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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평점 :
1.
인류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갸웃하다가 이내 좌우로 흔들며 부정하고 만다. 나는 왜 납득하지 못하는가. 사회의 요구대로 대학을 다니며 학점을 채우고 대외활동을 하며 토익과 온갖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고 채용이력서에 넣을 수 있을 만한 교내외 대회를 찾으며, 그와 동시에 학자금 대출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돌려막고, 부족한 돈을 근로장학생과 아르바이트로 메우는 내가 풍요의 시대에 맞게 넉넉한 삶을 산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풍요의 시대”가 제공하는 사회적 기회는 내게 그리 많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시대적 조류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나를 더욱 소모하게 될 뿐이다.
내가 게으른가? 나는 나름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나와 같은 사람들을 싸잡아 게으른 청년이라고 비난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이들은 현 사회에 기득권을 쥔 이들이 대부분. 자본주의 경제가 신자유주의적 방향으로 급격히 속도를 내면서, 시장과 금융을 주름잡는 이들에게 기존의 사회구조가 조직됨에 따라, 돈이 있는 사람들이나 그로부터 오는 기회를 누릴 자유를 얻는다. 그 기회들은 점점 위를 향하고 있는데 나 같은 아래 사람들은 기회가 자연히 박탈될 밖에. 그렇게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결함으로 비난하는 그들은 자유로운 이 시대에 무엇이 문제냐고 내게 투덜대지만, 그 “자유”는 내겐 공허하게만 들린다.
2.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라니, 나는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유토피아”라는 표현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리얼리스트”가 담고 있는 이미지가 일반적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데 있어 객관적이고 경험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를 취하며 접근하고자 한다면, “유토피아”는 utopia, eutopia, (지금은) 없는 좋은 장소, 즉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 세계를 말하지 않는가. 현실주의자가 없는 세계를 향한 시니컬한 몽상을 한다니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저자는 왜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사실 유토피아 개념은 구체적일수록 더욱 엄격하고 통제적인 위험성이 방농한데, 저자인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은 구체적 이상세계가 아닌 이상향에 대한 지향을 말하고자 한다. 저자는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을 제안한다.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생산적이고 평등한 삶을 촉진하기 위해 현대 사회를 재건하는 실용적인 접근법 정도가 되겠다. 즉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누릴 수 있는 풍요의 삶이다.
더 들어가서, 이 유토피아를 위해 저자는 세 가지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다. 보편적 기본소득, 주당 15시간 노동, 노동에 대한 국경 개방이 그것이다. 그는 왜 유토피아 플랜으로 이 세 가지를 제안했을까? 이는 유토피아를 가로막고 디스토피아를 유발하는 현대의 사회구조에 대해 내린 그의 처방이기도 하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조류를 주도하는 시장과 금융계, 그리고 그에 편승하려는 정치를 통렬히 비판하며 이유를 설명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본질적 경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되어야 하고 그 주체, 목적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제도 기반의 경제 개념에서는 이가 전도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본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제도화된 사회구조와 그로부터 빚어지는 빈곤과 소외, 그리고 불평등.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가 내놓은 각 아이디어는 여러 학문적 연구와 수많은 성공 사례를 포함한 일화적 증거들의 뒷받침과 함께 제시된다. 물론 이는 단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다만 이 아이디어들을 이룩해내기 위해 교육에 대한 투자, 유연한 정년제도, 남성의 육아 휴직, 고용 분할, 사회기여적 직업에 대한 임금 인상, 금융 시장에 대한 증세 등 단계적으로 정진하자고 덧붙였다.
독자들이 그의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까 의식했는지, 그는 지난 3년 간 기본소득 개념에 대한 관심도가 어떻게 고양되고 사회적 논의를 넘어 담론이 형성될 수 있었는지 설명했다. 분리되어가는 극단적 국제 상황―브렉시트, 트럼프의 이민자 정책 등을 언급하며 이러한 상황에 대항할 수 있을 만한 진정하고 급진적인 수단에 대한 세계시민사회의 요구가 점차 커지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의 현 상황과는 완전 동떨어져 보이는 주장처럼 보일지라도, 이러한 유토피아적 사고는 우리가 가야하는 방향이 어딘지 알려주는 지표가 되어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노예제도의 종식, 여성의 참정권, 복지국가의 부상 같이 과거엔 불가능과 비상식으로 여겨지던 것이 오늘날엔 기본 상식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한편 이러한 역사의 진보를 이끌었던 좌파들이 오늘날 돈과 표 때문에 온정적인 자세를 취하는 데 대한 비판과 함께, 급진적 견해를 외부적 요소 때문에 짓누르기보다 양심과 신념에 따라 희망과 진보의 언어를 되찾자고 그는 역설한다.
3.
이 글을 읽으며 조금 불편했던 것은 그의 주장에 동조가 되면서도 그의 서술 속 주체들은 너무 서구 중심적이라는 사실이다. 사례든 뭐든 모두 철저히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였으며 그것이 일반적이라며 치환시켜내는 듯이 보였다. (그에 뒤따르는 현상으로 동양―특히 한국이 이따금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는 곧 북미와 유럽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개발도상국에 대한 또 다른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문화적 상대성, 특정 공동체의 일정한 개별적, 특수적 가치에 대해 그가 조금은 둔하지 않은가 의문을 품게 된다. 이에 더해 그가 초국적 노동 인구 이동에 대한 통제를 완화(국경 개방)하자는 주장은 내게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논하는 현실 세계를 움직이는 소스는 결국 돈, 경제라는 점에서(사실 정말 그렇다고 나도 시인한다), 당연히 경제적 패권을 쥐고 있는 서구를 중심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하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도 함께 들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과 여러 학문에서의 연구, 실제적 성공·실패 사례를 고찰하며 현대 사회의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과, 이들을 논거로 짜임새 있게 구성해 내놓은 그의 주장에는 어느 정도 신뢰가 느껴진다. 게다가 저자는 겸손한 자세를 취하며 독자들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려 노력하면서도 서슬 퍼런 비판도 함께 내세우는데, 좌·우파를 구분하지 않고 공동선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미온적이고 온정적인 태도를 일관하는 사람들을 모조리―특히 좌파를 비판하는 모습에 특히 인상이 깊게 남는다. 나도 공감이 된 이유에서일까. 어려운 용어들을 즐비하며 탁상공론을 펼치는데 반해 실천행동으로 나서지 않는 일부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 대해 가져왔던 크고 작은 불만을 그가 대신 터트려준 것처럼 시원했다.
그가 말하는 유토피아, 이상향에 대한 지향점은 꽤나 뚜렷해 보인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향의 지점은 나의 그것과 서로 다를지 몰라도, 그래도 방향은 같은 것 같다. 지금 당장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가 실천행동의 방법까지 알려주었다면 그건 분명 유토피아 플랜이 아니라 또 다른 디스토피아였을 것이다. 그래도 국가의 역할과 사회구성원들의 연대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여하튼.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가 만연하다 못해 극으로 치닫고 있다고 평가되는 한국사회에 아주 흥미로운 책이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세계 곳곳에 번역본을 출간하며 이 책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고 싶어 한다. 그는 이룩하려는 유토피아와 우리가 원하는 유토피아는 닮아 있을까? 어떻게 그 성(城)을 쌓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나부터 그에 응답하여 이렇게 부족하게나마 몇 자 적는다. 나의 주변에서부터 차례로, 나아가 한국 사회 안에서 그의 담론이 토착되어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