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의 보이지 않는 위협 : 당신의 프라이버시는 죽었다
Lori Andrews 지음, 김승중 외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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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네티즌인 동시에 현실에 발을 딛은 인간이다.

또한 웹에서 자신이 생산해낸 것을 개인적인 자료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당장 구글이나 페이스북만 해도 광고 페이지에 당신이 한 번이라도 검색했던 물품을 광고하지 않나.

우리가 흔히 SNS라고 부르는 페이지는 이용자에게 사용 권한을 부여할 때 인터넷상 행위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데이터 패킷을 함께 심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일단 기록으로 남은 데이터는 SNS회사에서 생성한 패킷과 기타 봇이 긁어간다. 긁어간 데이터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 기록을 빼앗긴 당사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내가 원하는 공개 범위까지만 퍼질 거라고 믿고 있었던 기록은 순식간에 웹 여기저기로 퍼져나간다.

"당신이 키보드를 두드린 순간, 프라이버시는 사라진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서, 과연 우리는 오프라인 공간에서 받는 수준의 사생활 보호를 기대할 수 있는가.



박재범, 아이유, 방탄소년단이 한때 구설에 휘말린 원인이 뭐였던가.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소위 '네티즌 수사대'가 출동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웹에 해당 정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구글에 키워드를 치는 것만으로도 소위 '신상털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웹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사생활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책에서는 '개인적인'공간에 올린 자료(사진이나 글, 그림 등)가 엉뚱한 곳으로 퍼져 나가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본 사람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위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거론한 인물들이 '마녀사냥'당한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다. 또한 책에서 말하듯이 인터넷 공간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소수의 가까운 사람들만이 알았을 일들을 '본의 아니게' 불특정 다수에게 '들켜 버린'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다시 말해 자신의 사생활을 까발린 사람)을 효과적으로 처벌할 수 있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법관은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몸과 마음을 다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판결을 내린다. 저자는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보고, '소셜 네트워크 헌법'을 제정하자고 주장한다. 요컨대 내 정보를 내가 관리할 수 있게 실질적인 권한을 개인 사용자에게 돌려달라는 내용이다.

 

개인이 온라인 공간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랍의 봄'이나 '천안문 사태'에서 사실상 언론 통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스위치를 내린 기업이나 인터넷을 쓰지 못한 개인이나 손해를 보기는 마찬가지였고, 정부 당국만이 그를 통해 자위했다.(요즘 인터스텔라 때문에 유행하는"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라는 말은 저런 사태에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인터넷을 관리하는 회사가 무슨 짓을 했든, 결국 아랍인이나 중국인은 웹 접속 권한을 찾아왔다. 사실 이런 내용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을 수 있는 건 저자가 중국인이나 아랍인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점은, 저자가 주장하는 '소셜 네트워크 헌법'에 등장하는 여러 권리는 이미 국내의 정보통신법이나 개인정보 보호법 같은 실정법에서 보호하고 있는 권리라는 부분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버젓이 법이 있는데도 개인에게 실질적인 권한이 없기 때문에 권리 행사를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책에서 참 많이도 갖다 쓴 페이스북의 경우에 개인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몹시 수고로운 과정을 주기적으로 거쳐야 한다.  앓느니 죽는다고, 그러면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를 모두 끊고 살아갈 수 있을까?

결국 개인이 아니라 개인이 모인 단체로서 권리를 찾기 위해 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가장 무서운 것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심령이나 귀신 따위가 아니라 실존하는 사람, 그 중에서도 내게 실제로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다.

정보화 사회라는 말조차도 구식이 되어버린 지금, '내게 실제로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의 범위에는 폭력배 등 완력을 쓸 수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내 개인정보를 훔쳐가 여러 군데에 활용할 수 있는 모니터 너머의 미지의 인물도 들어왔다. 일찌기 조지 오웰이 보여준 1984 속의 바로 그 세계가 인터넷이 발달함에 따라 실제로 구현된 탓이리라. 홍보며 마케팅은 점점 진화하여 미래에 수요자가 될 법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웹 기록을 읽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러한 산업은 꽤 큰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그리하여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무분별한 웹 기록 수집과 개인정보 유출을 커다란 위협으로 알고 살아간다. 아니, 적어도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는 있어야 한다. 내 손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지금 가지고 있는 무엇인들 무사히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책에서 요구하는 소셜 네트워크 헌법에 관해서 응집하지 않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시피하다. 사업자와 싸워서 얻어내야 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나의 가장 중요한 정보가 인터넷 공간을 떠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누군가 만들어낸 우스갯소리처럼 '나도 못 한 세계 여행을 내 주민번호는 벌써 여러 번 다녀왔더라'는 사태만큼은 좀 줄여야 하지 않겠는가.


페이스북을 쓴다면 페이스북을, 트위터를 쓴다면 트위터를, 네이버를 쓴다면 네이버를 돌아보자. 나의 허가가 없이 내 정보(키보드나 마우스로 만들어낸 일련의 데이터 모두를 포함한다)가 떠돌아다닐 수 없도록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가장 엄중한 보안 장치를 채워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제발 좀 마녀사냥할 때만 말고 개인정보 유출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도 뭉쳐서 전투력 좀 보여 보자. 네티즌 수사대의 가공할 수사력을 남의 사생활 따위가 아니라 당장 내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사용해 보는 건 어떨는지.

