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책 때문에 인연이 이어진 기자에게 문자가 왔다. ‘작가님, 우리 동네 유심수퍼가 조만간 문을 닫는대요. 사진 안찍으셨으면 얼른 다녀가세요.‘
‘아, 할머님이 그 동안 고생 많이 하셨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아쉬움이 들었다. 유심수퍼에는 두 번 찾아가 인사를 드렸었다. 팔순이넘는 연세에도 강단 있어 보이는 선한 얼굴의 할머니가 계신 곳이었다. 50년 넘게 해온 장사를 접으시려는 모양이었다. 혼자 장사하며 자식키우느라 고생 많으셨으니 쉬실 때도 되었다 싶으면서도 서울의오래된 가게 중 하나가 문을 닫는다니 마음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듯 울먹했다. 꽃이 피면 지는 게 순리인데 매번 스러지는 것에 마음이아프다.
- 유심수퍼 - P136
가을 생각 장적 낙양성 안에 가을바람 부는 걸 보니 고향집에 편지를 보낼 생각 만겹이나 든다 바삐 써서 이야기 다 못했나 다시 걱정해 행인이 떠나기 직전 또 열어 보네
당나라 시인 장적의 시다. 그림을 완성하면 화방으로 보내 액자를 하고갤러리로 옮긴다. 얼마 뒤 누군가의 품에 안길 분신 같은 그림들을작업실에서 차마 서둘러 떠나보내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쭈그려 앉아쳐다보는 나의 심정도 시인의 마음과 같다.
- 떠나기 직전 또 열어 보네 - P159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 내가 말하는 건축은 그 시대에 살았던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집과 공간이다. 과거의 터전이 낡고오래되었다고 스스로의 터를 죄의식 없이 갈아엎고 부순다면 진짜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과거요, 추억이요, 고향이요, 자아일 수 있다. 반세기 동안 근대화와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낡고 오래된 옛것을우리의 삶에서 지우고 감추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이전보다따뜻하고 배부른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도 많다. 무분별한 개발보다는 복원과 보존으로우리 삶의 근본과 맥락을 찾아야 할 때다. 더 늦기 전에.
- 지붕 이야기 - P164
구멍가게를 찾아 남도 지역으로 향했을 때였다. 해남 대흥사 대웅전앞에 다다라 잠시 숨 돌리다 이런 쪽지를 보았다. 得之本有 失之本無 득지본유 실지본무 얻었다고 하나 본래 있었던 것이고, 잃었다고 하나 원래 없었던것이다.
여러 해 전국을 돌며 어렵사리 수집한 구멍가게 자료가 컴퓨터에서없어져 버렸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는 내 불찰이다. 사진을 모두현상이라도 해 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잘 다루지 못하는 컴퓨터를너무 믿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만회하려 허둥지둥 그때의발자취를 거슬러 가게를 찾아다니느라 마음이 조급했는데, 쪽지에적힌 글을 보고는 그 분주한 마음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 해남 두륜산에서 - P170
전남 순천에서 여수로 가는 길목에 자리한 해룡마을에는 커다란버드나무가 눈에 띄는 가게가 있다. 기다란 점방 옆에는 작은 이발소도딸려 있다. 가게 옆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코끝을 찌르는 시큼한막걸리 냄새. 가게 안 양철 테이블에는 변변한 안주도 없이 잔술이 놓여있었다. 둘러앉아 낮술 하는 서너 명의 사람들, 볕에 그을은 얼굴이심히 발그레하다. 해룡상회는 중년의 여주인 말에 따르면 60년쯤 된 점방이었다. 주인이네 번 바뀌었고 그가 가게를 인수한 건 6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연로한마을 토박이 어르신은 한국전쟁 전에도 있던 가게라고 말씀하셨다. 시간이 흘러 버드나무는 아름드리 고목이 되어 처마를 밀치고, 주인도손님도 숱하게 바뀌고, 세상도 변했지만 해룡상회 간판은 아직건재하다.
- 해룡상회 - P174
함석판 위에 무심히 써 내린 검은 먹글씨. 생채기 난 자리에 녹이 슬고, 드문드문 떨어져 나간 표피 아래 켜켜이 쌓인 세월의 지층. 무명의 삶, 무명의 글씨, 무명의 화가. 붉던 가슴은 하얀 목련으로 피어오르고그림도 글씨도 제 주인의 향기를 품는다.
- 손글씨 간판 - P184
~ 이젠 손님이 가뭄에 콩 나듯 온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하던 일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언제 올지 모르는손님을 기다리며 그림을 그리신단다. 아직도 소녀처럼 고운 할머니는수줍어하시며 직접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가게 안은 만물 백화점처럼 갖가지 물건이 가득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손님을 위해서라도 이것저것 다 갖춰야 하는 게 점방 하는 사람의도리라고 하셨다. 구석에 앉아 먼지 쌓이고 빛바랜 물건들은 저자리에서 얼마를 기다리며 늙어버렸을까?
그곳에 다녀온 지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이 점방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처음과 같은 맘으로 이로운 것만 팔고자오늘도 손님을 기다리실 것만 같다.
- 곡성교통죽정정유소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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