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지음, 강희경.이해찬 옮김 / 돌베개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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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일이지만, 거의 최초로 제 전공과 관련된 고전을 읽어보았습니다. C. Wright.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입니다

 

  

59년에 나온 하나의 사회학 서적이라고 하나, 사실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말은 이제는 하나의 개념어와 같이 되었고, 이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안 들어볼 수가 없는 고전적인 어휘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어떤 어휘를 한 번 들어봤다거나, 어렴풋한 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충분히 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만들어낸 Mills의 말대로, 하나의 개념을 안다는 것은 그 개념이 가진 함축성을 풀어 여러 차원의 구체적인 의미로 분류 지을 줄 알고, 또 거꾸로 그 구체적인 분류들이 가진 본질적인 공통성이나 규칙이 얼마나 통일성 있게 다시 묶일 수 있는가를 재검토해 봄으로써 그 개념이 가진 의미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확대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때, 그리고 이를 어떤 문제에 적용시켰을 때 명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지를 정확히 알 때,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최대한 쉬운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렇게 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저는 분명히 여기서 설명하는 개념들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적어도 제가 제 전공에서 자주 쓰는 말이 생겨난 근원 격인 책을 한 번이라도 정독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역시 쉽진 않았지만요.

  

 

사실 이 책은 굉장히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1장에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종합적인 주제를 개괄한 후, 2~6장에 걸쳐 기존 사회학의 잘못된 경향을(50년대 말의 미국 사회학의 경향입니다.) 비판 한 후, 다시 7~10장에 걸쳐 자신이 바라는 사회학의 미래와 진정한 사회과학자의 자세를 서술한 후 부록으로 이와 같은 사회과학자가 되기 위한 노하우랄까 그런 것들을 적어놓습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모든 것들을 적어놓은 책 치고는 분량이 짧은 편입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왜 그는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 주제에 대해서 그토록 단순하고, 짧게 썼던 것일까요?

   

