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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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칸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고, 또한 끝이 난다. 정착하지 못 하고 떠도는 사람들. 

세상 모든 이야기가 고유의 명도와 채도를 가진다. '디어 라이프'는 뿌옇고 희미한 창으로 보이는, 캐나다의 한겨울을 통과하는 오래된 기차와 같은 분위기를 지녔다.

이 짧은 소설들의 모음은 창 밖으로 비치는 희미한 풍경을 말 없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열 네 편의 소설들이 서로 닮아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단지 한 작가에 의해 쓰여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인물들이 뭔가를 느끼고 상처받으며, 끝내는 결핍을 채우지 못하고 살아가는(혹은 죽어가는) 모습이 꼭 한 사람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혼자인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단편집에서 관계라는 것을 빼고는 어떤 누구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를 향해 있고, 그리고 그것은 결코 지리멸렬한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주 섬세하게 다른 얼굴로 바뀐다. 


관계는 위험하게 시작되고(일본에 가 닿기를), 때로는 허무하게 포기하게 되나 정말 변하는 것은 없고(아문센),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며(메이벌리를 떠나며), 한 번 새겨진 이상 여전히 붙들려 있게 되거나(자갈), 다신 보지 않겠다고 생각해도 사실 해 줄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으며(안식처), 

전혀 생각지 못한 와중에 어떤 완벽한 순간을 만나는 때가 오고(자존심), 믿고 싶어 하는 대로 믿게 하며(코리), 누군가는 너무나 강인하고 또 누군가는 나약하다.(기차) 또한 인생을 나누는 하나의 분기가 되고(호수가 보이는 풍경) 사랑와 미움, 존경과 화가 공존하고(돌리), 한 때는 너무나도 중요했으나 마치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되기도 하고(시선),그(녀)를 죽이고 싶어 잠에 들 수 없고(밤), 어떤 인상적인 장면으로, 환상으로 남기도 하고(목소리들), 오해하기도, 바로잡기도 해 보지만 결국 깨달아보면 모든 게, 모든 게 끝나버렸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결국은 용서하게 된다는 것을. 


관계에 대한 이 모든 단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것은 너무나 섬세해서 알아차리기 힘들 수 있다. 그들은 대개 말이 없기 때문이다. 빙빙 돌려 말하면서 꼭 해야 할 말은 하지 않는다. 섬세한, 그러나 조금은 유약해보이는 그들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입을 다물고 있다.


종양을 진단받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르는 여자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남자에게 처음으로 고백한다. 어느 잊을 수 없는 밤의 일을. 그녀의 아버지에게는 병든 아내가 있다. 딸이 목욕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는 단 한 마디의 '미안하구나.'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우리는 단지 그 눈빛과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만을 본다. 모든 것이 조용히 일어나는 폭발의 순간과도 같다.


침묵으로 모든 걸 알 수 있을 뿐이다. 혹은 그들이 가만히 정지해 있는 한 풍경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고자 했던 말을 알 수가 있다. 우리가 입 밖으로 내기는 어렵지만 관계에서,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말들이 그 때 조용히 무리지어 나온다. 오래 전 파혼한 남자와 우연히 만나 그래도 사랑에 관해서는 변하는 것이 없다고 깨닫는 순간, 갑작스런 창문 밖 스컹크 떼의 이동, 한 여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구원과도 같은 안도감을 느끼는 순간, 떠나온 연인의 부고를 신문지를 통해 알게 되는 때. 


그 갑작스런 우연의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파장은, 

세상에는 그런 법도 있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담담히 이야기한다.


사람은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다른 곳으로 떠나고, 우연히 만나고, 떠나고, 떠나고, 그리고 정말로 영영 떠나버린다. 이 단편들에서 우리가 본 장면은 다만 그들의 여행 중 한 순간에 다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앞으로는 아직도 너무나 많은 역들이 남았고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결코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어떤 역은 지나치고, 어떤 역에는 잠시 머물며, 아직도 종착역은 먼 듯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이 우리에게 잠깐 인사를 건넬 때, 아주 주의깊게 바라봐야만 한다. 그들이 하는 어떤 손짓이나 눈빛은 반드시 무언가 의미를 지니며 때로는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느릿한 여행을 할 것을 권한다. 결국 우리와 마주하는 이들 모두가 우리 자신 안에 들어 있으므로.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서. 인정하기 위해서. 


이렇게 풍경은 기억되고, 수많은 내가 약간의 소외을 덜어낸 채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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