들어간 음식이 그렇게 많은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음식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고기 육수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책에도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우리나라 음식은 굉장히 다양한 곳에 다양한 방법으로 돼지고기를 사용하기에 음식을 하는 사람도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게다가 교수님이나 다른 업체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서 못 먹는 음식이 나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밥을 굶은 경우도 있다고 하니 단지 음식 문제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이 책은 작가가 시리아에서 온 ‘압둘 와합’이란 친구를 만나면서 느낀 것들을 담고 있다. 압둘 와합은 무슬림이자 우리나라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하지만 종종 무슬림이라는 수식어가 너무 큰 나머지 압둘 와합을 수식하는 다른 수식어들을 모두 지워버리기도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무슬림을 향한 두려움일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보통 그 대상을 잘 모를 때 생긴다. 대표적으로 거미를 들 수 있다. 거미에 물린 기사 중 절반(47%)에 가까운 보도에서 오류가 있으며 대부분 더 선정적으로 보도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심지어 해당 지역에는 살지 않는 거미에 물렸다거나 거미 물림과 관계 없는 증상을 호소하는 등 다양한 오류가 있었지만 이런 허위정보가 있을수록 더 멀리까지 빠르게 퍼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심각한 독성이 있는 거미는 0.5%미만이며 사람과 사는 곳이 겹치지 않아 맞닥뜨릴 일도 매우 드물다. 무슬림에 대한 감정도 비슷하다. 실제로 독일에서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독일 현 사회 문제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가장 많은 대답은 ‘무슬림 난민이 원인’이었지만 ‘내 주변의 무슬림이 피해를 주느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 혹은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가장 많았다(p.291).

최근 전 세계적으로 우경화가 심해지고 있다. 극우를 표방하는 멜로니가 이탈리아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치인인 마린 르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다. 이와 맞물려 난민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2018년 5월, 제주도에 예맨 난민이 입국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청와대에 난민을 추방하라는 청원 글이 올라오고 난민을 받아들이면 치안이 나빠지고 범죄가 늘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p.293). 이런 현상은 비단 두려움만의 문제는 아니다. 경제가 침체돼 내 밥그릇 챙기기에 신경이 쏠리며 자연스레 소수자를 향한 관심과 배려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마치 난민은 나와는 먼 이야기라 믿으며 말이다. 하지만 난민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6.25전쟁을 겪었을 당시 반 강제적으로 고향을 떠나 전쟁을 피해 다른 나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난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당시 우리나라 난민을 따뜻하게 받아주었던 나라들이 있었고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평화로웠던 우크라이나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사람이 난민으로 내몰리는 상황을 보며 난민이 정말 나와 먼 이야기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두려움 자체는 인간에게 해로운 감정이 아니다. 인류가 진화해 온 과정에서 두려움은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보가 없는 것들을 일단 조심하는 것이 초기 인류의 생존율을 높였을 것이다. 처음 보는 열매, 처음 보는 동물,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은 상황이 달라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정확한 정보를 안전한 집 안 침대 속에서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원시시대의 두려움은 우리를 조종하고 있다. 잘 알아보기도 전에 두려움이 먼저 솟구쳐 거부감으로 가득 차오르는 경우가 자주 생기니 말이다. 촉감으로만 물건의 정체를 알아맞히는 게임처럼 상자에 손을 넣기 전에는 온갖 상상을 하며 무서워하지만 정체를 알고 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지도 모른다. 게다가 북한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아직 전쟁을 일시정지시켜 놓은 우리나라에서 난민이 과연 다른 나라만의 이야길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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