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개인의 도덕적- 사회적 행위는 사회집단(인종, 국가, 경제 등) 사회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첫 문장은 자뭇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 책의 의문점이고 시작점이자 일종의 선언으로 보여진다. 그가 보기에 선한 의지와 이타적인 본성을 지닌 개인과 그로 구성된 집단(사회)간의 상충과 모순은 각 개인과 집단이 가진 고유 속성과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혼용하여 생긴 결과물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즉 개인에게 있어 선한 의지와 이타성이 집단으로 들어가면 다르게 표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 이타심의 총합, 즉 양심의 총합이 전체로 이어진다는 환원주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호혜성이나 동정이 집단이라는 결을 닿으면 그것은 힘의 차이가 여실하게 드러나는 집단 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학자인 니버는 개인의 지닌 이타적 본성을 인정하면서도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 집단간의 갈등과 분쟁들에게 대해 너무나도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종교학, 시회과학, 교육학, 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가령 종교는 인간을 너무 이타적이고 원자적인 개인으로만 국한시켜 사회에 무관심을 초래하였으며, 사회과학의 ‘이성‘에 대한 강조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으로 조정과 타협을 궁극적인 지향점으로 삼아 갈등을 악으로 치부하였다는 문제점을 보인다 말한다. 또한 사회 집단의 갈등은 인간 무지에서 비롯되었기에 더욱 교육을 통해 합리적인 개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육학의 관점은 지배층의 특권을 옹호하는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비판한다. 니버가 보기엔 이 세 학문은 사회 집단 간의 갈등과 문제를 이성을 통한 정의 구현이라는 다분히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대안을 제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 학문에서 ‘악‘으로 치부되는 사회 갈등과 불평등은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자 타파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가속화되고 있는 힘의 불균형(정치, 사회, 경제 등등)은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특권화된 계급으로 고착화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힘의 불평등이 집단 간의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를 구성하는데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 인식이다. 그렇다고 니버는 맑스주의자처럼 갈등을 사회 진보의 원동력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갈등이 엄연히 존재하고 불평등 완화하기 위한 세력간의 다툼과 갈등은 당연한 것이기에 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러면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약한 쪽의 저항과 투쟁,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집단 간 힘의 불균형으로 빚어진 사회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사회적 정의‘가 중요한데 이를 위헤서는 힘센 집단에 대항할 대항세력과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니버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 사회적 정의는 다분히 이상적인 조정의 산물이 아닌 때론 강제력이 수반되는 형태이다. 니버는 지배권력의 대항세력의 투쟁에서 일정 부분 폭력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의 폭력은 소수(숫자가 아닌 힘) 세력의 생존에 관련된 부분에서만 다소 허용되어야 한다. 니버가 보기에 지배권력은 이미 공권력(사법권, 경찰권 등)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합법적이며 비폭력적인 행태(?)의 폭력을 자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배 계급의 잣대로 노동자계급의 선동적인 폭력에 대해서 야만적이며 불법적이라는 비난하는 건 불공정하다. 그렇다고 니버가 폭력을 옹호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회적 정의 구현에 있어 비폭력적 저항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지만 그 역시 다른 사회관계에서 다른 집단의 피해는 없는지 세심하게 살펴봐야 한다 주장한다. 간디의 비폭력 저항의 사례를 들면서 행위의 선함이 결과론전 선함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은 흥미로우면서도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

니버는 책 전반에 걸쳐 사회 갈등과 사회정의의 문제를 이분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경계한다. 개인/사회, 폭력/비폭력, 갈등/정의 등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분적인 시각으로 해결되지도 않으며, 정확하게 양분되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 이성과 윤리는 정의로 향하는 길이긴 하지만 힘의 불균형이 계속 되는 한, 집단 속의 개인은 계속 이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산업화에 심화된 자본주의는 굴뚝에서 컴퓨터로 옮겨갔을 뿐 더 극심한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고 그 간극은 더 커지고 있다. 니버가 긍정했던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시 그 안에서 힘의 불균형에 따른 노조간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새롭게 나타되고 있다.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며 달리 말하면 우리네 정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버는 정치에 있어 국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듯 보인다. 오히려 미국인이었던 니버가 소수 세력의 의회진출이 다소 용이했던 영국, 독일의 정치 시스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계급이 고착화되고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현재는 니버가 논의했던 자본가/노동자, 제국/식민, 여성/남성 이라는 집단 문제가 이미 사문화된 듯 보인다. 이미 이들 간의 불평등은 이성과 교육, 사회정의를 통해 많이 해소되었고 앞으로 더 긍정적으로 바뀌어 갈 듯하다. 사회경제적 계급 문제, 고령화에 따른 세대 문제, 경제불황에 따른 정규직/비정규, 도시/지방, 자국민/이주민 등등 비도덕적 사회는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면서 진행중이다. 정의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실현은 묘연할 뿐이다. 하지만 니버가 제기하는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고도 강력한, 그러면서도 더 절실하면서도 유효한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층과 극단적 견해를 지닌 집단이 점점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네 정치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것이다. 니버에게 있어 정치는 나와 타인 간의 힘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다. 개인의 이타성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이타적일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맹목적인 복음주의가 위험한 것은 자신만의 이타성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이타성이 타인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자각할 수 있게 만드는 건, 개인과 타인간의 관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집단이 그 이기성을 제어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집단과 다른 집단간의 관계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모두가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개인도 집단도 사회도. 정의는 모두가 최대의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의 관계의 차이를 최소화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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