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숲 - 하나님 나라로 읽는 느헤미야 기독교 입문 시리즈 1
김근주 지음 / 대장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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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이라는 숲과 그 속의 군락, 나무를 둘러볼 수 있는 좋은 책. 널리 읽히기를. 하지만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1. 신학이 나름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선교에 복무해야 하는 것이라 할 때, 사소한 용어 선택부터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 예로, 이 책에서는 주전/주후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성경이나 크리스트교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술 마시기 전인지 후인지... 짐작으로 안다 하더라도 그 생경함이 독서에 불편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또 에큐메니컬한 견지에서 다양한 종파에서 다르게 불리우는 고유명사를 한 번 정도 병기하거나, 사회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선택하면 안 되는 걸까? 


2. 한글 문장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짐작으로 때려맞출 수는 있겠는데, 문장 자체만 봐서는 뜻이 명료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모르기는 몰라도, 영국 유학 시절에는 전치사 하나, 관사 하나를 가지고 노심초사 하지 않으셨는가? 모국어라 해서 형편이 다를 수 없다. 문장을 이루는 건 둘째 치고, '은, 는, 이, 가'만 제대로 맞춰도 글이 한결 산뜻해질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라면 질겁하실 수도 있겠으나, 저자의 학부 선배인 정운영의 글을 일독하시길 강권한다.


3. 편집자의 역할. 세상에 정서법 규정을 다 알고, 다 지키며, 오타 하나 안 내는 글쟁이가 있기는 할까? 어쨌든 편집자가 있지 않은가? 아주 소극적인 차원에서, 편집자가 오탈자와 정서법 검토 정도는 꼼꼼하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심심찮게 눈에 띄는 오류들이 책의 격을 떨어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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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신학 입문
칼 바르트 지음, 신준호 옮김 / 복있는사람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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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개신교’신학입문>을 읽고자 하십니까? 먼저 공들여 외국어를 익히십시오. 독일어면 제일 좋고, 영어든 불어든 일본어든. 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우면 어떻습니까? 제대로 읽어야지요. 아니면 더 좋은 국역본이 나오기를 기다려야지요.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으니 하는 말입니다. 


먼저 <책소개>를 인용해보지요. 바르트에 대한 주례사에 가까운 상찬은 그렇다 치고.


“새로운 번역과 장정으로 소개되는 원문에 충실한 완역본.”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목회자·신학생들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이 책은 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해줄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이다.”


뭐 새로 나왔으니까 번역과 장정이 새롭기는 하겠죠. 그런데 원문에 충실하다라? 신학의 진수를 맛보게 해줄 훌륭한 입문서라? 이번엔 추천사를 살펴보지요.


“바르트 신학의 진수를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 책 (...) 편협한 이념에 구속되지 않고 한국 개신교신학이 마땅히 서야 할 자리와 자세를 가르쳐 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들은 처음에는 긴장하다가도 어느새 놀랍게도 그의 삶과 신학이 편하게 다가옴을 느낄 것이다. 번역도 물 흐르듯 매끄럽다.” 

 “옮긴이를 통해 원서의 난해한 독일어가 특유의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따스한 목회적 감성을 지닌 한국어로 탈바꿈했다.”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 국역본의 탁월함을 칭찬하는 것을 보면, 독일어본과 대조 정도는 해보고 추천사를 쓰신 것 같아요.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고, 안 믿고 싶기도 하고. 



제목의 문제. 100자평에 보니 이형기 교수가 원제목의 형용사 ‘evangelische’를 ‘복음주의’로 번역했던 것에 아쉬움을 표하는 분이 있으시군요. 왜 아쉽지요? 또 개신교신학입문의 역자가 “충실한 번역을 하기 위해 애쓴 흔적”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지요? 아쉬워하시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라,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니라, 그 근거가 무엇이냐는 겁니다. 바르트가 ‘evangelische Theologie’를 정의하고 있는 책의 초반부로 가봅시다.


독일어본: Einfue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TVZ, 8판, 2013.

(편의상, 움라훝은 ‘e’로 큰/작은 따옴표는 한글 맞춤법 체계를 따라 표기했습니다. 독일어 문장의 구조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조탁과 윤문은 그 다음 문제겠지요)


p.11

Nicht alle “protestantische” ist evangelische Theologie. Und es gibt evangelische Theologie auch im roemischen, auch im oestlich-orthodoxen Raum, auch in den Bereichen der vielen spaeteren Variationen und auch wohl Entartungen des reformatorischen Neuansatzes. Mit “evangelisch” soll hier sachlich die “katholische”, die oekumenische (um nicht zu sagen: die “konziliare”) Kontinuitaet und Einheit all der Theologie bezeichnet sein, [...].


