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피아니스트 글렌굴드는 쉰한살에 자연사했다. 하지만 소설속 글렌굴드의 친구인 베르트하이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베르트하이머와 소설속의 ‘나’, 그리고 글렌굴드는 오래된 친구사이였다. 셋은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지. 스승인 호로비츠의 지도하게 글렌굴드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할수 있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와 ‘나’는 성장을 포기해야 했다. 셋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모에게 반항한다는 의미로 피아니스트가 되고싶었다. 그리고 한명은 성공했지만 둘은 실패했다. ‘나’는 진로를 바꾸어 에세이를 쓰는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글렌굴드를 질투하며 평생을 등지고 살게된다. 글렌굴드가 베르트하이머에게 붙여준 ‘몰락하는 자’ 라는 별명. 별명인지 멸칭인지 베르트하이머는 서서히 별명대로 몰락하기 시작했지. 재즈는 스윙이지만 오스트리아는 클래식의 세계이다. 베르트하이머 에게는 예술과 완벽성은 중요했고 그가 살던 도시는 특히나 그러했다. 그는 시골의 낙천적이고 유쾌한삶을 살지 못했다. 글렌굴드는 사람이 싫어서 시골에서 작업했다면, 그는 건강이 안좋아져 사람을 등지며 시골에서 살게되었다. 둘은 친구사이였지만 한명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었지. 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자기가 좋아하는 피아노를 해도 죽을때까지 천재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의 자서전 일것이다. 결국엔 그가 잡아두었던 여동생마저 결혼을 하고 그는 ‘몰락하는 자’가 되고 말았지. 글렌굴드는 평생을 천재로 살며 쉰한살에 자연사 했다. 하지만 그것을 소식으로 들은 베르트하이머는 좌절감과 열등감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베르트하이머가 좀더 열린생각으로 사회를 살았으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가 살던 도시는 예술과 철학이 풍부했지만 낙천적이지 못했다. 그는 많은 철학자들의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했다. 하지만 그가 배운건 천재와 비교되는 비참함 그자체 였다. 그리고 사람과 시골의 천박함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가 살던 예술의 도시는 베르트하이머를 고립되게 만들었다 생각한다. 글렌굴드는 북미인 특유의 낙천적 사고관을 지니며 살았지만, 베르트하이머는 환경이 달랐다. 그가 살던 환경과 정신적 인간이라는 점이 ‘몰락하는 자‘로 삶을 이끈건 아니었을까? 그는 스스로 ’몰락하는 자‘로 달려가고 있는걸수도 있겠다. 어쩌면 p139의 ”우리의 몰락하는 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몰락하는 자였어, 처음부터 몰락하는 자였다구” 이말이 사실이 아닐까 싶다. 해설서에는 ‘예술의 절대성과 완벽성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인간상’ 이라고 나와있다. 하지만 이소설은 그것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들면 ‘운명이란 존재한다면 운명을 거스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사람이다’. 이런 의미도 말하고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예술성과 완벽성을 추구하는 도시라는 사회의 위험성도 말해주고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160p의 소설책 이었다. 이소설의 가장큰 특징은 독백형식 이라는 것이다. ‘나’의 심리 변화를 통해 베르트하이머를 말해주기 때문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었다. 마치 스윙처럼 말이다.
'한눈팔기'를 읽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어릴적 양부에게 입양된 기억이있다. 그리고 그는 친부와 양부사이에서 돈으로 거래되며 어느곳에도 있지못했다. 양부에게도 파양되어 친부에게 돌아왔지만, 친부는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소세키는 겐조라는 인물을 통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겐조는 영국유학 생활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온다. 그리고 시마다라는 과거의 양부가 돈때문에 찾아오게된다. 길러준 은혜는 친부가 다갚았지만 양부는 겐조의 돈을 갈취하기위해 매일 방문한다. 그에게 상처만 안겨준 양부는 염치도 없는사람이다. 아내도 시마다에 대해서는 알고있었다. 하지만 겐조에겐 어두운과거이기 때문에 둘의 대화는 신중할수밖에 없었다. 겐조는 유학파출신의 지식인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그림자로 얼룩져 있었다. 아내는 셋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하지만 겐조는 과거의 사건에 사로잡혀 아내를 돌보지 못한다. 겐조에겐 일이 아닌 다른곳에 시선을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나자신과 주변인들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마다에게 빚진게 없다는 사실과 자신이 돈을줘야할 이유가 없다는걸 알게된다. 