혹시 또 아는가, 사시사철 푸른 개구리가 뛰어노는 서울 중심부에서 어린 백성을 어엿비 녀기시어 관련 법안 좀 업데이트해 보라고 옥관자 단 분들을 닦달 좀 해주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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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싶은 주제긴 한데 시작시간이 너무 늦어요 ㅠㅠ 이런식으로 놓친 강좌가 벌써 몇갠지, 안타깝네요..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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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구미가 당기는 내용인데 지방인에겐 일정이 너무나 불친절하네요 ㅠㅠㅠㅠㅠㅠㅠ 왜 맨날 평일에만 하시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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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MD 바갈라딘 2013-05-23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알라딘 인문MD 박태근입니다.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일전에 대전-광주-부산-대구를 잇는 강좌를 한 차례 진행했는데, 이후에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말 강좌 또는 지역 강좌 등 확장해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정의 안쪽 - 영화로 읽는 우리 마음의 작동 원리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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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안쪽, 심리학자의 눈으로 영화 프레임을 재단하다!


네이버 카페 '닥터프로스트 공식 팬 카페'에 서평 이벤트로 올라온 이 책. 

사실 처음에는 그저 고만고만한 책이겠거니, 하고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인들이며 카페 회원들이  이 책을 갖고 싶어서 그렇게들 난리를 치는 것을 보고 카페에 있는 이벤트 소개 페이지를 읽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심리학자의 눈으로 영화를 분석한다? 호오, 재미나는데? 어디 한번 읽어 볼까? 싶었고, 그렇게 응모해서 며칠 뒤에 당첨자 발표에 내 아이디가 있는 것이 무척 기뻤다.


고대하던 책인지라 8월 3일에 어머니를 통해 책을 받자마자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볍게 한 번, 다음부터는 서평을 쓸 목적으로 진지하게 한 번.


그렇게 이 책을 몇 번을 탐독을 했던지, 웬만해서 책에 읽은 티를 내지 않는 버릇을 가졌다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책갈피를 끼웠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버렸다.


자, 그럼, 오랜만에 책벌레의 구미를 당기게 한 책을 당신들도 한번 맛 좀 보시라.




이퀄리브리엄-모든 감정을 말살하라! 내 것만 빼고.

감정이 없는 사회, 더 좁게는 감정이 없는 자신을 상상해 본 일이 있는가. 이렇게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 감정이라면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만약 누군가 그 귀찮은 녀석을 제거하고, 다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관리까지 해 준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영화는, 감정을 금기로 지정한 독재자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 독재자는 '감정' 전부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전체주의에 필요없는 감정-중에서도 타인의 것-만을 부정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인간이 온전히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감정이 필요함을 증명해 냈다. 이자가 한 짓이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것과 같은 류의 모순이라고 느낀 것은 속단일까. 애초에 타인의 감정을 통제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독재자는 감정이 없는 '청정 지구'를 리브리아로 명명하고 그곳이 파라다이스 내지는 유토피아인 것처럼 득의양양하게 선전을 했지만, 사실상 그곳은 '느낄 자유'를 박탈당해 아무렇지 않게 범죄가 판을 치는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그런 곳은 그저 사이코패스 수용소 역할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여담:영화에 나오는 그라마톤 클레릭은 어쩐지 레이 브레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도'에 나오는 소방수와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어째서 이제서야 이 영화를 떠올릴 때 '좋은 밤 되세요'라는 단편영화마저 생각난다는 말인가!]






인셉션-그대,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가?

긍정적인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긍정적인 감정으로써 타인의 무의식을 지배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의식은 깨어 있는 동안이요 무의식은 잠을 깊이 든 동안이라고 한정짓고 나눈다면 무의식을 지배하려는 자는 당연히 꿈을 이용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의식의 세계와 무의식의 세계를   무자비할 정도로 섞어 버린다면 효과는 배가 된다.
이를테면 저 먼 옛적에 장주가 이야기했던 이런 현상이다.
<주의:플레이 버튼을 눌러야 최초 재생되나, 이후 자동 반복재생. 익스플로러 최신판에서 재생하길 권장.>
흑집사 1-20화 초반 라우의 대사(CV:전광주)

저자는 영화에서 나왔듯 타인의 생각을 조종(혹은 조정)하는 것이 현재로선 불가능하다고 못을 박았으나, 나는 영화에 나온 추출사는 어쩌면 수많은 개인이 무심코 마주치는 우리네 필부필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 대 개인이라면 좀더 많은 공력이 필요할지 혹시 모르지만, 개인 대 사회라면 추출사보다 더 은밀히 상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생각의 씨앗을 심'는 일은 사실 의도했을 때 어려운 거지 알게 모르게 우리가 서로에게 일상적으로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리하여 나 자신과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지금 하는 생각, 온전히 당신 것 맞습니까?"
 






메멘토-과거의 꿈들을 찾아 복수의 날갤 달아, 오늘의 힘들었던 일은 잊어버리고!


기억은 조작되는가!
기억이 기록을 뒤엎고, 기록으로써 기억을 조작한다!
사람인지라 겪은 그대로를 기억하거나 기록할 순 없다.특히 마음을 다친 상태에서 기억 기능에까지 문제가 생겼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개인은 무엇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김보람 작가의'미래도둑'과도 어딘가 잇닿아 있다.





미녀는 괴로워-'박씨전',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된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격렬한 풍자.

