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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나는 침대에 앉아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페이지를, 도대체 내가 쓴 - 아니다, 내가 쓴 게 아니다, 내 기이한 협력자가 쓴 것이다 - 구절을 노려보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 그토록 주도면밀히 계획된, 그토록 주도면밀히 집필된 내 작품이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이제 모조리 내적으로, 본질적으로 파괴되었다는,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렸다는 의식, 바로 이 생각이 나를 찔러댔다. (...) 실로 모든 게 바로 실수가 있을 수 없음에 기반을 두고 있었소. 그런데 지금 보니 실수가 있었소. 게다가 그게 어떤 실수요? 아주 하찮고 우스꽝스럽고 조악한 실수가 지금 드러난 거요. 들어봐요, 들어봐! 나는 경이로운 내 작품의 잔해를 지켜보며 서 있었소. 그러자 날 인정하지 않은 군중이 옳았는지도 모른다고 역겨운 목소리가 내 귀에 대고 소릴 질러댔소. 그래요, 난 전부 의심하게 되었소. 핵심을 의심하게 된 거요. 그리고 길지 않은 여생을 온전히 단 하나, 이 의심과의 헛된 싸움에만 쏟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소. 나는 사형수의 미소를 지었소. 그리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툭한 연필로 첫 페이지에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절망‘이라는 단어를 썼소. 이보다 나은 제목을 찾을 수 없소.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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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장면에서 숨을 참고 움찔하게 만드는 나보코프의 매력을 느꼈다. 오늘 이 하루를 짧고 굵게 압도한 이 작품.
예술가가 주도면밀하게 잘 짜여진 작품을 만들어 나갈때. 아니, 한 사람이 체계적으로 실수란 없는 삶을 살아 보겠다고 했을때. 곧 이어 마주하게되는 곳곳의 허점들. 그 어쩔 수 없는 균열들이 초래하는 붕괴와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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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커튼을 걷었다. 서서 바라들 본다. 그들은 수백, 수천, 수백만. 그러나 완전한 침묵. 들리는 건 숨소리뿐. 창을 열고 짤막한 연설을 한번 해볼까.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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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건 군중뿐. 그 시선과 침묵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