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지배계급이 된 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지식 기술자들을 관리하고 길러내기 시작합니다. 즉 지식 기술자는 현 사회에서 더 이상 자연발생적으로 나오지 않고 지배계급에 의해서 양육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죠. 생각해봅시다. 전문가란 반드시 교육을 통해서 길러지게 되어있습니다. 근대 초창기에야 자기가 독학으로 과학 법칙을 발견해내기도 하고 그렇게 전문가가 되기도 했겠지만, 이제 그런 일은 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럴만한 것들이 대부분 발견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기관의 인증이 없는 사람은 사회적 신뢰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법률 전문가가 되고 싶으면 로스쿨을 가야하고, 의사가 되고 싶으면 메디컬 스쿨을 가야하고, 경영관리 전문가가 되고 싶으면 MBA를 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어마어마한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될 수 있을까요? 결국 최소한 중산층 이상은 되는 사람들만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아서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배계급에서 전문가가 배출되는 출신 성분을 제약하고 있다-자신들에게 반감을 가지지 않는 정도의 계급으로-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죠. 물론 장학금 제도가 있긴 하지만, 오히려 이는 그만큼 지배계급이 전문가의 출신 성분 비율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방증에 다름 아닙니다. 사회적 갈등을 미봉할 수는 있지만 기존 전문가 그룹에 편입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딱 그 정도의 비율만을 하층계급에서 선발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문가라는 건 이제 지배계급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기도, 없어지기도 합니다. 기업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빅 데이터에 대한 전문가, 여론 조사 전문가 등은 살아남고 대학에 과가 신설되거나 정원이 늘어나지만, 그렇지 못한 인문학 전문가들은 밥벌이를 못하거나 과가 폐과되는 등등의 일들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이처럼 이제 지배계급은 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결정하고, 출신 성분을 조절하며, 그들에 대한 처우의 정도까지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지식 기술자가 과거 상인 계급과의 일체 상태에서 떨어져 나와 그들의 하수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 이들 지식 기술자들이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일을 수행하게끔 하는 작업이 또한 교육을 통해 벌어집니다. 우리는 초등교육 때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고 이것이 대한민국의 체제라고 배우지만, 사실상 ‘자신의 의견을 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경제적 기회와 행복추구권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배분되고 각자가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그 목적이 얼마나 기만당하고 있는지를 국가보안법과 쌍용차 사태와 대기업의 독과점 등을 통해서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현 체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20몇 년의 교육과정을 통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전문가가 된 집단들은 바로 그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에 합헌 판결을 내리는 판사가 되고, 유신헌법을 초안 작성한 김기춘이 되고,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를 깨는 노무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특정 계급의 이익’이 곧 ‘사회구성원 전체의 이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호하지만, 자신들의 계급도 아닌 이데올로기, 그리고 자신들이 직접 만들지도 않은 이데올로기를 지킨다는 점에서 계몽 사상가들과 구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보편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환상만이 같을 뿐이죠.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은, 바로 이러한 지식 기술자 집단의 돌연변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상인, 즉 부르주아들이 지배계급이 되고 난 후 나타난 ‘그들의 이익’이 ‘모두의 이익’이 아닌 상황들을 알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이 늘어날수록 기업은 인건비를 아낄 수 있고, FTA에서 농민들이 희생된 대신 자동차 기업은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부르주아를 위해 만든 사상이 자동적으로 모두를 위한 사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은 것이지요. 이 때 전문지식을 가진 기술자들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전히 그들의 이익을 지킴으로써 보편적 가치는 자동적으로 성취된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게 함으로써 간신히 이뤄져가는 진행 중인 과정임을 직시할 것인가? 즉 보편적 가치가 이미 잘 작동하고 있다고 믿고 모두가 획일적인 방식으로 현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보편적 가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 각자의 상황에 맞는 ‘결코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방법으로 성취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인가를 말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의 지식인들은 전문지식 기술자 집단 중에서, 자신들의 지식으로 수행하는 일이 결코 ‘모두를 위한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님을 자각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과거 부르주아의 후손으로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즉 자유, 평등, 휴머니즘 등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며 자라온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칙의 옳음을 ‘지나치게 확신’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 이념의 반증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교육을 통해 자유, 평등을 배우지만 바로 경제적 혜택을 받은 자신들‘만’을 선발한 그 교육 자체가 자유, 평등의 허울을 증명하는 것임을, 그리고 이를 통해 자라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의식에 대한 반증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그들이 겪는 첫 번째 모순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전문 지식을 통해서 나오는 모순입니다. 