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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비밀 -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노래, 희랍 비극 읽기 ㅣ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4
강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평점 :
비극이 있는 곳에 희극이 있다. 희극이 있으므로 비극은 가능하다. 희비가 교차하는 곳이 삶이다. 흐르는 물이 멈출 줄을 모르듯이, 감정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고, 유역(流易)하며 굽이친다. 때로는 미친 듯이 환호하다가 세상 다 잃은 사람처럼 금방 풀이 죽는 것이 사람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다, 라는 말로는 모자란다. 수증기처럼, 감정은 액체보다는 기체에 더 가깝다. 손에 잡히지 않는 공기를 '변한다'라고는 할 수 있으나, '변했다'라고는 할 수 없다. 과거형으로는 현재진행형 문장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감정을 거느린다. 그리스 고대 비극이 지금도 현대인에게 '먹히는' 이유이다.
먹히는 이야기를 그러나 '모두가' 먹을 수는 없다. 그러다 입맛만 버렸다고 나처럼 욕한다. 음식에 격이 있다면 이야기에도 격이 있으므로, 손님과 난해한(?) 음식 사이의 간극을 줄여주는 요리사는 격식 있는 요리사일 테다. 여기 그 요리사가 써 놓은 '음식 먹는 방법'이 있다. 책의 제목은 <비극의 비밀>. 비밀치고는 너무 쉽고 친절하게 설명이 잘 돼있어서 비밀보다 비전vision에 가까워 보이지만, 책이 쉽고 친절하다는 게 작가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비전은 영어로 시각이다. 저자가 건네주는 광학렌즈로 고대의 원형극장을 잠시 들여다보자.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 시작되는 지점은 주인공의 희비극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테베이의 최정점에 있던 오이디푸스가 결국 국외 추방자로 전락할 때까지, 운명은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며 그의 전부를 앗아간다. 어머니이자 아내였던 이오카스테의 자결, 모든 것을 ‘보는’ 왕좌에서 장님의 자리로의 추락, 그는 마침내 어머니의 브로치로 제 눈을 찌른다. 그러나 그는 몰라서 패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 알아서, 다 알았기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 왕좌에 오를 수 있었던 자신의 명민함이 그를 파멸로 떠밀었던 것이다. 이 비극적 아이러니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음식은 요리사의 소유물만은 아니다. 때로 음식은 먹는 자의 것이기도 하다. 음식을 텍스트로 비유했을 때 독자는 음식을 먹는 손님일 것이다. 그러므로 손님으로서 짧은 사견을 덧붙이자면, 나는 이 음식(비극)의 비밀이 ‘예측불가능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테레시아스의 예언,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의 운명이 그를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운명을 예측하고 예단(豫斷)했던 자만심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라고.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가? 아가멤논도 그랬고 클뤼타임네스트라도 그랬다. 사랑은 고통의 승화이고 고통은 사랑을 빈자리로 초대한다. 그들에게 생은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이었다. 그로부터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생은 비선형적이며 혼란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절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희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듯이.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고, 희망 있는 곳에 절망이 있다. 음식을 먹었으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리는 걸어야 한다. 희비극이 교차하는 삶이라는 무대에서, 오이디푸스처럼 끝내, 견뎌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