자, 여러분. 중학교 또는 고등학교 교과서의 어드메에서, 혹은 입시용 문제집 한켠에서 '병자호란의 설욕' 운운하며 한자리 단단히 꿰차고 있던 작품을 기억하시는가. 바로 그 박씨전을 영웅서사의 입장 말고 다른 시각으로 뜯어본 적은 있으시고? 박씨전의 경우 영웅서사에서 흔히 사용되는 장치 중 초기의 시련에 해당하는 부분이 '용모'였다는 점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비합리적일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쓰는 대중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속 강한나는 거의 박씨부인의 환생이다. 초기 시련에서부터 심지어 외모를 바꾸고 세간의 인정을 받는 과정까지도!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게 있다. '예쁘다'는 '착하다'와 동의어일 수 있는가. 성별이 어떻든 감히 사람을 겉모양'만'으로 재단하는 건 옳은 일인가. 강한나가 끌어안고 있던 건 외모지상주의가 낳은 컴플렉스였지만, 그는 제니가 되어 겉모습을 완전히 바꾼 후에도 끝끝내 컴플렉스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끌어안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확실히 외모가 문제였겠지만, 이제는 외모가 문제라고 여기는 시선이 만들어낸 무수한 상처야말로 진짜 문제가 된 것이다.그 뿌리깊은 자기혐오를 끌어안고 산 건, 어쩌면 강한나나 제니의 탓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엑스페리먼트-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그 위험한 심리게임

방조하거나, 동조하거나-집단의 논리를 교묘히 이용하다

학창 시절, 단체로 추궁이나 기합을 받은 일이 있는가. 전혀 단체행동을 할 만한 일이 아님에도 누군가가 무리를 선동해서 다같이 행동한 적은?
그러한 선동이 성립하려면, 사람들이 모인 무리가 군집이 아니라 집단이어야 한다. 끈끈한 동지의식이나 강력한 리더십 없이는 단체행동은 요원하지 않던가. 그리고 한 사람의 행동을 그가 속한 집단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릴 때, 이 웃기지도 않는 상황은 급기야 현실이 된다!
"이게 다 우리를 위해서야, 감히 우리를 도발한 저들을 놓아 둘 수는 없어, 그러니 저것들을 당장!!!!!!"
어디서 많이 봐온 이야기 아닌가. 개인적인 감상으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소름마저 돋았다. 집단의식을 이런 식으로 폭력적으로 내면화해 내는 사람들이 도처에 아무렇지 않게 활보하고 다니는 세상은 도대체 어느 만큼 썩어 있는 것일까 하고.







박하사탕-자기처벌, 자기학대의 말로는 무엇인가.자신을 용서하는 법

한번 더러워진 몸이나 영혼은 이후 수십, 수천 번도 더 더러워져도 된다는 인식이 있다. 성적인 의미로 자주 쓰곤 하는 이 말을 우리네 필부에게로 옮겨서 적용해 보면 어떨까. 영화 속 김영호가 바로 그런 부류다. 순수하여 혹여 순진하지나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던 청년은 무엇 때문에 소위 '인생의 패배자'가 되어 갔는가. 뭐, 누구와 시합을 한 것도 아닐진대 인생이 더럽게도 꼬이는 것을 졌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지만 관용적인 표현인 모양이니 넘어가자.
김영호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실타래가 엉키기 시작한 지점이 보인다. 이자는 그 실타래를 끊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풀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흘러흘러가다 보니 처음 마음가짐과는 영 딴판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그에게야말로, 심리적인 치료든 정신적인 치료든 어떤 조치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실세계에 제 2, 제 3, 그리고 차마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김영호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영화는 차라리 저주에 가깝다.





대부-양가감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가치 충돌의 메커니즘.

'Romeo et Juliette'라는 뮤지컬에서 "증오는 사랑의 자매이지만, 우리는 그걸 감추려 든다"는 구절이 나온다. 불어에서 증오(la haine)와 사랑(amour)이 과거 둘 다 여성명사였기에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현대 불어에서는 사랑은 남성명사다), 감정의 방향이 다를 뿐 증오와 사랑 둘 다 증상은 거의 비슷함을 떠올려 보면 아주 틀린 비유는 아닐 것이다.  그 말인즉, 어쩌면 증오와 애정은 동전의 양면에 해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인간에게 애정-증오(애증)는 흔한 양가감정으로 볼 수 있으리라. 대부는 이러한 양가감정을 교묘하게 부자지간으로 끌고 온다. 굳이 저자가 주장하지 않더라도,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하는 부모 때문에 마음을 다친 이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를 끔찍이 싫어하는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필부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하나의 공식처럼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 속 막내아들은 과연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을는지는 저자뿐 아니라 내게도 의문이다. 뭐, 괜한 오지랖이니 집어치워도 별 문제는 없을 테지만. 







러브레터-떠나간 자에 대한 애도와 억압의 기억

저 왜국에서 히트를 쳐서 한국에 무려 우동 광고(.......)장면에 쓰였던 그 설원에 붉은 니트 티를 입은 여인을 기억하시는지. 바로 러브레터의 말미 중 한 장면이다.(아니 어째 그 짠한 장면을 광고에 쓸 생각을 다 했대......) 그 풋풋하고 답답하기까지 한 싱그러운 사랑이야기, 얼마든지 좋다. 다만, 저자는 이 여인이 왜 낯선 편지를 받고 나서야 그 소중한 기억을 억압에서 풀어줄 수 있었는지를 추적해 간다.(사실상 이 여인은 기억을 풀어내는 것으로 벅차 다음 행동은 썸남에게 모두 맡겨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넘어가자)

저자는 여기서 적절한 인출단서가 있음에도 출력해내지 못하는 기억은 억압되었다고 보고 있다.(물론 반대급부로 적절한 인출단서가 있으면 언제든 끄집어낼 수 있는 기억은 그저 잠시 잊어버린 것뿐이다) 이 여인은 뒤늦게 은사로부터 부고를 듣고 나서야 억압된 기억을 하나하나 풀어헤치는 의식을 시작한다. 과연 그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서 이 여인이 행복해졌을지, 아니면 적어도 후련해졌을지 그것까지 섣불리 짐작할 순 없으나, 적어도 해방된 기억으로 더 고통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좋게 생각해 버렸다.
여하튼, 이러한 기억 억압은 같은 국가의 미디어작품인 "서양 골동 양과자점"에서도 일부 보인다.(등장인물 중 타치바나는 오노에게 못되게 군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에 대한 기억을 억압해버린다. 하여 오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시간 잉여로울 때 슬쩍 찾.........아보는 건 아마 호불호가 갈릴 테니 섣불리 추천하진 못하겠구먼. 쩝.