모든 “신교의(protestantische)” 신학이 evangelische 신학은 아니다. 그리고 evangelische 신학은 로마의 그리고 동방-정교회의 권역에도, 또한 (종교)개혁적인 새 출발 이후에 나타난 변주들과 또한 변종들의 영역에도 있다. 여기서 “evangelisch”라는 말은 실질적/객관적으로 모든 신학의 “보편교회적인”, “(“공의회”적이라고 말하지 않기 위해) “교회일치적인” 연속성과 통일성을 표한다고 할 것인데, (...)


일단 첫문장에서 이미 게임이 끝났다고 볼 수 있죠. 이어지는 내용에서 드러나듯, 바르트는 ‘evangelische’ 신학을 특정 종파의 신학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evangelisch’라는 형용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죠: ‘개신교의’ 그리고 ‘복음(주의)의’. 둘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까요? 바르트의 설명은 ‘개신교의’를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습니다. 번역의 세부적인 차이를 차치하고, 국역본의 해당 부분(10-11쪽)만 읽어도 바르트가 말하는  ‘evangelische Theologie’가 개신교(의)신학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저로서는 이 책의 제목이 왜 <‘개신교’신학입문>이 되어야하는지 모르겠군요. 이 책의 제목에 ‘개신교’라는 레떼르를 붙이는 것은 단순한 오역이 아닌, 복음(주의)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정의의 바깥으로 내달리는 일이죠. 그런 책 제목이 있지요? 번역은 반역이다? 그런가봅니다.


하나만 더 보고 가지요.


9쪽

“그 많은, 소위 신학들은 우리가 여기서 전개하려는 신학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한 신학들을 우리의 신학과 연결시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끔찍한 일이다”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긴 독일어 문장을 잘게 쪼갤 수는 있지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원문의 의미가 훼손되면, 심지어 왜곡되면 안 되겠지요. 국역본은 여기서 문장을 조각조각 냄으로써 문장의 논리적 구조와 의미를 파괴하여 정말이지 ‘끔찍한’ 번역을 생산했더군요. ‘fruchtbar(풍부한, 유익한, 다작의)’가 ‘끔찍한’으로 번역되어 있더군요. ‘furchtbar(끔찍한)’와 혼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르트는 수많은 다른 신학들과 여기서 다루려는 신학이 “어떤 본질적인 것(etwas Wesentliches)”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초역 과정에서 실수가 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어떻게 이런 실수가 간과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출판사 ‘복있는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죠. 편집자의 역할이 오탈자나 잡아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죠. 독일어를 읽을 수 없다면, 영역본이나 기타 언어로 번역된 판본이라도 구해서 국역본과 대조하여 그 품질을 검사해야 하겠지요. 몇장 안 봤지만 걸고넘어지고 싶은 부분이 많군요.


번역, 쉽지 않은 일이지요. 얼마나 피를 말리는 작업일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이 결과물의 하자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지요. 분야를 막론하고 번역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지요. 더구나 칼 바르트 같은 대가의 작업을 소개하는 일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요. 신학은 ‘-학’입니다. 학적 엄밀함을 결여한 번역의 유해함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신학계의 번역 수준이 궁금해지는군요. 번역은 대개 개인의 작업이지만, 과연 어떤 번역이 유통되고 인정받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사족


밑에 <마이리뷰> 쓰신 김정원님. 아래와 같이 쓰셨더군요.


“나는 9년 동안 신학공부를 했다. 학부 4년, 대학원 3년, 석사 2년. 외국에서 박사과정까지 제대로 공부한 분과 비할 수는 없지만 나름 신학에 잔뼈가 굴다.” 


겸양의 뜻으로 하신 말씀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만, “외국에서 박사과정까지”했다고 해서 꼭 “제대로” 공부한 것은 아닙니다. 공부의 장소가 어디든지 간에, 정확히 읽고,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쓰는 게 중요하겠지요. 유학파가 없어서 한국 번역의 수준이, 넓게는 학술의 수준이 이런 게 아니에요. 유학파든 국내파든 충실히 공부한 사람이 적다는 게 문제겠지요. 유학파한테 너무 기죽지 마십시오. 잔뼈는 외국에서만 굵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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