여기에는 Mills의 글쓰기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Mills에게 있어 무조건 글은 쉽고, 분명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알아먹을 수 있게 쓰라는 의미만이 담긴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있어 사회학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지지하며, 무엇을 배척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행위였습니다. 또한 그에게 사회학은 불변의 법칙을 찾아내는 자연 과학이 아닌 지금, 여기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밝혀내는 학문이었습니다. 글이 분명해야 함은, 그래서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무엇이며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를 명확히 밝힘으로써 읽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판단을 요구함을 의미합니다. 쉬워야 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화를 바라는 글쓰기로서 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대다수의 사람(여기서는 ‘공중’이라고 표현합니다.)이 동감할 수 있는 글이어야 그 목적이 달성됨을 의미합니다. 정교한 논리 전개는 꼭 필요한 부분에서만 해야 그 사람들이 복잡해하지 않을 것이니 당연히 중요한 부분만을 살려야 했겠지요. 이렇게 책의 목차와 분량에도 저자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학문적인 엄정성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그 엄정성이 더 큰 변화를 만들어내기를 바라는 역동적인 균형감각의 글쓰기를 Mills는 바로 이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저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Mills의 열정을 느끼면서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1장을 살펴보죠. ‘약속’이란 제목이 보입니다. 왜 ‘약속’이라는 말로 책의 시작을 열었을까요? 저자의 말은 이렇습니다. “...사회학적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와 개인의 일생, 그리고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양자 간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과제이며 약속이다. 이러한 과제와 약속을 인식하는 것이 고전적 사회분석가의 특색이다.(p.19)” 저자는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용어를 지금 당장 분석이 필요한 연구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란 제목은 그런 능력이 하나의 목표이며, 언제고 고전 사회학자들이 인간에게 약속했던 능력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회학이 품어왔던 ‘오래된 미래’로서 사회학적 상상력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1장에서 간결하게 정의내린 사회학적 상상력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한 개인의 사적이고 통제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환경이 보다 더 큰 구조 속에서 가지는 위치와 작동하는 맥락을 파악하여, 개인의 고통이 공공의 영역에서 가지는 의미를 추론해 낼 줄 알고, 사회구조의 변동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들이 다양한 영역의 개인들에게 미칠 환경적, 심리적 영향을 유추해 낼 줄 알며, 현재의 사회구조가 형성된 과정과 그것이 앞으로 나아갈 경향을 역사적 단계 속에서 위치 지을 줄 아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한 이성적 인간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사회적·역사적 행위자로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주체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능력.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이렇습니다. PC방을 자주 가는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이 학생은 자신이 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사적인 환경으로서 PC방을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것은 90년대 말 김대중 정부가 대대적으로 단행한 인터넷 통신망 광역화 사업, 이를 물리적 기초로 만들어진 온라인 게임 산업의 부흥, 적은 돈으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여가시설의 부족 및 여가 시간을 마음껏 즐길 수 없는 한국의 교육 구조가 중첩되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이 학생은 자신이 PC방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사회 구조적으로 PC방을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 개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을 인식할 때 한 학생이 PC방을 가는 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인터넷 문화와 여가 시간의 활용에 대한 공공의 문제가 됩니다. 반대로 PC방이 전국적으로 퍼져있는 지금의 상황이, 모든 개인들에게 똑같은 환경과 심리상태로 다가올까요? 수도권과 지방의 PC방 문화, 90년대 말 PC방이 가진 청소년 사이의 위상과 지금의 위상 차이, 남자와 여자가 PC방에 대해 가지는 다른 생각들, 이런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요? 이 때 PC방은 공공의 문제에서 그 공공의 문제가 개인들에게 끼칠 서로 다른 영향력을 상상하는 공간이 됩니다. 이처럼 사회학적 상상력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공공의 영역에서 토론 가능한 사회적 의제를 끄집어내며, 사회적 의제가 개개인에게 미칠 다양한 영향력을 고려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체적 개인의 역사적 행위 설정은 좀 더 큰 사례를 두고 얘기해 보겠습니다. 일자리가 없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우리가 지금 당장의 모습과 멘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소리만 들으면 그저 개인적으로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자리가 없는 사회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으며, 내가 이 사회에서 처한 역사적 위치가 무엇인가를 자문해봤을 때, 이것은 7~80년대 국제적 분업 경제 체제 속에서 대량 생산 산업을 담당했던 한국의 역할이 90년대 새로운 역할(콘텐츠 중심의 아이디어, 문화 산업)을 담당할 준비를 하기 직전 IMF를 맞으며 기존 제조업 중심 재벌들에게 특혜를 몰아주며 살아남은 역사적 선택의 결과이며, 이 속에서 부족한 국제적 경쟁력을 싼 노동력으로 보완해야 하는 재벌 기업들을 위해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한 20대 청년의 위치가 내가 속한 조건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노력만으로 이 구조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 때, 그는 역사적 행위자, 즉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중의 한 명으로서 중소기업의 강화, 협동조합의 경제적 기회 보장, 임금 절감을 통한 경쟁력 제고가 아닌 고숙련 기술자 육성 교육을 통한 품질 제고 등의 요구를 당당히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88만원 세대 참고.). 결국 사회학적 상상력이 가진 궁극적 목적은 각 개인들이 저마다 공중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체적 개인의 역사적 행위 설정이란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학이 이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Mills 개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진정한 사회학자는 자연법칙을 갈망하는 관찰자이기 보단 필연적으로 공중을 길러내는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서, 그 자신이 먼저 공중의 한 명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토록 가치판단이 확실한 글을 썼던 것이지요.

 