아, 그리고 도서카드 장면에서 오버랩된 작품이 있었다. 이 영화와 같은 해에 개봉한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작품인데, "뭐야 이거!표절이냣!"싶을 정도로 도서카드 부분이 닮아있다. 다만 이 영화처럼 등장인물 둘의 이름이 같지는 않기 때문에 이름만으로 이중적인 의미를 주지는 못한다.
(사족:소재로 쓰인 도서카드는 1995년 당시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카드형 목록에서 기계가독형 목록으로 시스템을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던 시기였기에 후지이 이츠키의 억압된 기억을 인출하는 단서로 쓰였다. 요즘 같으면 프라이버시 보호니 뭐니 해서 본인이 아닌 이에게는 콘텐츠 대출 및 이용목록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사서와 도서관 직원의 의무처럼 되어 있기에 이런 일이 도서관에서 벌어졌다간 얌전히 넘어가진 못했을 것.)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만 더. 영화의 제목인 '러브레터'는 편지로 이어진 두 여인이 주고받은 서신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고 세상을 등진 남자가 어린 시절에 남겨놓은 도서카드 뒷면의 그림을 뜻한다고 볼 수도 있겠더라. 






도가니-세상은 요지경

먼저, 이 곡을 듣고 시작하자:정유진-모습 

사람은 어떻게 인간으로 기능하게 되며,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인간군상의 폐습에 묻힐 것인가를 결정하는 기제는 무엇인가.  
부끄럽지만, 이 책의 목차에서 제시한 영화 제목 중 내가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제대로 본 영화는 이것 하나밖에 없더라. 게다가 차마 심리적으로 깊이 파고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영화에서 그려낸 현실에 분노하기 바빴던지라 목차에서 이 제목을 찾고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저자는 양심까지도 감정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이 양심인 줄로만 알았지, 이것이 감정의 영역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못했기에 그런 의미로도 놀랐다.
여튼, 힘 있는 자라기보다 고만고만한 소시민인 강인호가 어렵사리 자신의 편을 규합해 힘겹게 양심을 지키는 것을 보며 영화관에서도 답답하고 화가 나서 몇 번이고 눈물을 삼킨 기억이 이제야 새록새록 난다. 답답하다고 뭔가를 할 수도 없는 입장이기에 그랬을 것이다.(같이 간 사람은 내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음료 컵을 일그러뜨리는 장면을 바로 곁에서 보고 경악을 하더라만도...)
저자도 언급을 했듯,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우리가 싸워야 하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요."
과연, 이런 식으로라도 저항해 간다면 언젠가 세상은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뀔까? 정말로?





매트릭스-어느 쪽이 진실이고 어느 쪽이 거짓인가

온라인이라는 개념이 일반화되기 시작할 즈음, 어떤 이가 소위 넷카마질을 하면서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었다가 어느 여성의 신고로 인해 체포될 위기까지 간 사건이 있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지을 것인가 같은 것으로 볼 것인가를 고민하게 해 준 사건이라고 하겠다.(당시의 자세한 사정은 뉴스를 뒤져 보기로 하자.)

그리고, 이제 와서 많은 이들이 추억하는 1990년대에는 급기야 본격적으로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를 구분지어 생각하는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짧은 견문으로는 그 시작 즈음에 있었던 작품이 '디지몬 어드벤처'시리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선 거기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시공간 개념이 다르다는 설정을 이용해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아이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장면을 집어넣음으로써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했다. 처음에는 적응하기 바빴던 아이들이 점차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쾌활하게 생활하는 장면은 그대로 우리네 네티즌-일반시민 개인의 생활상과 겹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일까. 매트릭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혹자는 주인공이 거의 눕다시피 허리를 꺾어 총알을 피하는 장면만을 떠올릴는지 혹시 모르겠지만, 의외로 이 작품은 현실과 가상을 적절히 뒤섞어 준엄함 경고까지도 주고 있다. 가상에 있더라도 자기가 현실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가상에 있다고 정확히 인식하는 것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은 물론이요, 자기가 처한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오는 2차 충격에 대한 묘사도 놀랄 만큼 섬세하다. 즉, 초기의 인지 부조화뿐 아니라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적인 상황이 있을 때 어떤 마음인지를 세심하게 짚어준다. 어쩌면 온-오프라인의 차이뿐 아니라 일상의 다른 상황에서도 이러한 심리기제를 이해하면 지내는 것이 수월하겠다 싶을 정도다.





추격자-감정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

누군가에게는 사건, 누군가에게는 놀이.