이는 자신의 연구 정신과 그에 반하는 금기(교육을 통해 길러진) 사이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밝혔지만, 이제 우리는 혈통에 대항하는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와 평등에 대한 개념이 사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데에 활용되고 있으며, 진정한 의미로 다양한 인간을 포함하는 평등이 아니라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모든 인간은 부르주아와 같고, 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의 이데올로기로 점차 변질되었고, 그 역사적 결과로 제국주의와, 식민지와,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기업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가 희생되는 현실들을 맞닥뜨리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구하는 전문 지식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보편성의 정신을 견지하고 있으며, 금기 없는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무리 법이 현실에서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법의 기본 정신은 ‘성역 없는 처벌과 모두를 위한 공익의 장려’이며, 아무리 제약회사가 이를 막고 있다 하더라도 의료의 기본 정신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입니다. 또한 학자는 ‘브루노 정신’에 입각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부당한 외압으로 인해 수정하지 않을 권리와 의무, 지적소수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의문이 가는 점을 성역 없이 질문해야만 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연구가 곧 자신의 사상과 일치하던 계몽 사상가들이 후세에 남겨준 정신적 유산인 것이지요. 만약에 한 전문 지식 기술자가 자신이 배운 연구 정신을 충실히 믿는다면, 그는 자연스레 지금의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허울에 대해서 질문하고 탐구하게 됩니다. 먼저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부터 왜 법은? 왜 의료 서비스는? 왜 노동권은? 등등의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의 직업 정신에 입각해서 보편적 기술이 보편적으로 쓰일 방도를(예를 들면 효과적인 에이즈 약이 제약회사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아프리카에 무료로 배포될 방도라든지) 검토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의문을 단지 검토를 위한 도구인 이들 기술자들이 가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경제적 금기(연구비 지원)와 문화적 압력(빨갱이, 매국노, 배신자 등등의 딱지), 국가와 사유제, 시장경쟁 등에 대한 절대적 옹호를 가르치는 교육 및 학문적 주류의 입장 등으로 이를 막으려듭니다. 이 때 지식 기술자는 두 번째 고민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배운 이데올로기대로라면 바로 그 이데올로기의 현실과 실현 가능성 자체를 전문영역에서 자유롭게 연구해야 하나, 이를 막는 지배계급에 의해 통제 하의 연구를 해야 하는, 연구 정신에 충실하면 연구를 못하고, 이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연구가 가능한 그 어느 사이에서 방황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지배계급 또한 고민에 빠지긴 마찬가지입니다. 검토하는 자의 기본 정신은 회의하며 질문하고 이를 확인하는 것이기에 이런 능력 자체를 막으면 그 기능은 저하됩니다. 그러나 그 기능이 지나치게 활성화되면 이는 자신이 성취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그 목표 자체로까지(지배계급의 이익) 범위를 넓히게 되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다른 것은 다 회의하면서도 지배계급만은 회의하지 않을 수 있는 적당히 똑똑한 자들을 원하고, 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적당한 자유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게 지식 기술자의 세 번째 모순이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결코 지배계급은 지식 기술자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도, 온전히 자신들 세계에 편입시킬 수도 없는 ‘필요악’으로 경계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지배계급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직접적으로 생산을 담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배계급의 목표가 실현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에 노동계급에서도 그들은 앞잡이로 경계 받는 존재가 됩니다. 그들이 가진 기술은 모두를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기술이나, 아무도 그가 진지하게 이런 봉사를 수행하기를 원하지는 않는 모순. 이처럼 자신이 가진 기술이 본래 수행해야 할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식 기술자는 세 겹의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출신 성분이 가진 모순, 연구정신이 불러오는 모순, 대변할 집단이 없는 모순 말이지요. 그러나 이는 지식 기술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모순이 그에게 투영된 결과이며, 오히려 이런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는 과정에서 지식 기술자는 지식인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모순을 자각하고 지식 기술자가 끝내 자신이 믿는 자유, 평등의 가치와 연구정신의 가치를 자신의 존재와 조화시켜보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는 결국 ‘자신과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참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보편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결심은 필연적으로 ‘하층계급과의 철저한 연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보편의 가치가 진정으로 실현되는지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사회를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회 사이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기존 가치관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결코 지금, 여기의 사회를 벗어나서 미래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 사람은 헛짓거리를 하게 되는 것이죠. 미래의 시선으로 거리를 둘 수 없고, 자신의 계급 안에 머무른 채로 거리를 둘 수 없다면, 유일한 방법은 “그 존재 자체가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사람들 곁에 자기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그들의 고통이야말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고,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이데올로기를 변혁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근본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백혈병에 걸려 죽어간 삼성 반도체 노동자 분들 앞에서 삼성전자가 국익에 기여한다는 이데올로기는 허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시위를 하다가 전경의 방패에 찍혀 돌아가신 농민 분에게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은 허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분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사회가 되기 위해선 기존 이데올로기가 변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어서, 그 분들의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완벽하진 않지만 자신이 믿는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는 존재로 자신을 만들어가는 좋은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그들의 요구를 옹호한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직업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일이 되겠지요. 