다시 약속이란 말로 돌아갑시다. 이렇게 좋은 일이, 왜 현실이 아닌 미래의 약속인 걸까요? 아마 이를 실현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겠죠. Mills는 사회학을 사회학답지 못하게 만드는 50년대 말 미국 사회학계의 몇몇 경향을 2~6장에 걸쳐 풀어놓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사실 우리 사회학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2장인 거대이론에 대한 장은 불변의 법칙을 발견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Mills가 예로 들은 파슨스의 저작에서 우리는 그런 경향의 특징을 알 수가 있는데, 이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자연 법칙과 같은 것을 사회에서 찾고 싶어 합니다. 제도와 질서에 대한 이야기, 이에 대한 일탈과 이를 정당화시키는 이야기 등 다양하고 (Mills스러운 표현에 의하면) 쓸데없이 정교한 논리들이 엄청나게 두꺼운 책을 만들어내지만, Mills는 이 모든 것들이 현실 사회 속에서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이론은 본질적으로 특수 이론이고, 그것은 특히 사회학 분야에서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맥락을 배제한 상태로, 이 곳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배제한 상태로 어디에나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이란 게 있을 수 있을까요? 동아시아와 서구 유럽의 다른 근대화 과정이 얼마나 다른 사회와 국민성을 만들어냈는지를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이 곳의 다른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만들어낸 거대 이론은 어떤 유용성(개개인에게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고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알려주는)을 던져주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개념을 쪼개거나, 합치거나, 의미 없는 재분류를 할 뿐입니다. Mills에게 있어 사회학 연구의 정당성은 항상 ‘지금, 이 곳’에 대한 설명에 있었습니다. 인간과 사회와 역사는 엄청난 다양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앞에서 어떤 절대성을 찾아낼 수 있다는 오만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p.204 8장, 역사의 효용)입니다. 또한 현상을 보고 이를 해석하려 들어야지 해석 틀을 미리 만들어놓고 거기에 맞게 현상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Mills의 경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떠올리게 만드는군요. 자신의 침대에 맞춰서 손님의 키를 늘리거나 발을 잘랐다는 악한 말입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새겨들어야 할 말일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는 자연과학의 연구 절차를 본 따 목적을 달성하고 싶어 하는, 방법론적 금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3장 추상적 경험주의에서 Mills는 이런 경향이 사회학이 가진 본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하고 사회학자를 관료들과 이데올로기에 종사하는 단순한 조사 기술자로 만들어버린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자연과학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명백한 데이터에 기반 해서 가설을 검증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회학에서 무엇보다 해야 할 것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이터의 명백한 사실성을 검증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제대로 된 과학을 할 수 있다는 것. 이 이야기는 언뜻 보면 그럴듯해 보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접하고 다루고 있는 하나의 사실과 현상이, 과연 자연과학이 실험하는 순수 철, 순수 인, 순수 황산 같은 것처럼 독립적으로 떨어질 수 있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만 결합시켜 결과를 지켜볼 수 있을 만큼 통제 가능한 재료들인 걸까요? 이들은 개개인들의 심리와 행동을 하나하나 모아나가면 전체 구조를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우리가 한 개인의 행동에 어떤 맥락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단 하나의 맥락만을 지배적으로 가진 하나의 행동이 어디 있으며 그것들만을 어떤 식으로 모을 수 있는지, 과연 알 수 있겠습니까? 사회학자는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다뤄야 하는 재료를 완벽히 알 수 없으며, 설령 완벽히 안다고 해도 시간과 자금과 권력 등의 문제로 이를 완벽히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자신들의 방법으로 완벽히 통제 가능한 사실들만을 연구에 쓸 자격이 있는 데이터로 인정하며, 이런 데이터를 통해 얻어낸 결과만을 진정한 연구결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신들의 방법으로 검증할 수 없는 연구 주제나 가설은 철저히 부정됩니다. Mills는 이를 ‘방법론적 금기’라고 부릅니다. 사회학이 본래 가졌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질문과 호기심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방법이 주가 되면서 거꾸로 방법에 자신들의 질문을 맞추는 전도 현상. 이는 추상적 경험주의자들의 조사 현실에서도 나타납니다. 자금과 정보의 부족으로 이들은 주로 정부나 기업과 연계하여 수감자 통계, 기업의 수요 조사 등등에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합니다. 이것이 설령 매우 정확한 방법으로 결과를 내놓는다고 한들, 과연 이것들이 누구를 위한 지식이며, 무엇에 도움이 되는 지식이겠습니까? 자신들의 ‘확실한’ 방법으로 ‘확실한’ 사회적 통찰을 얻어내겠다는 추상적 경험주의는 이처럼 자신들이 주장하는 ‘확실한’ 방법에서 더 이상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관료주의적 의식으로 거대 조직의 이익을 올려주기 위한 기능적 지식만을 생산해 내며, 그럼으로써 사회에 대한 전체적 상을 그려내야 하는 사회학의 목적은 상실되고 사회학자의 위상은 지식인이 아닌 기술자로 축소됩니다. 