겐조는 양부와 인연을 끊고, 아내와의 심리적 거리감도 좁혀가기로 다짐한다. 겐조는 양부와의 악연으로 인해 과거의 아픈기억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잠시 한눈팔기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게된다. 문제도 해결해 나가게된다. 고전이란 의미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한눈팔기'가 고전인 이유는 현시대 또한 과거의 아픔을 안고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자신을 돌보지 못할때, 과거의 악령은 현실에 나타난다. 그리고 내안의 어둠을 먹고 자라나 내인생을 갉아먹는다. 그때 필요한건 잠시 '다른곳에 시선두기(한눈팔기)'가 필요한거 같다. 내안의 어둠을 마주하는 습관은 두려움이 아니라 성찰의 습관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헨리 제임스의 딱딱하지만 진지한 소설을 읽었다. 진지한 소설인 이유는 결혼을 둘러싼 사람의 감정과 심리를 심도 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성격과 개성이 강해서 하나의 재즈를 보는것 같았다. 뉴욕에서 의사일을 하고있는 슬로퍼씨는 모든일에 깐깐하다. 그는 병자에 있어서도 현실적이며 깐깐하지만 배우자를 고르는 일에도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아내를 만났지만, 아내와 아들은 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에겐 딸 캐서린만 남게 되었다. 19세기 미국답게 아들을 원하는 그였지만 캐서린이라도 잘키우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백만장자 상속녀인 캐서린앞에 모리스라는 젊은 청년이 나타나게 된다. 모리스는 뛰어난 언변과 잘생긴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하지만 직업도 없이 30대인 모리스를 슬로퍼씨는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캐서린과 모리스의 사랑은 깊어져만 간다. 슬로퍼씨는 그런 딸이 못마땅하고 딸을 과소평가하며 바보취급하기 시작한다. 슬로퍼씨는 둘을 떼어놓기위해 딸과함께 해외여행을 가게된다. 그리고 모리스와 결혼할시에 유산은 물려줄수 없다고 이야기를 한다. 마음이 중요하다 생각한 캐서린은 출국후 모리스에게 사실을 말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이 불안하며 금전적인면이 중요한 모리스는 캐서린을 떠나게 된다. 몇년후 슬로퍼씨는 사망하게 된다. 어느날 캐서린을 다시찾아온 모리스는 그녀에게 다시 청혼하게 된다. 캐서린은 아버지에게도 모리스에게도 상처받은 과거가 있기때문에 청혼을 거절한다. 그리고 워싱턴스퀘어에서 캐서린은 평생을 뜨개질을 하며 보내게된다. 만약 슬로퍼씨가 좀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졌더라면, 캐서린이 마음을 확실하게 잡고 도움을 구했더라면, 모리스가금전적으로 부유했다면, 캐서린의 고모인 라비니아가 현명했다면 사건은 변했을 것이다. 세상일은 뜻대로 안되며 어긋남을 원칙으로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인물들은 단점들이 명확하다. 그리고 그런 단점들이 사건을 악화시키며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일이 뜻대로 되지않음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래서 진지한면이 많은 소설이었다. 워싱턴스퀘어는 현실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인물들 모두가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20세기에도 볼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식의 결혼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부모나 황금만능주의 돈으로 인해 헤어지고 사귀게 되는 인물들. 지금 시대에도 볼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를들면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결혼시장에 관심을 가질수 밖에없다. 그리고 결혼에 필요한 자금은 과거나 지금이나 많이 들어간다. 아버지는 사위될 사람의 능력과 재산의 유무에 집중할수 밖에없다. 나는 이책을 읽으며 중요한 사실은 불변하지 않는다는점을 알게되었다. 개인적으로 캐서린이 안타까웠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도 좋은딸이 되지못했고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갔다. 그래서 영혼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녀가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좀더 자기주장을 펼쳤을것이다. 부모님의 말이 절대적이고 여성으로써 남성에게 순종적으로 보여야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19세기의 사회상을 헨리 제임스가 설명한거 같아 더 안타까웠다. 당시에는 30대만 되어도 늦는결혼 소리를 들었을것이다. 좀더 그녀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들었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아버지와 모리스에게 해방된 인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가 워싱턴스퀘어에 남아 쓸쓸히 여생을 보내는 것으론 그녀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것이다. 