교수가 논문을 쓰지 않고 거리에 나오거나 정견을 SNS에 밝히고, 의사가 병원에 있지 않고 단식 농성을 하는 사람들의 영양 상태를 체크하는 등의 일을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건 한 마디로 ‘나대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지식인은 자신들이 가진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역설을 감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지식인이 되어갈수록 점차 자신의 계급을 배반하며 더욱 근본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는 것이고, 그 기형적인 행태는 사실상 이 기형적인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2. 지식인의 역할
문제는 이 ‘나댄다’는 평가가 지배계급만의 평가가 아닌, 그 도움을 받는 하층계급에서도 일관되게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는 것인데요. 앞서 밝혔다시피 지식 기술자는 두 계급 중 어디에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밝혀내는 일은 언제나 ‘맨 밑바닥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시선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에 같은 진영 내의 정치권력 하고도(예를 들면, 대기업 노조와 불화하는 비정규직의 편에 선다든지) 불화를 빚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지식인은 두 가지 얘기를 동시에 들을 수 있겠죠. 권력으로부터는 ‘사람이 왜 이렇게 비현실적이야’라는 얘기, 그리고 정작 자신이 연대하고자 하는 당사자들로부터는 ‘당신이 우리들에 대해서 뭘 안다고 나대십니까. 언제 장마 때 집에 비 한 번 새본 적이라도 있어요?’라는 유의 이야기들 말이죠. 이런 상황에 좌절해서 때로 지식인은 그들을 따라 자신을 지나치게 혐오하거나, 자신이 정말 똑같이 고통 받고 혜택 받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이해하는 척을 하거나, 자기들끼리 누가 더 ‘근본적’이고 누가 덜 ‘근본적’인지를 다투는 모습을 보이거나, 이거 저거 다 포기하고 책에서 말하는 ‘사이비 지식인’의 행태를 취하기도 합니다. 근본적인 시각을 인정하는 척 하면서 현실을 들먹여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양보를 주장하는 것 말이지요(예를 들어 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들의 고통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 야당의 힘이 약해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되어있다. 특별법은 양보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자는 식의 이야기들. 이는 사실 70년대에 나는 민주주의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한국의 민도는 아직 그걸 수용하기엔 너무 낮다. 민도가 높아지기까지 우리는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를 현실적 모델로 채택해야 한다는 식의 헛소리와 겹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같은 편인 척 하면서 사실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이익을 수호하는 것이 지식인을 포기한 사이비 지식인의 역할인 것이지요.). 그러나 지식인은 이런 비난에 겁먹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혜택 받지 않고는 지식 기술자가 될 만한 교육을 받을 수도 없고, 그 혜택을 혜택이었다고 인지하는 순간부터가 지식인이 되는 과정인 현 사회에서 지식인의 계급적 한계로 그들을 비판하는 것은 입을 닥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밖에 될 수가 없습니다. 하층계급에서 그들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지식 기술자가 나오는 게 아직 꿈인 상태라면, 이런 지식인의 계급적 한계는 차라리 그들의 역할을 수행하게 해주는 데에 최선의 상태일 수 있습니다. 모두에게 욕을 먹는 바로 그 자리 때문에 지식인은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겁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자신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식인은 그들에게 친근함을 느끼며 같은 편이라는 ‘주관’을 가집니다. 그러나 자신의 계급적 한계와 근본적 시각 때문에 그들을 낯설게 느끼는 ‘객관’ 또한 갖게 되지요. 즉 그들의 이익을 위해 방법을 모색하는 주관과, 그들이 말하는 이익이(많은 경우 그들을 지원하는 좀 더 큰 조직체에서 주장하는) 정말 근본적으로 이뤄야 하는 과제의 차원에서 맞는 이익인가, 이들 계급이 현 사회에서 가진 특수성과 그 특수성 때문에 사회 변화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할이 무엇이 있을까를 모색하는 객관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언제나 같은 편인 듯 같은 편이 아니고, 욕을 먹는 것은 그들의 숙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감내하고 그들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수행하는 구체적 기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자신과 자신이 연대한 계급 안에서 나타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밝히고 타파하는 일입니다. 홍세화 씨가 ‘생각의 좌표’란 책에서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이라 이름 지은 적 있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말입니다. 노동자이면서 노조에 반대한다던지, 차가 없으면서 철도민영화 반대 파업에 욕을 하는 그런 의식들, 혹은 노동자 계급을 위한다면서 개인숭배를 행하는(북한) 그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외부자의 입장에서 철저히 파악하고 고발하는 것이 지식인이 맡은 첫 번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자신이 가진 지식 기술을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연구하는 데에 쓰고, 이를 그들에게 알려 언젠가는 그들 속에서 자신과는 다른 유기적 지식인이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3. 자신의 본래 원칙인 자유로운 연구 정신, 이를 통해 얻은 지식의 보편적 보급에 힘씀으로써 지배계급을 위한 목표가 아닌 모두의 이익을 위한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4. 모든 권력에 대항하여(자신이 가입했거나 지지하는 정당, 시민단체, 노동조합 등을 포함하여) 그들이 가진 한계를 비판하고 그들의 자리에서 수행해야 할 더욱 근본적인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하며 그들의 행동이 이 과제를 향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현대차 노조가 당면한 과제는 임금 20% 인상일 수 있고, 이를 해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투쟁을 접을 수도 있습니다만, 지금 노동자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큰 조직에서 수행해야 하는 역사적 역할은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전체적 단결을 그들이 꾀해주어야 함을 외부자인 동시에 내부자인 사람의 입장에서 일깨워주고 유도하는 것이 또한 중요한 지식인의 기능입니다.