 

반면 이들은 이렇게 반박하기도 합니다. 이런 식으로 ‘확실한’ 사실들이 쌓여 가면 언젠가 그것들이 모여 세상의 뼈대를 보여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싶다고 결정한 문제들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식이 없는데 답이 먼저 나올 수는 없는 것처럼, 정보를 모아간다는 것은 단순한 축적이 아닌 가설과 문제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지금까지 본 백조가 모두 하얀색이므로 모든 백조는 하얗다는 귀납을 행하기 위해선 세상의 모든 사물이 아닌 백조라는 것만을 골라내서 정보를 모아야 하는 선택이 있어야 하며, 이 선택 뒤에는 백조는 하얗다. 혹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의 가설 중 어느 것이 맞는지를 알고자 하는 문제의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세상의 모든 동물들의 색깔을 모았다고 한들 백조의 색깔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에 대한 사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세상의 뼈대, 즉 사회 구조를 알려면 많은 정보들 속에 자신이 생각하는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대입시켜 확인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구조적 문제의식을 결여한 채 방법에 어울리는 질문만을 찾는 추상적 경험주의가, 어떤 구조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가치 있는 정보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 겁니다. 백조의 색깔을 알겠다는 의지가 없이 지금 당장 사냥이 가능한 동물들의 색깔만을 무조건 잡아서 쌓아나가는 사람이 먼 훗날 누군가가 백조의 색깔을 내가 얻은 정보로 알 수 있겠거니 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죠.

 

또한 이들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여기는 것이 정말로 확실한 것인지,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해서 얻어낼 수 있는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어 볼 수 있습니다. 사회학에 있어서 모든 이론은 본질적으로 특수 이론이며 지금, 이곳에 대한 이론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앞에서 언급했으니 뒤의 의문은 넘어가더라도,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실이란 단위가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또한 자신들의 연구대상을 정하는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이론에 근거한 어떤 가정 하에서 이를 진행하며, 그들이 연구대상에게 물어보는 질문은 매우 표준화되어 있어 그 질을 담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들이 여론조사란 이름으로 설문조사를 벌일 때, 여론이란 말을 쓰기 위해서 ‘공중’이란 말을 개념어로 사용하지만, 정말 공중이란 말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며 지금의 사람들을 공중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지, 공중의 범위를 어디까지이며 이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어왔고 과거의 공중이라 불리는 사람들과 지금은 어떻게 다른지 등등에 대한, ‘공중’이라고 일컬어지는 개념어 밑에 깔린 전제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는 않습니다. 자신들이 빌려다 쓰는 명제나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논리적 검토 없이 이를 통해 ‘측정 가능한’ 결과를 내는 데에만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를 통해서 자신들이 똑같은 자료 수집으로 비교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는 것들과의 비교연구, 즉 ‘상상력’을 요하는 비교 연구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연구 없이는 그 자료들을 가지고 근본적 사회구조에 대한 통찰을 얻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매해 투표 행위에 대한 여론조사가 실시되고,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정치 성향의 분포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그것이 정당한 여론인지, 지배 정당의 이데올로기 선전에 의한 결과인지, 역사적으로 어떤 방향을 향한 의의를 가진 투표였는지 등등을 알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나 추상적 경험주의는 마치 자신들이 표본 집단을 효과적으로 추출해냈으므로 이것은 여론이라고 믿는 경향. 그래서 이것은 반박할 수 없는 유일한 과학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 이 곳’에 집중하는 경험주의는 중요하죠. 그러나 이를 단서가 아닌 모든 것으로 보고, 구조적·근본적 문제의식 없이 방법론에만 치중에 무의미한 결과들을 내며 만족하는 추상화된 경험주의는 지양해야 한다고 Mills는 주장합니다.

