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을유사상고전
묵자 지음, 최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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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묵자


겸애와 비공, 수성의 달인과 같은 몇 가지 키워드로만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묵자와 그의 학파, 묵가를 이해할 수 있는 원전 “묵자”가 완역되었다. 책의 첫인상을 말하자면1,300페이지가 넘는 책의 두께가 마주한 사람을 위압한다. 다행히도 책을 펼쳐보니 원문(한문)과 한역이 나란히 쓰인 형태라 생각보다는 글이 많지 않다. 어디까지나 “생각보다는” 적다. 

고전(classic)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다 읽어본 적은 없는 책”이라는 정의는 이 책에도 딱 들어맞는다. 적어도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렇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고, 자세를 바로하게 만드는 준엄한 교훈도 있고, 뜻밖의 역사 지식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현대인에게는 어색한 문장과 글의 전개방식, 익숙치 않은 고사와 인물에 관한 언급이 나올 때마다 과속방지턱을 지나는 듯 시선이 턱턱 걸린다.

그럼에도 묵자는 시간을 들여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몇 가지 질문들과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몇 가지 의문들, 그리고 상식과 통념으로 알고 있는 묵가 사상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몇 가지 대목들 때문이다.

1. 묵가는 과연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는가?

통념과 달리 묵가는 사해동포주의나 만민평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군군신신부부자자의 유교적 이념, 그러니까 각자가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에 있고 그 자리에 합당한 도리를 다해야 비로소 세계에 질서와 조화가 확립된다는 사상에 가깝다. 천하가 혼란한 것은 각자가 각자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통치자는 피치자의 삶이 나아지도록 끊임없이 신경써야 하며 피치자는 생산과 재생산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본분을 무시하고 통치자가 방탕하고 사치하면 피치자는 도탄에 빠져 자포자기한다. 이러한 논리는 한편으로는 유가의 이상인 덕치에 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국강병의 논리로 이어질 여지도 있다. 이상하다. 묵가는 분명히 공격은 없는 수성의 철학인데?

2. 왜 강자는 약자에게 관대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묵가의 두 번째 중요한 규범이 나온다. 강자가 약자를 침탈하고 억압하는 것은 하늘의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오히려 힘 있는 사람(국가)은 힘이 모자란 사람(국가)와 어울려 평화롭게 지내야 마땅하다. 전쟁을 벌여 인명을 해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나라 안에서 살인을 하는 것은 처벌받으면서도 전쟁으로 수만을 살상하는 것은 권장되니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원칙이 때에 따라 달라지니 천하가 어지러운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백만 명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보다 몇천 년 앞선 통찰이다. 심지어 근대 국제법의 논리, 그리고 주권국가는 국력의 차이와는 무관하게 동등하다는 관념과도 맥이 닿는다. 나라 안과 나라 밖의 법칙은 다르지 않으며, 어디서나 강자는 약자를 살피고 공존해야 한다. 참 좋은 말이다. 

3. 지배자는 무엇 때문에 통치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가?