5. 본디 검토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기능을 살려, 이러한 목표들을 이루기 위해 가진 모든 수단을 검토하고, 이미 사용하는 수단들의 적절성을 살펴야 합니다.
6. 지식인 집단 내에서의 논쟁과 갈등을 사상의 발전 차원에서 기꺼이 받아들이되(예를 들어 민주당을 비판적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 정당을 끝까지 지킬 것인가, 혹은 지금 같이 지지하는 어떤 정치인의 실수가 사퇴감인가 잘못을 인정하되 우리 쪽에서라도 이를 감싸줘야 할 문제인가 등등, 결국 현실과 근본적 원칙 사이의 이런 논쟁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도 자신 안의 이런 모순과 긴장하며 스스로와 싸워야 하는 것이 지식인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가리는 것보다 보다 심화된 입장에서 양쪽 모두를 초월할 수 있는 제 3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할 수 있음을 자각하고 정반합의 변증법적 화해를 모색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진정한 지식인의 기능입니다. 말만 들어도 너 잘났다. 왜 그렇게 나대냐. 현장 사정도 모르고 속편하게 비현실적인 소리 한다는 등의 욕을 먹기 딱 좋은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본 책에서 얘기하듯 지식인이 올바로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지의 여부는 얼마나 욕을 먹는가 혹은 지지를 받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스스로가 알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지식인의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신의 모순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이를 끊임없이 자기비판하는’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위에 언급한 6가지의 기능들은 아무것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고 인정받은 기능이 없습니다. 어느 기관에서 인증해준 것도 아니고, 실질적인 생산을 해내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누가 간절히 찾지도 않을 그런 일들이지요. 그러나 저 행동들이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근본적인 기능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유는 지식인들이 저 일들을 함으로써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결코 없어지지 않을 자신들의 모순을 계속해서 보여주게 되고 반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반성이 철저할수록 우리는 자신들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사실 누구나 자신의 진정한 목적과 괴리된 자신의 행동을 알고, 도구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어서 그리 된 것인지를 명확히 파악할 전문 지식과 정밀한 연구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입니다. 지식인들은 바로 이들을 대신해서 자신의 모순이 사회의 모순과 연결되어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괴로워하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대신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명확히 반성하고, 정확한 지점에서 괴로워하는 게 지식인의 자세이며 기본 임무라는 것이지요.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자신들의 모순을 되돌아보는 법을 자각하도록 말입니다. 한마디로 지식인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모순을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보편적 가치는 절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며, 이를 이루는 방법은 각자가 처한 상황마다 특수할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예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분쟁이 벌어졌을 때 “이스라엘도 나쁘지만, 거기에 폭력으로 맞서는 팔레스타인도 다를 거 없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는 평화에 대한 보편적 가치가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방식으로(‘양쪽이 서로 양보하고 손잡고 화해하세요.’ 같은) 손쉽게 이뤄지지 않음을, 한 민족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정치적 맥락이란 특수성 속에서 평화란 보편적 가치는 때로 투쟁이란 특수한 방법으로 성취되기도 하는 것임을, 그래서 그 수단을 무엇을 택할 것이며 그것이 목적을 훼손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격렬하고 때로 집단을 분열시킬 정도로 복잡한 문제라는 것을 간과한 채 모든 문제를 추상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나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이미 보편적 가치가 실현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여겼을 때 그런 속편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나의 특수한 상황 자체가 곧 보편적 가치의 미실현을 증명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문제에 있어 나와, 그 문제에 처한 사람들의 특수성을 고려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택하는 수단이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란 목적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지식인이 유의해야 할 첫 번째 사항입니다.