몇 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유영철 연쇄 살인사건을 기억하시는가. 지난날 신창원 씨가 탈옥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싶은 난리에 야단법석이 났었고 무엇보다 그가 아무 죄책감 없이 스물이 넘는 사람을 잔인하게 죽였다는 데에 누구 할 것 없이 분노와 공포를 느꼈던 나날들. 점차 사회, 아니 좁게는 언론들이 그 사건일지를 전하면서 신나게 파헤친 분야가 있다.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 논의는 급기야 그런 자들은 선천적으로 뇌의 특정부위가 잘못되어서 그런 짓을 저지른다는 데에 이르렀고 자칫하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그런 자들을 골라 솎아냄으로써 범죄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결론에 다다를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광기에서 지난날 유태인이나 한반도 주민들이 겪었던 극심한 인종차별의 얼굴을 새삼 확인했다.(유전자나 병력으로 범죄자를 선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얼마 전에 미디어믹스된 "비밀 ~TOP Secret~ The Revelation" TV 애니메이션판의 말미 부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자, 그러면 이토록 세상이 경악해 마지않은 그들, 사이코패스란 어떤 자들인가. 책에 언급된 자들과 정도는 많이 다르지만, 적어도 이 카페 회원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그이, 백 모 씨의 아들 모 프로스트 씨를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물론 프로스트 교수의 경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해 일부 감정만이 손상된 상태이고 연쇄 살인범이 될 만한 위인도 아니다.  허나, "두 사람의 개기일식" 마지막 화 76번째 컷에서부터 81번째 컷까지(천교수와 백교수의 대화 내용)를 쭉 읽어보면, 감정 능력이 결손된 인물의 심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추격자에 나온 지영민이나, 현실 속의 유영철, 닥터 프로스트의 프로스트 교수는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정말로 '더 큰 자극'을 좇아 행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미에, 닥터 프로스트 OST 하얀방의 가사 일부를 옮긴다.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다치기 쉬운 마음이라는 걸 몰랐네. 두려워하지는 않아도 돼. 내가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헬프-인간의 패륜과 패악, 그 기저에 무엇이 있는가.

다수의 생각, 그 무자비한 폭력에 대하여

어머니를 배신한 자식이 평생 짊어져야 하는 숙제-죄의식.
꼭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부유한 가정에서 주인집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친부모가 아니라 고용인인 경우가 많은 것을 익히 보아 왔을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친부모보다 고용인과 가까워야 할 터임에도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한 것은 왜일까. 왜 아이들은 "기껏 키워 놨더니 크면 제 에미와 판박이"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저자는 그 연유를 죄의식에서 찾는다. 헬프의 경우 강자와 약자를 피부색으로 나누었고, 딱히 오덕이 아니라도 익히들 아는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언급된 자르제 가를 비롯한 당시 귀족 가문들은 신분으로 강자와 약자를 나누었다. 하여, 사소한 내용은 어긋날 수 있지만 그 기저에 깔린 죄의식은 유사해 보인다. 가장 쉽게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준장의 행실이다. 평소 앙드레 그랑디에를 친동기간 이상으로 아끼는 듯했던 그는 어느 순간 앙드레가 귀족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소한 언행을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서 평민 주제에 감히 귀족에게 대든다고 펄펄 뛴다. 즉, 공고한 계급차를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사회의 인식이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이 있은 뒤에 오스칼은 영화 속 스키터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지 않던가. 오스칼의 경우는 그 죄책감을 풀어 버렸기 때문에 다시 앙드레와 막역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스키터의 어머니는 그럴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인종 차별주의자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지은 자 특유의 공포감'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죄의식에서 비롯된 더 큰 죄과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떤 영상작품에서,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된 계단을 끝없이 올라가다 지친 어떤 이가 띠 중앙의 공간으로 뛰어내림으로써 그 계단에서 벗어나는 양을 본 적이 있다. 진정으로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 안에서 빙글빙글 소득 없이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시스템에서 나온 뒤에 그걸 파괴하는 방법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뫼비우스의 띠를 죄의식으로 바꾸어 읽어도 무리는 없을 게다.






뷰티풀 마인드-망상은 어떻게 사람을 망가뜨리는가.




한 분야에 특출난 천재. 어느 순간부터 이 동네는 그들을 신지식인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뭐, 이건 90년대에 살아 있었던 자들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니 건너뛰고, 그 신지식인, 아니면 정말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이 정작 자신의 분야 하나 말고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좁은 필자의 경험상, 이런 이들은 '그래, 넌 그걸 잘하니까 이해해 줄게' 하고 그 점을 고칠 기회조차 박탈당해 버린다. 그리하여 감성의 어딘가가 부족한, 심하게 말하면 '괴물'이 되어 버리든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 혹은 죄책감 같은 근본적인 감정을 충족해 줄 무언가를 자신만의 세계에서 구축하기 시작한다. 뷰티풀 마인드의 경우에는 기숙사 동료였고, 구름의 노래의 경우에는 아버지였다. 혹자는 그들을 환상에서 끌어내면 된다고 하지만, 구름의 노래나 뷰티풀 마인드 두 경우 모두 환상을 끝낸 건 당사자의 의지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으로 역할을 다하는 모양새였다. 이 카페가 닥터 프로스트 팬 카페인 것을 감안해 닥터 프로스트의 에피소드로 이야기하자면, 용강대로 진학해 왔던 안나가 앓았던 망상장애를 고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안나의 망상을 건드리지 않고 그 망상에 스스로 균열을 만들도록 돕는 일이었지 않던가.