  

4장과 5장은 묶어서 말하자면 이 같은 경향을 가진 사회과학이 실제로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기보단 기존 사회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장입니다. 각자 실용론의 여러 유형, 관료적 풍조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사회과학이 가진 장인으로서의 실용 대 관료로서의 실용에 대한 대비로 그 주제를 보면 될 것 같습니다.

 

Mills에 의하면 사회과학은 기본적으로 순수한 지적 유희와는 거리가 있는 학문입니다. 지금 이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있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문제라고 생각하여 정하는 연구 주제는 기본적으로 당신의 가치관에 관련지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나, 가치관을 위협한다고 느끼는 것들, 당신이 지지하는 ‘누군가’와 관련된 문제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면 당신이 지금 이 곳에서 정말 연구해야 하는 주제가 선거 제도에 대한 문제라 여긴다고 가정해봅시다. 선거 제도가 아무런 이상이 없고 당신의 가치관과 관련이 없는데 그것을 고등학교 상식 수준이 아닌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무언가 지금의 선거 제도가 당신의 이상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나 수단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당신의 가치관을 통한 판단에 근거할 때 어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비로소 당신은 선거 제도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또한 당신이 선거 제도에서 연구해야 하는 문제의 핵심은 그것이 얼마나 제대로 된 민의를 반영하는가 하는 것이라 여긴다고 가정해 볼 때, 당신은 이것이 반영되어야 하는데 제대로 자신들의 뜻을 반영 받지 못하는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에 대한 관심과 간접적인 지지에 의한 결과임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는 이 같은 연구주제가 나올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선거제도를 왜 연구 주제로 삼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이와 같은 자신의 가치와 사고의 과정이 명확하게 천명 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한 제대로 된 교류가 가능합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인가에 토론은, 그래서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보다 선행 되어야 하는(더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토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Mills에 의하면, 지금의 사회과학은 자신이 연구해야 하는 주제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정한 단 한 가지 방법으로 검증 가능한지 아닌지를 따지며, 이 때 그것을 활용하는 거대 조직에 의해(추상적 경험주의에 의한 통계는 다양한 수요조사로 잘 활용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용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없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말이죠.) 사회학은 새로운 실용론으로 접어들게 됩니다.(공중을 위한 문제 설정이 아닌) 기존 사회구조에서 지배 계층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관료적 기술로서의 실용이 되는 것이지요. Mills에게 있어 가치판단이 없는 사회학은 없었습니다. 스스로 가치 판단한 사회연구이냐, 남이 판단하고 대신 활용하는 사회연구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질문을 중심에 놓고 새로운 이론과 방법을 고심하는 창조적 장인에서 그 전의 안전한 방법만을 답습하는 관료로서 사회학의 성격이 변하는 상황. 무엇보다 학자를 내부에서도 학문적 탄탄함에 의한 경쟁이 아닌 자기 방어를 위해 생긴 파벌에 의한 무의미한 경쟁(학자들 사이의 위계와 명령체계가 생겨난다는 점에서 참으로 관료적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방법을 통해 현상을 ‘중립적’, ‘과학적’으로 ‘예측’하기 위해 마치 자연과학처럼 ‘변수를 통제‘하고 싶어 하는 고위급 관료 같은 생각. 이것이 Mills가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용어를 만들어가며 지키고 싶었던 오래된 미래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Mills는 장인적 기질을 강조합니다. 6장의 과학 철학에서 Mills는 방법론적 금기 같은 집착이 인문학에 과학의 지위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전 사회학의 고전적인 방법들을 한 가지의 통합된 방법으로 묶으려는 시도에서 나왔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집중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한 가지의 방법은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상상력을 오히려 억압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p.155의 본문을 한 번 보죠.

 

“‘방법’과 ‘이론’을 터득했다는 것은 자의식적인 사상가, 즉 자신이 연구하는 문제의 전제와 함축된 의미를 인식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방법’과 ‘이론’에 지배당하는 것은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알아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연구 방법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연구 결과의 근거는 박약해지며, 그 연구가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결단이 없으면 모든 방법은 무의미한 겉치레가 되어버린다. 고전적 사회 과학자에게는 방법도 이론도 자율적인 영역이 아니다. 방법은 어떤 범위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이며, 이론은 어떤 범위의 현상에 관한 이론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나라의 언어와 같은 것이다. 즉 여러분이 말을 할 줄 아는 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말을 못한다면 불편하고 창피한 일이다.”