아버지의 모욕과 사랑의 배신으로부터. 하지만 마음한편으로는 이소설은 어떠한 주장을 담고있지 않는다고 생각든다. 결혼에 있어서 돈과 능력은 중요하고 의사인 슬로퍼씨가 바라본 세상은 정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소설이 하나의 재즈와 같이 증흑적이며 어떠한 주제를 담고 있지 않다고 생각들었다. 나중에 한번더 읽게되면 색다른걸 느낄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책의 표지가 아주 인상적이다. 사람의 얼굴을 지도에 빗대 불에타 없어져가는 모습. 지도란 개인의 모든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것은 하나의 지도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빌딩숲에 사는 현대인. 그리고 빌딩처럼 복잡한 지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나는 복잡한 지도속에서 길을 잃고 모든 지도를 불태워 버린채 또다른 내가 되곤한다. 그는 흥신소 직원이다. 그리고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게된다. 남편의 이름은 네무로 히로시. 남편의 아내를 찾아가지만 단서는 성냥뿐이다. 마치 지도는 불타버리고 무의미한 성냥만 남은것처럼. 그는 사건을 의뢰한 아내의 동생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많은것을 숨기며 알려주지 않는 동생.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지도가 복잡한 빌딩을 이루듯이 사건은 더욱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어느날 그와 동생은 괴한의 습격을 받게되고 동생은 살해당한다. 그는 실종자의 부하직원인 다시로를 만나 증거자료 들을 모은다. 하지만 증거자료는 전부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다시로는 사실을 말하게되고 자기변호를 하지만 그는 냉담하다. 그리고 죄책감과 압박감에 다시로는 자살해 버리게 된다. 결국 그는 흥신소의 일을 그만두게 되고 유일한 단서인 커피점 동백을 찾게된다. 그곳에서 그는 의문의 폭행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기억상실에 걸려 자기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실종자가 된다.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고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가야하는 그. 복잡한 지도속에서 길을 잃고 모든 지도를 불태워 버린채 다른 삶을 살게된다. 남편은 증발해 버렸다. 스스로의 지도에서 헤메인채 실종자가 되어버렸다. 현실이라는 곳에서 목적을 잃은채 현실을 탈출한 사람. 소설의 후미에 자살한 것으로 나오지만 삶으로의 도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의 실종에 무관심하다. 목적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다. 굳이 증발되어 버린 남편을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현실은 미궁이란 이름의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내는 목적과 의지를 잃어버렸다. 아내의 동생은 목적과 의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살해당해 버린다. 진리를 찾아헤메는 사람은 언젠가 결과에 맞닿게 된다. 다시로는 현실의 압박감과 괴로움에 자살이라는 도피처로 뛰어든다. 그리고 주인공은 기억상실증에 걸려 지도가 불타버린채 새로운 삶을 살게된다. 마치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가듯이.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독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3인칭 서술이 아닌 1인칭 서술로 써서 마치 독자가 겪는 일처럼 표현하였다. 즉 작가는 사람이란 기존의 지도를 불태우며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나가야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잘생각해보면 하나의 교훈소설 같아보인다. 독자에게 전하는. 나또한 기존의 지도를 불태우며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나가야 했다. 고등학교 때가 그랬으며 30대인 현재가 그러했다. 최근들어선 절친이 4년전 갑자기 행방불명된채 연락이 끊어졌고, 대신에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게 됐다. 현실에서의 지도란 이렇게 불태워진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과정이 무한으로 반복되어야 진실된 나에게 맞닿을 것이다. 소설에서 혼돈은 새로운 충돌을 만들고 모든것을 불태운다. 그리고 모든것은 나를 중심으로 재생성된다. 물론 재성성의 주체는 나이다. 불태워진 지도앞에 보인 나의모습은 뿌연담배 연기처럼 희미한것이 아니다. 공(비어있음)이란 사라짐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장 그르니에의 ‘공의매혹’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