다음으로는 ‘just do it’의 원칙입니다. 앞서 말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대해 말한 사람이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책상 앞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추상적인 원칙과 추상적인 이론뿐이기 때문에, 그것이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일단 직접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존재 자체로 폭로하는 사람들’의 행동에 적용되어야 하는 경우라면,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먼저 판단내리거나 그들에게 지침을 내려줄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게 아니라, 일단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내부자로 들어가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입니다(어차피 지식인은 절대 완벽한 내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내부자라는 착각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이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흐름에 자신을 맡긴 다음에야 지식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지식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 행동들의 성격과 의미와 가능성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볼 자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지는 판단이나 지침은 사실상 보편적 지식을 보편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평화를 이루기 위해선 사람들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식의) 동어반복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은 이미 달성된 성취가 아니라 이루어야 할 목표라는 것, 그리고 이를 이루기 위해선 항상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이를 파악하기 위해 현장에서 철저히 사람들과 섞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에서 강조하고 강조하는 지식인을 위한 두 번째 유의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지식인의 형성과정과 지식인이 처한 모순, 그로 인해 가능한 사회적 기능과 이를 수행하는 데 있어 유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남는 의문이 있습니다. 실용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자신이 배운 교육의 보편적 가치와 자신 처지의 계급적 특수성 사이의 모순 때문에 괴로워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되는 것이 지식인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김수영 같은 사람들, 즉 실용적 지식 기술자라기 보단 비실용적 언어의 기술자라 볼 수 있는 시인과 소설가 같은 사람들을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입니다. 문학을 예술의 일종으로 볼 때,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이데올로기의 폭로보단 이데올로기를 가리고 꾸미는 데에 더 잘 쓰이거나(레니 리펜슈탈), 최소한 그런 것과는 관련이 멀어 보입니다. 더구나 시나 소설을 짓는 능력을 ‘실용적’ 능력으로 볼 수 있을지, 사람들이 그걸 읽으면서 ‘실용적’ 이익을 얻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드는 것이지요(또한 거기에서 얻는 효용이 의료나 법처럼 모두에게 똑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지식인은 자신이 지지하는 계급에 섞이기를 원하나 그럼으로써 더한 고독을 경험해야 하는 존재이지만, 작가는 자신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고독을 필요로’하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일반적인 지식인과는 달라 보이는 작가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작가는 때로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한국의 김수영처럼 진정한 지식인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문학이란 장르의 본질적 성격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낸 일시적 현상일까요?
이 책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것은 ‘현대’ 문학이 문학다워지려면 가질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성격이며, 현대 작가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지식인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작가는 일반 지식 기술자와는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통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지식 기술자들은 자신들만의 전문용어를 사용합니다. 의학용어, 법률용어, 화학기호 등, 각 분야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협의 하에 만들어낸 기술적 약어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지식 전문가에 대한 정의는 ‘자기 분야 언어의 주인들’이라고 내려질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새로운 현상이나 물체가 나타났을 때, 거기에 이름을 붙일 권리는 그들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런 기술적 약어들이 아닙니다. 일반 대중들이 쓰는 공통언어, 심지어 니미, 시부럴, 젠장 등의 비속어까지가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의 영역이 됩니다. 이런 언어들은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너무 풍부’한 동시에 ‘너무 빈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지식’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한자어는 ‘知識’입니다. 그 생김새를 따라 어원을 짐작해보면 활, 입, 말(言), 악기, 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 조상들은 무예와 언변과 악기를 다루는 능력을 반드시 갖춰야 할 교양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이란 단어가 현대 사회에서 쓰이는 한정된 의미를 넘어 역사를 거치며 쌓여온 의식의 변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풍부’하지만, 동시에 지식이란 단어가 현대사회의 지식체계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함에도 그 역사를 거치며 고정된 말버릇과 단어 체계 때문에 이를 대체할 새로운 단어를 만들거나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경직성 때문에 ‘너무 빈약’합니다. 