 

이 정도로 문제의식 중심의 연구를 강조하고, 그 문제의식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천명할 것을 갖은 공격을 통해 강조했으면, 이제 저자 스스로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 자신의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할 것입니다. 7~10장을 통해서 Mills는 ‘나는 사회학이 무엇을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회학이 이런 질문을 함으로써 가져야 하는 가치관은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생각을 풀어놓습니다. 7장의 제목은 그래서 ‘인간의 다양성’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문학이 그렇지만 무엇보다 사회학은 인간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겠죠. Mills가 말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의 중요 요소 또한 사회 구조와 그것의 변동 속에서 달라질 인간 개인들에 대한 추측 아니었습니까? 어떤 식으로 추측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Mills는 역사적, 공간적인 다양한 비교 연구를 제시합니다. 역사 속에서의 각 개인 간, 소집단 간, 대집단과 소집단 등의 비교 등을 통해서 제대로 된 인식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여기에는 학문의 지나친 전문화를 의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사실 인간의 다양성이란 제목은 절대 주의를 경계하며 스스로에 대한 겸손을 주장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해선 최대한 모든 것을 고려할 것을 열정적으로 권하는 제목인 것입니다. 아마 마지막 문단의 인용이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겠군요.

 

“그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하나 이상의 여러 학문에서 자료와 개념과 바업을 취해야 한다. 사회과학자는 그의 문제를 명료히 하는 데 사용할 자료와 관점에 익숙해지기 위해 ‘그 분야에 통달할’ 필요는 없다. 학문의 전문화는 학문의 경계보다는 중요한 ‘문제’의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p.179)”

 

사실 이런 비교 연구, 그리고 진정한 비교를 위한 각 요소들이 형성된 다양한 맥락들의 깊은 이해를 위해서 역사적 자료를 빼놓을 수가 없겠죠. 8장 ‘역사의 효용’은 바로 이런 역사 의식에 대한 중요성의 강조입니다. Mills는 이 저서 곳곳에서 지겨울 정도로 역사가 사회연구에 있어서 가지는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는 역사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도 나오듯 역사는 “사회구조의 발전에서 그 시대의 중추적인 사건들을 파악할 수 있는 시야를 넓혀주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것은 한 사회의 구조적 본질은 흔히들 그것이 큰 폭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인식되며, 그 전에 비슷한 문제나 과정이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그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 시절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스스로 중세라고 불렀을까요? 산업 혁명이 일어나고, 근대라는 시대가 도래 하면서부터 그 전의 시대는 비로소 구조적으로 인식되고 이름이 붙여집니다. 여성의 노동 문제가 봉건제에서 다뤄지는 방식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다뤄지는 방식이 같을까요? 이런 것들에 대한 비교는 같으면 같은 대로, 다르면 다른 대로 왜?라는 질문을 안겨줍니다. 이런 역사적 변화의 과정에 대한 질문은 대개 구조적 변화에 대한 질문과 맞물리고, 구조에 대한 질문이 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의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그 전의 역사적 단계와 연결 지어 깊게 생각하게 만들고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두고 구조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에, 역사는 사회학과 떼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9장과 10장은 왜 사회학자는 자신이 지키고 싶은 가치를 가져야 하고 이를 밝혀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Mills는 자신의 주장대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밝힙니다. 이는 이성과 자유입니다. 9장 이성과 자유에 대하여는 Weber와 같은 문제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회가 합리화되어갈수록 개인이 이성을 발휘할 영역을 줄어들고, 이것이 개개인의 자유를 제약하는 요소가 됨으로써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있다는 것인데, 아주 짧게 자신의 문제의식을 요약한 부분이니 이 정도만 하고 넘어가면 될 것 같군요.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학자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실현시킬까 하는 것입니다. 10장 정치에 대하여는 바로 이에 대한 마음가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사회학자가 사회에 대하여 지니는 진정한 의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자연과학자는 사실 자신이 실험할 재료에 대한 의무가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회학자는 그래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죠. 왜냐하면 그 자신이 이미 자신이 연구하려는 대상과 동떨어질 수가 없는 대상이며, 오히려 스스로의 생활 그 자체가 연구의 1차 대상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 이상, 단순하고 완결된 법칙을 찾아내기보다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나한테도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이상 무엇을 위한 연구인가가 가장 1차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Mills는 사회학적 상상력은 사회학자는 당연히 가져야 할 능력이며, 이를 넘어서서 다양한 분야와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 상상하는 능력을 전파하는 것이 사회학자가 가진 지식인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사회학자가 자신의 정치적 역할을 개인의 문제를 공적인 역할로 연결시켜 행동할 수 있는 자기 해방적 인간을 길러내는 데에 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Marx의 말처럼 인간은 역사를 창조할 수 있지만 자신이 선택한 조건에서 역사를 창조할 수는 없기에, 사람들이 스스로가 역사적 행위자임을 자각하게 하고 이를 행하는 데에 있어 자신이 처한 조건이 어떠한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치는 선생이 진정으로 해야 할 것은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자신이 그 견해를 어떻게 만들어냈는지에 대한 절차를 가르쳐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곧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사회과학자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안들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사안을 결정할 권한을 커녕 무엇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분명한 자각을 심어주고 이를 획득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게 하는 중심에 사회과학자가 있어야 함을 Mills는 역설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뜨겁게 읽었던 부분이었습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공중이 되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자 스스로가 공중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 운동, 정당, 계층 및 계급과 그 사이의 이해관계들 속에서 자신이 대변하거나 반대하는 것들을 명확히 설정하며, 다른 사회과학자들과 그 타당성을 놓고 경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자가 정치인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규정인지를 연구를 통해 겨루며, 그 속에서 무엇을 지지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리고 직접 따르며, 이것을 함께할 수 있는 공중들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제의 무게가 설령 크다고 해도 그것이 이를 수행하지 않을 수 있는 변명거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피하지 않고 끝까지 안고 씨름하는 것이 1장에서 강조한 사회학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겠지요.

