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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보이
무라이 사다유키 지음, 조은경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2005년 국내에도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스팀보이'의 소설판.
애니메이션 명감독 중 하나로 거론되는 '오토모 카츠히로'의 작품으로
한창 증기기관,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스팀펑크를 좋아하던 당시
아주 좋아해서 몇 번이고 돌려봤던 작품.
그래서 소설판도 꼭 구하고 싶었는데 중고도서로 겨우 구해서 읽었다.
간단하게, 좋았던 점과 아쉬웠던 점으로 나눠서 설명하자면,
우선 좋았던 점은,
1. 영상물의 소설화답게 영상으론 알기 힘든 인물의 심리를 알 수 있었다.
영상물에서 인물이 말하지 않고 잠깐 사색에 잠겨 있는 장면이 있으면
우리는 그 감정을 명확히 알기 힘들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설인 덕분에
인물이 그 장면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영상으로 봤을 때는 '얘가 왜 이랬지?' 싶은 상황도
이 책으로 보면 바로 납득이 가고 '아, 그 때 이런 생각이었구나'하면서
각 인물의 행동이 당위성과 인과성이 있다는 걸 납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장점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주인공 '스칼렛'.
영화만 본 입장에선 남자 주인공 '레이'와 여자 주인공 '스칼렛' 둘 사이에
사랑이 싹텄다는 걸 그렇게 느껴보지 못했었는데,
책으로 읽어보니 확실히 둘 사이에 사랑의 감정이 꽃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2년 전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둘이 묘하게 잘 어울려서 좋네 ㅎㅎ
2. 영화에는 안 보여줬던 배경이나 상황, 심리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적에게 쫓기면서 도망칠 때 집이 엉망진창이 된다.
영화에선 주인공이 그 집을 도망치고 그대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그 후 집이 어떻게 됐는지 나오지 않는데, 이 소설판에선
집이 무너지고 아들이 쫓기는 상황에 좌절한 엄마의 심정을 묘사한다든가 하면서
영화에선 보여주지 못한 부분을 보여준다.
또한 세계 각국 정상들이 신무기를 구매하기 위해 찾아오는 장면이 있는데,
영상만 봤을 땐 그저 '신무기가 탐나서 왔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선 역사적으로 그 국가들이 전쟁 중인 상태여서
무기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덧붙어져 있어서 아주 좋았다.
3. 고증이 철저하다.
이 책을 쓴 작가가 원래 소설가가 아니라 각본가라고 한다.
그것도 이 '스팀보이' 영화 각본을 감독과 함께 쓴 사람!
그래서인지 영화를 제작할 때의 참고 자료를 이 소설에도 낱낱이 보여주는데,
그게 무척 자세하다. 영국의 템즈 강이 산업혁명 이후 악취가 풍겼다는 설명에서부터,
증기기관의 구조와 개발 역사, '치와와'라는 품종이 막 생겨난 시대라서
주인공이 치와와를 보고 이상하게 생긴 강아지라고 생각한다거나,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아직 1차 세계대전 조차 일어나지 않은 때라서
해군 장관이란 사람이 '전쟁은 기계로 하는 게 아니다'라는,
지금 시점으로 보면 무척 구시대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난, 이 작품 배경이 1차 세계대전 이전이라는 걸 이걸 읽고 나서야 알았다...
물론, 1차 세계대전 이전이라 'MKⅠ'은 물론 '르노 FT-17'도 없던 마당에
무한궤도 포탑 전차가 달리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애당초 '스팀펑크' 세계관이니 현실과 비슷하지만 다른 세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4. 추억팔이
2005년에 이 작품을 보고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돌려봤는데,
그것이 12년이 지난 2017년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서 12년 전에 본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심지어는 그 장면에 울리던 배경음악, 성우들의 목소리까지도 떠올라서
읽는 내내 너무 즐거웠다 ㅎㅎ 스팀보이 블루레이가 품절이던데,
조만간 회원중고로 구매해서 오랜만에 다시 봐야 겠다 ㅎㅎ
하지만...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도 많았다.
이를테면,
1. 단순한 묘사
이 작품은 소설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묘사가 너무 단순하다...;;
아까 위에선 '이 책을 쓴 사람이 원작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이라 고증이 철저하다'
라고 했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각본을 쓴 사람이 자기 각본에 약간 서술을 덧붙인 건지,
묘사가 너무 단순하다. 물론 아주 형편없다거나 이미지가 머리에 안 그려지는 건 아니다.
문제는, 영화 속 장면의 임팩트나 디테일을 생각하면
묘사가 너무 흐지부지한 느낌이 있다는 것.
또한 증기기관이 움직일 때 '쉬익! 푸슉! 딸까닥!' 하는 효과음을
이따금씩 써놓아서 뭔가 동화책 같은 어린이 도서를 읽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이게 꼭 단점은 아닌 것이,
묘사가 단순한 덕분에 글을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역시 영화의 임팩트와 디테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아쉬운 부분이다...