이는 기술적 약어를 사용하는 타 분야 전문가들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분야의 언어들과는 달리 작가가 사용하는 공통언어는 정확한 언어의 창조가 기존의 규칙이 가진 한계에 묶여 있고, 그 규칙으로 인해 개개인의 의도와는 다르게 언어가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 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작가들은 대중들이 쓰는 언어의 규칙, 예를 들어 관용어, 유행어, 문법, 어휘 등등을 멋대로 고치거나 사용처를 달리하게 만들 권한이나 힘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소유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달리 보면, 그들은 바로 그 언어의 규칙을 이용해서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표현을 만들어내는 언어의 주인이기도 합니다(문학의 사례는 아니지만, 랩의 라임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걸 작가는 자신의 언어와 ‘썸 타는 관계에 있다’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작가는 언어를 직접적으로 만들거나 바꾸지는 못하지만 규칙의 한계를 창조적으로 이용하여 그 한계를 가능성으로, 즉 그 전에는 담지 못했던 정보를 새롭게 담아내도록 바꾸는 식으로 언어를 가지고 놀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은 바로 그 한계이자 자율적인 성격 때문에 일부러 공통언어를 사용한다고까지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 때 우리는 작가가 공통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생겨나는 효과에 주목하게 됩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지만 그 줄거리가 작가가 말하고 싶은 전부인 걸까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진술서를 읽거나 구술을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한한 말장난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의 전부인 걸까요? 그렇다면 차라리 친구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 되겠지요. 이 책의 저자가 ‘작가는 할 말이 있지만, 아무것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지점은 소재와 그 소재를 풀어나가는 언어적 형식의 혼합 어딘가에 있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는지를 직접 말하는 순간 그것은 ‘진술’이지 ‘문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독자가 직접 읽고 느낌으로 전달받아야 하는 어떤 것이고, 이것은 그래서 말로 이루어져 있지만 역설적으로 ‘침묵의 전달(저자의 표현대로라면)’입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침묵의 전달’이 ‘본질적으로 지식인이 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를 위해 우리는 문학의 성격을 그 내용과 문체로 나눠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학의 시점을 객관적 관찰의 시점과 주관적 경험의 시점으로 나눌 때, 어느 쪽이건 작품 내용은 ‘추상적’입니다. 즉 그 작품을 만들어낸 사회와 작가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읽은 작품은 절대 그 깊은 의미를 잡아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객관적 관찰의 대표인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작품을 예로 들어보죠. 그가 작품 속에서 객관적 관찰을 시도했다고 해서 우리가 이름만 가리면 그 작품이 에밀 졸라의 것인 줄 전혀 몰라볼까요? 그 작품에는 에밀 졸라가 즐겨 사용하는 캐릭터, 장치, 줄거리 전개 등이 인장처럼 박혀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해낼 수 없다면 그는 작가가 아닌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그 인장에는 ‘자기가 묘사한 사회의 산물로서의 졸라’의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시선이 무의식처럼 스며들어가 있습니다. 반면에 철저한 주관적 경험을 견지하는 일본 사소설을 읽는다고 해서 거기에서 사회상을 읽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일까요? 하다못해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장면을 읽으면서도 우리는 일본 편의점과 한국 편의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객관적 관찰을 지향하는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 개인의 시선을 발견하고, 개인적 느낌을 지향하는 작품에서 그 느낌을 받도록 개인을 조건지우는 세상을 발견합니다. 그럼으로써 그 작품들은 완벽히 객관적일 수도, 주관적일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독립적이고자 하는 작가 안에 사회구조가 내재화되어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사회구조의 일부분으로만 작가를 보기에는 그 작가만의 독특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독립적인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작가의 독립성과 사회구조는 작품 속에서 서로 상호작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느낌으로 이뤄질 뿐이죠. 이것이 내용으로 전해지는 ‘침묵의 전달’이며, 이러한 상호작용을 메를로퐁티가 주장한 ‘세계 내 삽입’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영향력을 받으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가질 수 있고, 이 시선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우리들은 보여지기 때문에 보는 사람이다.’). 사실 우리는 사회의 일부분으로서만 사회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나에게 자신이 어떤 사회의 일부분이며, 이것이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한 주체적이고 객관적인 자각이 없었다면 사회는 나를 통해 표현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주체성은 사회구조에 의해 제약당하지만, 동시에 그 주체성을 통해서 비로소 그 제약이 드러나고 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시작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작가의 작품은 형식에 관계없이 필연적으로 이런 과정을 담아낸 결과물이기 때문에 모든 작품이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건 줄거리나 관습적 장치 자체가 아닙니다. 작가들이 그런 것들의 혼합으로 전달하고 싶은 것은 주체적으로 사회를 자각하고 그 사회에 대한 자각 속에서 자신이 어떤 사회의 일부분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과정은 모두가 하고 있고 해내야 할 보편적인 목표이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각자의 성질과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란 점에서 개체적입니다. 또는 성질과 상황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이를 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해있단 점에서 모두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발현시켜 성취해야 할 구체적 목표들은 각자 다를 수 있단 점에서 개체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모든 작품이 작가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나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의 경지를 나름대로 성취한 결과물이란 점이고, 이를 읽음으로서 사람들은 자신과 완벽히 다른 사례의 작품에서도 ‘나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를 고민하고 자극받게 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기존의 관습을 폭로하고 이를 벗어나 자신의 주체성을 찾을 것을 역설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서부터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말이 아닌 말이 흘러가는 그 흐름 속에서 느낌으로 전달되는 것이기에, 작가는 본질적으로 전달할 것이 있지만(각자가 나를 통해 표현되는 사회란 어떻게 가능한지를 감 잡아라) 이를 직접적인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그걸 선언처럼 말하면 감이 안 오니까 자신의 경험과 소재와 문체를 섞어서 본을 보이는) ‘침묵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지요.