파이트 클럽-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이 영화의 주인공은, 어딘가에 중독되어 현실을 도피하지 않으면 삶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망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급기야 자기 안에서 다른 인격을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여기까지 읽고서 (누가 덕후 아니랄까봐) 생각나는 작품이 있었는데, 혹자는 격투 만화의 한 획을 그었다고 평하기도 하는 "유유백서"이다. 작품 중후반부에 나온 최종보스격 인물 중에 '센스이'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에 대한 설명은 이 영상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이들의 분노가 기존 사회의 프레임 안에서는 불법일 수밖에 없기에 그 점이 안타깝다. 저자의 말마따나, 차라리 용기나 정의감이라도 있었다면 좀더 올바른(적어도 사회에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그네들의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들이 분노한 영화 속 현실에 나타난 문제는 어쩌면 그대로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마냥 비난할 수도 없음 또한 안타깝다.






해운대-공황 사태를 겪어 보면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가 보인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 '쓰나미'라는 엄청난 지진해일이 덮쳐왔던 것을 기억하시는가. 그때 신문으로든 방송으로든 혹은 뉴미디어로든 웬만한 사람들이라면 새삼 지구과학 공부를 신나게들 해 보았을 것이다. 한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지진해일은 자연현상이므로 어떤 조건일 때 지진해일이 나는지를 안다면 그걸 예측할 수 있어야 하는데, 기껏 예측해온 결과를 (나중에 후회할 건 미뤄두고) 왜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일까. 주술이 대세인 시대라면 또 모르되, 빛나는 과학을 성전처럼 떠받들며 뫼시는 이러한 시대에?
저자는 그 답을 동기와 속마음에서 찾았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의 평정을 찾았을 때에야 비로소 눈앞의 자연현상에 대처할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사고 처리에 개인적인 원한관계와 자신의 처신 문제가 걸려있어서는 그 사고를 도구로만 보지 자체로 중요하게 보진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또한, 쓰나미 같은 대 공황 사태에서는 평소에 숨겨 왔던 개개인의 깊숙한 마음까지도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공황이 공황이 아닌 끈끈한 집단은 예외지만.(앞의 문장에서 어느 드라마의 어떠한 OST가 생각나는 것은 일단 저리 치워두기로 하자.)
다만, 저자의 관점에서 하나 걱정되는 것이 있다.
과연 공황을 대비한답시고 집단을 멋대로 통제하려 드는 것은 옳을까. 저자는 군대나 1차집단처럼 뭔가로 끈끈하게 묶여 있는 집단일수록 공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사는 곳은 군집이 아니라 집단이어야 옳은가. 이 생각은 자칫 잘못했다가는 전체주의로 흘러 버릴 수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럽다. 하여 공황과 군대 운운한 대목에서 난 잠시 숨을 멈췄다. 나만 이 저자를 위험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나야말로 위험한 사상에 물든 것일까.





파수꾼- 나 다시 그대 곁에 있고 싶어 

이 영화를 단지 청소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 영화로 간주할 수 있을까. 이들은 굉장히 치사하고 복잡한 인간관계의 영역을 건드리며 죽어간다. 누군가는 육체를 버렸고, 누군가는 마음을 죽였으며,  누군가는 그들을 방관했다.
영화는 이 질문을 집요하게 던진다. "꼬여 버린 실타래는 풀어야 할까, 잘라야 할까."
영화적인 재미를 위해서라면, 혹은 실생활의 지혜 측면이라면 당신은 어떤 답을 내겠는가.
등장인물들이 조금만 더 솔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과연 누가 그들에게 직접 "솔직했어야지!"하고 단정적으로 고함칠 수 있는가. 영화의 프레임 밖으로 나오면 그보다 더 심하게 꼬인 관계도 얼마든지 있는 것을!
꼬여서 엉켜 버린 실타래를 어찌할 것인가 하는 건 심리질환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인간관계에서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족:오해는 제발 좀 그 자리에서 다 풀고 털자 쫌! 아 입은 뒀다 뭐할래!
이게 뭐야 증말.....
이 영화의 교훈:현실의 츤데레는 피곤하다. 물론 얀데레도 더할 나위 없이 피곤하다.






굿 윌 헌팅-감히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리라!내가 그대들과 아무 관계도 아닌 이상……

따뜻하고 안전한 이상적인 거리는 제발 평화적인 방법으로 찾자.

거절에 대한 공포를 아시는가. 과거의 어떤 상처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거나 거절당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여 아예 대인기피증까지 진도를 나가 버린 경우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로 내가 예전에 그런 상태였기에 주인공의 처지에 깊숙이 공감한다. 물론, 지금은 좋은 사람을 만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으니 난 주인공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찾았다고 자부한다. 여튼 흰소리 그만하고, 이 영화나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드라마 속 대사가 있기에 소개하고 마치려 한다.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때론 강한 척하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마음 속에 벽돌을 쌓고 사는 건  아닐까?
 나이가 먹을수록 그 한 장 한 장이 더 견고해져서,이제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렵게 되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어렵게 되고...
 그러다 결국 자기만의 벽돌 속에 마음을 가둬 둔 채,점점 더 외로워져 가는 건 아닐까?
 과연 외로움은……상처보다 견디기 쉬운 것일까?」
 -KBS 수목드라마 달자의 봄 9화 중 달자의 나레이션-

「어차피 인생은 혼자라는 걸 안다.삶의 무게도,삶의 책임도 다 각자의 몫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기억해 주길 바란다.
당신 곁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손을 내밀어 우리를 찾는 건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있다는 걸 기억해 줘서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KBS 수목드라마 달자의 봄10화 중 달자의 나레이션-







해피엔드-그래서, 그런 일이 있은 이후로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우리 사회, IMF 세대와 그 자손들을 위한 오마주. 어째서 대한민국 남성들은 재화를 자신의 자존감과 비슷한 위치에 올려놓게 되었는가.