2. 고증 설명과 글의 부조화
단점 1번에도 언급했지만,
아까 위에선 '이 책을 쓴 사람이 원작 영화의 각본을 쓴 사람이라 고증이 철저하다'
라고 했었는데, 그게 또 문제다...;;
작가가 각본을 써놓은 것을 소설 문체로 옮겨 적고,
거기에 고증 설명을 덧붙인 것 같은데,
이게 너무 부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인물이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갑자기 일시정지를 해놓고
증기기관의 탄생과 이를 발전시킨 역사적인 인물들과 그들의 업적을 설명한다거나,
박람회 전시장이 유리로 뒤덮인 걸 묘사하다가
'쇼 윈도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거나...
전체적으로 이 소설은, 작가가 서술자라기보단 '해설자'에 가깝다.
그래서 보통 소설처럼 자연스럽지가 않고 갑자기 튀어나와서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을 해대기 때문에 부자연스럽다...
3. 대사
인물의 대사에 여러 문제가 있는데,
우선 첫 째로, 각 대사를 누가 말했는지 가끔 알 수 없는 장면이 많다.
'~가 말했다'라는 서술이 없이 그냥 대사만 덩그러니 써놓아서
두 세 줄 정도 이어진 대사를 쭉 읽다가
'아, 이 대사는 아빠, 이 대사는 스칼렛, 이 대사는 할아버지 대사구나'
하고 나중에야 이해해야 한다... 그게 은근 불편하다.
뿐만 아니라 대사가 대부분 마침표로 끝나는 식이라서
영화 속 성우들의 연기를 생각하면 대사의 임팩트가 너무 떨어진다.
느낌표나 말줄임표를 적절히만 활용해도 어느 정도 임팩트를 줄 수 있었을텐데
이 부분이 왠지 아쉽다.
4. 번역
'스팀보이' 영화가 국내 개봉한 것은 2005년 8월.
이 소설판이 출간된 것도 2005년 8월.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보통 영화의 소설판이나, 영화의 원작 소설이 있으면
출판사들은 영화 개봉 시기에 가깝게 출판하려고 다급히 번역한다.
(영화의 열기가 식은 뒤에 책이 나와버리면 아무도 안 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번역 질보다는 번역 속도에 초점을 둬서, 번역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트와일라잇, 메이즈 러너 등의 소설이 이 피해를 입어서 번역이 엉망이란 혹평이 있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영화 개봉에 맞춰 출간된 탓에 번역이 다소 아쉬운 구석이 있다.
아예 못 읽어줄 정도는 아니지만, 문제는 일본식 표현을 그대로 직역한 부분이 많아서
대사가 부자연스럽게 읽힌다는 것.
5. 스토리가 영화와 너무 비슷하다
난 이 책을 통해서, 영화를 볼 땐 몰랐던 인물의 심리를 알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 편으로 아쉬운 건 너무 영화와 비슷하게 전개된다는 것.
그래서 장면 전환도 정말 영화와 비슷하게 휙휙 바뀌는데
문단으로 이걸 분리해놓지도 않아서 내가 읽는 부분의 배경이 어딘지,
지금 대사를 말하는 게 아빠인지 아들인지 할아버지인지도 잠깐 헷갈린다...
그리고 좋았던 점 2번에선, 영화에서 못 본 심리나 상황을 보여준다며 좋아했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나무위키'에 가보면, 이 소설판에는 영화에 없는 장면이 많아서
이걸 그대로 영상화하려면 2시간 30분 ~ 3시간 정도의 분량이 나올 거란 말이 있다.
하지만 막상 이걸 읽어보니 그게 과장이란 걸 알게 됐다...
이 책에는 영화에 없는 장면이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앞부분에 그나마 할아버지, 아버지의 과거를 보여주는 씬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앞부분 뿐이고, 나머지는 그냥 영화 장면을 그대로 글로 옮겨 적은 것에
인물 심리나 생각을 덧붙여놓았을 뿐이다. 모처럼 읽는 거,
몰랐던 장면을 더 보고 싶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덜해서 아쉬웠다.
정리하자면, 영화만으론 알기 힘든 인물의 심리나 정황, 시대 설정과 역사 자료 등을
알 수 있어서 책으로 보면 확실히 좋긴 하나,
정작 고증 설명이 너무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오고, 대사 번역도 뭔가 어색하고
그 대사를 누가 말했는지도 알기 힘들고, 묘사도 단순한,
'책'의 존재 의의는 있으나 '글'로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는 작품이다.
뭐,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단점들을 모두 무시하고 12년만에 스팀보이를
본 것이 너무 반가웠기 때문에 별점은 1점 정도만 깎고 4점을 줬다.
혹시 나 처럼 '스팀보이'를 좋아해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면
한 번쯤 볼만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