자, 그러면 이와 같은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낳을 수 있습니다. 왜 그 전달이 꼭 ‘언어’여야 하는가? 정확하게는, 왜 ‘공통언어’를 통해서 그와 같은 전달이 이루어지는가? 여기에 대해 저자는 우선 세계 내 존재와 공통언어가 가진 유사성을 제시합니다.
우선 공통언어는 두 가지 면에서 세계 내 존재와 흡사합니다. 말과 그것이 지칭하는 의미 사이의 관계를 따졌을 때, 말은 그 의미를 지칭하는 다른 많은 언어들의 일부분입니다. ‘달’은 ‘月’도 되고 ‘하현’이나 ‘상현’도 되고 ‘이태백이 놀던 곳’이라고 지칭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서로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지에 대한 공감대만 형성되면 말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변형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 있어서 의미의 일부분인 공통언어는 사회의 일부분인 사람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동시에 그 의미에서 해방되어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란 시구에서 달은 정확히 그 달만을 가리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 의미와 정서가 달이란 이미지로 압축되어 나타나게 되지요. 즉, 말이 의미의 일부분이란 관계를 벗어나, 의미가 말의 일부분이 되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전문가의 기술적 용어들에선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작가가 사용하는 공통언어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사회의 일부분이나 동시에 주체적 시각으로 기존 사회를 재해석 할 수 있는 사람과 닮은꼴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사람과 사람을 의사소통시키는 말의 기본적 기능에서도 이와 같은 유사점은 나타납니다. 이는 ‘공통언어는 나 자신과는 다른 또 하나의 나로서의 나에게 전체로서 부과된다’라는 식으로 설명되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있을 때의 나의 모습과 특정 관계 속에서의 나의 모습을 조금씩 분리시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대하는 나의 언행이 혼자 있을 때 멋대로 감정에 취해 혼잣말을 하는 언행과 같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때 관계 속에서의 언행을 규약 하는 나름의 관습이 언어를 통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진지 드세요” “밤새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생신 축하드려요” 등등의 말이 자식이 부모에게 할 만한 관용어구로서 채택되는 것이지요. 이는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사회적 협약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공통언어가 만들어진 가장 기본적인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때, 식사시간에 내가 부모님에게 “진지 드세요”라는 말을 썼다고 가정한다면, 이를 두고 관계 속에서 말해져야만 하는 언어의 규약이 강제로 이 말을 하도록 시켰다고 볼 수도 있고, 그냥 내 입을 통해서 스스로의 의지로 나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둘은 관계 속에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특정 상황 속에서 해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말이니까 자동적으로 나온 것인 동시에, 밥을 먼저 먹으라고 권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적당한 말을 스스로 고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 말을 하는 나를 나로 볼 수도 있고, 관계 속에서 달라지는 ‘내 안의 다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혼자 있을 때의 나와 자식으로서의 나는 다른 사람이고, 달라져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렇지만 나와 마주하고 있는 내 부모님도 혼자 있을 때의 당신 모습과, 자식 앞에서 보이는 부모로서의 모습은 다른 모습이고, 달라져야 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로 다른 사람으로서, 즉 부모로써 써야 하는 말을 고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통언어는 사람들을 관계 속에서 의사소통하는 ‘주체 대 주체’로서 연결시키는 동시에, 관계의 규약을 충실히 지키는 ‘타자로서의 나’와 ‘타자로서의 타인’을 연결시키는 매개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통언어는 그 근본적 기능에서부터 ‘사회의 일부분인 나’와 ‘사회를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나’를 동시에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작가의 문체라는 것은 그것이 공통언어의 이와 같은 성질을 적극적으로 개발해낸 결과물이라는 점 때문에 그 자체로 세계 내 존재인 사람의 한계와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작가 자체가 세계 내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을 닮은 공통언어를 ‘내가 표현하는 사회’를 가장 잘 드러낼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체는 의미에 구속된 동시에 해방된 말, 관계를 구속하는 동시에 관계를 선택하게 만드는 말이 한 개인의 손끝에서 주체적으로 조율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언어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소설의 캐릭터와 시의 대상들은 그 문체를 통해 묘사되었다는 자체만으로 사회의 일부분인 나와 주체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나라는 세계 내 존재의 한계와 가능성을 상징하게 되며, 세계 내 존재인 작가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구 하나하나를 통해 전달된다고 보기 보다는 그 전반적인 문장의 흐름을 통해, 문장 구조 자체에 대한 느낌을 통해 전달되는 것이기에 이 또한 ‘침묵의 전달’인 것이지요. 