1997년, '한국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땄다'는 비난을 들었던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불황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심을 퍼뜨렸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사건, IMF 사태다. 이제는 마음아프게도 너무나 식상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수많은 실업자가 거리를 배회했고 그들 중 특히 남성들은 수입과 함께 자존감까지 잃은 경우가 많았다. 각 가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소위 '삼식이'가 되어 괴팍한 객식구로 취급받는 중장년 남성들은 그리 특별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런 처지로 몰리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저자 또한 사회의 인식에서 그 1차적인 책임을 찾는다. 물질만능주의, 금전만능주의. 어느 샌가 우리 대부분은 거기에 물들어 버렸고, 그 결과로 돈을 벌 능력이 없는 자들을 잉여 취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잉여 취급을 받은 이들은 자존감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고 자기혐오에 빠져 더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하는 능력에 비해 감정 소통과 대인관계에 대한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돈을 벌 수 있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 인식도 이런 증상에 크게 한몫을 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주인공 남성은 자존감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내가 겨우 내민 화해의 손길에조차 그런 식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주인공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도 이 땅에 살고 있다면 누구나  주인공과 비슷한 컴플렉스를 안고 있을 것이기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다. 






아바타-정말로, 「꿈★은 이루어진」걸까?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화면기술이 진일보했으며 꿈과 환상을 보여 주는 굉장한 영화가 있다고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 영화 '아바타'다.
현실에서 결핍된 것을 채워주는 마력! 그것이 우리가 판타지 영화에 가장 간절히 바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단순히 꿈의 세계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그 세계에 현실감을 부여했다. 무엇이든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간인가!
또한,  그 세계는 권선징악이 가능한 곳이다. 게다가 SF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감을 탓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영화는 가장 통쾌한 방식으로 주인공과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러한 소망 충족은 꿈이 아니면 온전히 바랄 수 없는 것 아니던가!

피그말리온은 스스로 살아있는 갈라테이아가 될지니. 그대여,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지 말지어다.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상식과 정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을 보며 또다시 좌절하게 되리니.






완득이-어른들이 꿈꾸는 '때묻지 않은, 교화 가능한 아이'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아이'. 어떤 아이일까? 사람마다 여러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저자나 동주 선생은 완득이처럼 주변의 겉보기 환경은 참혹하리만큼 처참해도 따뜻하고 올곧은 어른들과 함께 지내서 심성만은 곧고 바른 아이, 완득이 같은 부류를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아픔이 좀 있으면 어떠랴, 올곧은 아버지의 사랑을 담뿍 먹고 자라 비뚤어질래야 비뚤어질 수 없는 아이인 것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이번에는 이 아이의 행복감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캐고 싶어졌는가 보다. 아이의 일상생활을 낱낱이 캐기 시작한다. 옳거니, 이거다. 어른들이 츤데레다.(어이...) 일단 아버지는 평소에 겉으로는 엄한데 술이 들어가서 정신이 알딸딸해지면 그때부터는 가감없이 아들바보의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의 동주 선생은 완득이가 겉으로 보기에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들을 하는데, 완득이의 자존감을 세워 주기 위한 행동들이 많다.

아니 저기 여러분? 좀 겉으로도 잘들 좀 하지?왜 되도 않는 츤데레질이야..-ㅅ-

여튼, 이런 심리적 환경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완득이가 다른 사회적 관계에서도 원만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식인데, 저자는 이를 '전이'라고 진단한다. 뭐 병이 아니니 진단이라긴 좀 그렇지만,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으니 넘어가도록 하자.[뭐래니]

아, 그리고 사족 하나. 완득이의 어머니가 필리핀 사람이라 눈총을 좀 받았다는 대목에서, '별별 이야기 2 여섯 빛깔 무지개'의 한 꼭지로 나왔던 '샤방샤방 샤랄라'가 생각났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어쨌든 둘 다 사람 관계로 힘들어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위해 당당해지는 이야기여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자, 본문에 대한 설명 내지 감상은 이것으로 끝이다. 정말 오랜만에 몇 번이고 반복해 읽고 싶은 책을 손에 넣었다. 그러므로, 갈매나무 출판사 여러분과 닥터 프로스트 팬카페 운영진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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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메군의 일드견문록
이지성 글.사진 / 이비락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9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소포 꾸러미 하나가 식탁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게 뭘까, 하면서 뜯어 보니, 서평쓰기 대상 도서 '노다메군의 일드견문록'이 도착한 거였습니다.

약간 밝은 황토색 종이에 싸여 있었고, 책정보에서 보시다시피 표지도 여행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 책은 마치 여행 중에 누군가가 보내온 엽서나 편지 같아 보였습니다.

 