그런데 말입니다. 왜 강대국이 약소국의 사정을 봐주고 권력이 있는 자가 힘 없는 백성을 삥뜯지 않는 것이 하늘의 도입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까?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방법에 대해 묵자는 답을 못하고 (이름처럼) 침묵하는 것 같다. 당대에 제후들이 자기 권력욕, 지배욕을 위해 백성들을 착취하고 전쟁 준비로 징발을 거듭하고 실제로 싸움을 벌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참혹한 현실을 멈추게 하려고 그런 철학을 내세운 뜻은 아주 잘 알겠다. 그런데 대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왜 권력자가 권력자가 되었는지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수천 년 후의 역사학자인 아자 가트(Azar Gat)가 내놓은 답을 보면 국내외적 권력 투쟁은 극단적인 고위험 고수익의 투자, 사실상의 도박과 같으며 그 도박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성과를 누리려고 한다. 사치와 향락까지는 아니더라도 필부필부보다는 훨씬 더 풍족한 재화, 영양상태, 더 많은 재생산의 기회가 생긴다. 이렇게 본다면 (좋은) 통치나 평화유지는 그런 혜택에 따르는 부수적인 의무 혹은 비용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묵자는 그걸 본질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가트의 이론을 다시 한번 빌리면, 전쟁과 폭력의 사용이 평화로운 수단을 통한 이익창출활동에 비해 수익률이 너무 떨어져 더 이상 매력이 없어지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야 타당한 주장이다. 묵자는 무려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들이 왜 방어와 수성 전술에 몰두했는지 이해가 된다. 1. 강한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강한 힘으로 남을 겁박하고 괴롭히면 나쁜 것이다. 3. 그렇다면 적어도 남보다 약하지는 않아야 한다. 정확히 말해 남에게 침탈당할 정도로 약해서는 안 된다. 4. 결론: 누가 쳐들어와도 다 막아낼 힘을 기르면 된다. 5. 모두가 이런 상태에 들어간다면 자연히 세계평화가 도래할 것이다. 

세력균형, 공포의 균형, 혹은 핵억지를 통한 균형에 필적하는 수성의 균형이라 할 만하다. 모두가 압도적인 방어전력을 갖춘다면 굳이 전쟁을 해야할 가치, 혹은 이득이 없어지지 않겠는가? 물론 방어력의 극대화를 통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전쟁의 상대적 이득을 획기적으로 끌어내림으로써 현대사회는 (일단은) 묵자의 이상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해냈다고도 할 수 있다. 묵가 사상은 이런 의미에서 꽤나 근대적이다.

4. 프로토 공리주의?

묵가가 근대적인 부분은 이(利)를 중시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애(愛)와 이를 구분하고 있는 구절이 흥미롭다. 사랑하는 것과 이득을 챙겨주는 것은 다르고 상대에게 도움이 정말 되려면 사랑하기보다는 이득을 주라는 것이다. 통치자 역시 백성에게 무엇이 이득이 되는지를 고민하고 그에 맞는 정책을 펴야지 과거의 관습, 관행, 전통, 규범 같은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유학에 대한 비판도 이와 연관되어 나타난다. 상업에 대한 언급은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추측건대 다른 사상에 비해서는 상업에 호의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도 있다. 물론 전산업사회의 사상이니 기본은 농업, 개간과 인구증가를 통한 생산력 증가에 방점을 찍고 있으니 아주 적극적으로 상업을 권장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다만 그러한 이익의 계산이라는 것이 극단적으로 생계 중심적인 식의주문제에 한정되는 탓에 음악을 위시한 예술활동을 사치로 규정하고 억제해야 한다고 하는 부분은 묵가 사상의 극단적 실용주의가 보여주는 한계다. 묵자와 그의 제자들이 지금 시대를 굽어볼 수 있다면 다른 건 몰라도 문화산업이 1, 2차 산업을 압도하는 현실은 엄청나게 개탄했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전통적 관념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주객전도일 테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유용하게 쓰이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직업보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뭘 만들어내지도 않고 글자와 숫자, 기호와 그림만 다루는 일견 허망한 작업이 더 높은 가치를 받는 이런 상황 말이다.

아무튼 2000년도 넘는 과거에 정의로운 삶, 정의로운 국가, 정의로운 세계질서를 궁구하는 사람들이 이미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비록 졸박하게나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곱씹어볼수록 신기하다. 그리고 지금도 고민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는 동시에, 사실은 묵자와 같은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 질문 자체는 미결로 남아있을지언정, 곁가지에 있던 다른 수많은 고민과 걱정들이 해결되어 역사가 만들어지고 인류의 삶이 나아진 부분이 생긴 것이 아닐까 그런 결론을 내리고 약간 안도했다. 적어도 그때에 비해 인류의 인구가 이렇게 늘어난 것을 보면 묵자도 조금은 뿌듯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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