덧붙이자면, 이 또한 독자에게 세계 내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도록 자극하는 역할을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그저 유유자적 하는 나그네라는 하나의 간단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정보는 말들의 적절한 해방과 간결한 운율이란 긴장 사이의 조율로 ‘박목월의 문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나그네’와 이를 관찰하는 ‘자신’의 관계를 ‘자신만의 언어’로 포착하고자 했던, 관계의 일부분으로서의 내가 관계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나로 거듭나고자 했던 시인의 승리인 것이죠. 그리고 이는 바로 그런 가능성을 닮은꼴로 품고 있는, 즉 의미의 일부분이나 의미를 선택하는 도구로 거듭날 수 있고, 관계를 고정시키나 관계를 변형시키는 도구로 거듭날 수 있는 공통언어를 사용했기에 이룰 수 있었던 성취입니다. 문체는 이처럼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제시하고, 그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체가 가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작가가 생산해내는 작품 자체의 한계로 볼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것이 작가 자신만의 세계 내 삽입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문체라는 것은 ‘같은 역사에 의해 개별적으로 형성된 개인에게 나타나는 시대의 <맛>’입니다. 반복하여 말하지만 사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이를 주체적으로 해석해낸 사람의 결과물인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나의 해석의 결과물이란 점에서 근본적이지만, 동시에 나만의 해석이기 때문에 남에게 있어 가능한 세계 내 삽입에 대한 자각이 무엇인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내가 경험하지 못했거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스쳐지나간 타자들을 배제한 상태로 이뤄낸 ‘나만의’ 성취이기 때문에 문체는 침묵의 전달로서의 배후, 사회적 영향력이 가지는 편견이란 배후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단지 명백한 것은 내가 해석해냈다고 생각하는 눈앞의 세계는 사실 사회적 영향력이란 배후에 의해 조건 지워진 해석이며, 문체는 그 해석을 체화해낸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옳은 해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가의 시선에서 옳고 보편적인 가치가 정말 현실 사회에서도 그런지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작가의 작품 안에서도 서로 갈등을 겪고 모순을 보임으로써 폭로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작가의 작품에 찬사만을 보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작가가 그려낸 어떤 묘사나 어떤 문구에는 동감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구에는 의아함을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언제나 작품은 독자에게 있어 비판적 수용의 대상이며, 항상 전적인 인정이나 거부가 아닌 부분적인 지지와 부분적인 거부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문체는 작가의 편견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를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을 암시하고, 이를 통해 구성되는 모순적인 문구와 캐릭터들은 그 자체로 작가의 조건을 넘어서 그것들에 대한 부분적인 부정과 부분적인 긍정을 통해 실제 현실을 검토하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자는 그 모두를 살피는 과정을 통해서 작가의 진정한 의도를 완성해가는 것이겠지요. 내 눈으로 보는 사회라는 것을 성취해가는 과정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작가가 생산하는 작품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침묵의 전달’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어째서 본질적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내용과 문체를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작가는 작품을 통해서 ‘사회 속의 나’, ‘내가 바라본 사회’를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폭로함으로써 모두에게 내재되어있는 주체성을 자극시키고, 이 주체성을 한계 짓는 상황 또한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깨닫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들은 작품 속에서 사회구조를 자신의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자연스레 나타내야 하며, 동시에 그 사회구조를 자신의 시각을 통해 재해석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도달하는 데 특별히 제한되는 형식은 없지만(오히려 특정한 형식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반대되어야 합니다. 개체의 해석을 중요시하는 것이 문학이기에.), 어쨌든 작가는 ‘내가 표현하는 사회’를 최대한 주체적이면서도 최소의 모순을 가지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 자신 계급의 특수성에서 출발하여 그 특수성을 극복하고 보편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특수한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사회 속의 나, 내 안의 사회라는 것을 확인하는 능력이란 보편적 가능성을 실현시키기 위해 언어를 통해 가장 특수하고 생생한 하나의 체험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방법으로 보편적 가능성을 시사시키는 일이 그의 일인 이상,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하는 한 누구나 본질적으로 지식인인 것이지요.
이렇게 긴 글을 통해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저한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식인이란 왜 근본적이며, 근본적이어야 하는지, 지식인의 출신 성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지 등에 대한 설명을 통해 현재 한국 사회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소모적 논쟁에 대한 나름의 시선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제 느낌을 나름대로 풀어쓴 이 서평이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