목차를 넘겨 보니, 아!이거 내가 본거구나! 하고 무릎을 친 작품은 거의 애니메이션에 국한되더군요. 이다음에는 여기 있는 작품들을 다 접해 보고 나서 그 여운이 가시기 전에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도쿄의 구석구석에 있는 각종 미디어작품 촬영지를 꼼꼼이 돌아보고 나서, 요코하마, 치바, 기마쿠라, 에노시마, 시즈오카현, 간사이, 홋카이도, 야마가타현, 도치기현으로 이어지는 서술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활자를 읽고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은 거의 문어체로 쓰여 있음에도 마치 잘 아는 사람과 직접 만나 그에게 여행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저는 이 책을 꽤나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테마의 기반이 된 작품들을 거의 접하지 않은 때문일까요, '첫장부터 드라마 영화 네타냐!'라고 약간 언짢게 생각한 것도 잠시, 작가의 맛깔난 글솜씨에 매료되어 대상 작품에 대한 독설조차도 웃으며 읽어내려갔습니다.(사실, 미디어 작품을 평하는 것이 언제나 호평이 될 수는 없겠지요. 각자 주안점을 두고 보는 부분이 다르니까요. 이쪽이 좋지만 저쪽이 별로일 수 있으니 이런 책에서도 호평과 혹평이 공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림 솜씨만 있다면 글만 보고도 서술자가 지나온 풍광이며 인물들을 그려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동감 있고 쾌활한 묘사에, 근처에서 구입할 수 있는 여러 기념품이나 음식 소개, 친절한 맛집 정보를 곁들인 사이사이로 슬쩍 비치는 장난스러운 몇 마디와 준엄한 몇 마디. 별달리 특별한 단어를 쓰지 않는데도 재치있는 문장이 지면을 채워 나가기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단순한 기행문에 불과한데도 지루하다고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미디어 작품을 즐기는 이가 쓴 글이라서였을까요? 작품에는 우리나라의 애국가 가사를 비롯해서, 영상 작품(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나왔던 어구나 구절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진지함 속에 소소한 유머를 아무렇지도 않게 슬쩍 섞어 예상치 못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문장이 많습니다. 그걸 찾아보는 것도 이 작품을 감상하는 한 재미가 될 수 있겠지요.

 

작가가 여행한 곳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미디어 작품의 여운을 테마 여행으로 즐긴다는 뿌듯한 느낌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여행은 아니었을 겁니다. 예민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일본은 '왜(倭)라고 불리던 그 시절부터 우리나라와는 좋든 나쁘든 상호작용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니까요. 아니나다를까, 오사카 성에 이르러 그 주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야기 일색인 것을 보고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와 일본의 어느 대중적인 탤런트가 극우익 성향을 지녔더라는 이야기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 도쿄박물관의 우리나라 유물들을 보고 안타까웠다는 이야기 등, '일본'이라는 지역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주는 약간 특수한 감정이 이 책에서도 역시 배어나왔습니다.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당시의 그 혼란했던 논란들이 상상이 되었기에, 이런 대목에서는 마음이 그리 좋지를 못했네요. 하지만 작가는 역사에 대한 앙금과 미디어작품 촬영지에 대한 평가를 섣불리 겹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중하고 공정한  태도라 해도 되겠지요. 개인적으로 한수 배웠습니다.

 

약간의 앙금이 남아 있다 해도, 여행하면서 노다메군이 만난 사람들은 거북한 이들보다 푸근하고 친근한 이들이 더 많았던 모양입니다. 공짜로 자전거를 빌려주신 데다 아이스크림과 귤까지 덤으로 주신 분, 싸게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신 분 등, 아무래도 일본도 사람 사는 데다 보니 정이 오가는 것은 우리네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일상을 박차고 떠나온 여행길에서 이런 사람들을 잠시 몇 명만 만나 봐도 어느새 마음이 훈훈해져 오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외국에서 이런 분들을 만난다면, 그들과 느끼는 감정이 남다르지 않을까 하고 슬쩍 상상해 봅니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 형태가 어떻든 문화가 빠질 수 없겠죠? 애초에 이 책에서 다루는 여행의 테마도 일본의 영상 콘텐츠, 즉 문화 산업에 관련된 곳을 찾아보자는 취지였으니 문화 이야기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 겁니다. 문화를 넓게 보아 '인간의 생활 양식'이라고 한다면,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음악이나 영화, 연극뿐 아니라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여러 물품들과 싱그럽게 피어나는 학생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까지도 문화에 포함될 테지요. 작가가 공들여 소개하고 설명하는, 이런 소소한 문화 이야기들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미 그 장소에 다녀온 작가가 부러워지더군요. 가능하다면 지금 곧 달려가도 여기에 소개된 것들이 그대로 있을 것 같은 기분좋은 생각에 젖어 책장을 넘기다 보면, 별 거부감이 없이 우리나라와는 약간 다른 일본의 문화와 풍습을 재미있게 알아갈 수 있습니다. 기행문을 읽는 묘미 중 하나가 바로 이런 문화의 다양성 아닐까요?

 

작가는 테마 기행문을 독자 여러분이 일본에 대해 취할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기를 바란다는 에필로그로 마무리한 뒤에, 지금까지 소개했던 지역들의 상세 지도를 딸림자료로 첨부해 놓고 있습니다. 이 책 한 권만 들고도 책에 나온 촬영지들을 어느 정도는 찾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배려이겠지요. 독자를 생각하는 세심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다만.

이 책이 2009년 7월 23일 초판 1쇄를 간행해서, 재쇄나 재판 없이 지금까지 시중에 돌아다닌다는 전제를 하더라도, 말줄임표를 온점을 나열한 것으로 대신한다거나 마땅히 띄어 써야 할 대목을 붙여 쓴다거나 마땅히 붙여야 할 어미를 떼어 버리거나 낱말에서 한 글자 정도를 빼먹는 등의 실수가 의외로 제법 자주 눈에 띄는 것이 상당히 거슬리는군요. 부디 다음에 재쇄나 재판을 하시거든 초판의 오탈자나 맞춤법 위반이나 문장 부호 오류 정도는 고쳐서 출판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뿐 아니라 에필로그에까지 이러한 오탈자가 보입니다. 재미있는 여행 후기를 읽고 나름대로 흡족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차마 평점에 별들을 모두 칠하지 못하고 네 개만 연두색으로 채워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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