 

그리고 마침내 사회학적 상상력의 이 모든 이야기들은 부록의 장인기질론에서 단 한 가지의 말로 귀결됩니다. “두려움 없이 질문하라.” 학문의 정형화된 테두리에, 근거가 불확실한 정확성을 담보한다는 방법에, 스스로의 연구와 방법이 불확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절대적인 법칙을 발견하겠다는 오만으로 지금을 보지 못하는 거대 이론에 대한 신봉에서 벗어나, 처음 학문이 생겨났던 그 원초적 의미.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유일한 출발점으로 삼으며 이론과 방법은 이 호기심을 보조하는 역할 이상이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왜 이런 호기심을 가졌는지, 호기심에 대한 호기심을 두려움 없이 내보일 것. 생활에서, 정치에서, 책을 읽으면서, 어떤 개념에 대해 파고들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며 알고 싶은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연구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서 지치지 말 것. 이 책은 이처럼 생활과 학문이 처음의 그 자세를 가지며 결합될 것을 요구하는 책입니다.    

 

그 동안 사회과학을 공부한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을 때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너무 앙상하며 붕 떠있고, 현실 정치에서 모든 걸 아는 것 같은 시사 전문가들은 너무 지엽적이며 다른 대안이 아닌 최악만 아니면 된다는 식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회에 대한 비전이 있는 공부, 무엇을 알까가 아니라 알아서 어떻게 행동하면 어떤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진정성 있는 공부와 행동의 일치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Mills의 책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장인이란 말에서 드러나듯 어떤 학제나 어떤 단체에서 전적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활용하며 내가 스스로 나를 길러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요. 상상력, 감수성. 이런 말들이 굉장히 낭만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런 용어들은 사실 ‘훈련으로 동물 화된 통찰력과 판단력’을 의미합니다. 저 스스로가 그와 같은 통찰력을 가지기를, 그리고 동물화라는 말이 나타내듯 나 자신의 즉각적인 실천과 그 지침을 줄 수 있는 통찰력으로 완성해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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