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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수장룡의 날
이누이 로쿠로 지음, 김윤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이라서 추리 소설인가 싶지만, 일단 아니다.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순정만화 만화가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
하지만 그녀에겐, 자살 실패 후 식물인간이 돼버린 남동생이 있다.
그런데 이 작품 속 세계에는 사람들의 정신을 기계로 연결해서
타인의 정신 세계에 들어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주인공은 식물인간이 된 남동생이 왜 자살을 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정기적으로 남동생의 머릿속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러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작품 속의 주된 내용.
다만 초반에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는 분위기라서 이러한 SF소재가 나오기 전 까진 분위기를 알기가 힘들다.
(참고로 본인은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제목, 표지 그림, 뒷표지에 적힌 '끝나는 순간', '권총'이라는 단어만 보고
"소녀와 함께 등대 섬에 살고 있는 거의 죽어가는 노인이 있는데,
어느 날 주인공 청년이 이 섬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미스테리인가?"라고 단단히 착각했었다...)
'옛날엔 나무 껍질을 썼는데. 지금은 청산가리를 쓴다. 그 편이 수고가 덜 든다'
작품 첫 문구가 대략 이런 식이다.
내가 여태 본 작품에선 '청산가리'가 악명높은 독극물인지라,
담담하게 청산가리를 편한 물건으로 여기는 저 문장을 읽고
콩알탄 터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순간적으로 몰입,
주인공의 직업이 만화가인데 만화 작업 환경에 대한 설명이
여태 '바쿠만', '중쇄를 찍자', 그리고 수많은 단행본에 수록된 작가들의
작품 제작 과정에서 읽어온 설명과 비슷한 구석이 많아서
친숙한 기분을 느끼며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출간된지 몇 년이 지나서, 아직도 띠지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띠지에는 이 작품을 홍보하는 문구로 '인셉션'을 언급한다.
그리고 읽어보면, 과연 제대로 된 단어 선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이 동생 의식 속 세계로 들어갔을 때 펼쳐지는 광경은
30년 전 여행 떠났던 배, 10년 전에 살던 집으로 휙휙 바뀌기도 하고,
식물인간으로 병원에 누워 있을 남동생이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대화를 나눈다든가,
유리창이 깨지면서 집 안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온 후
그 속에서 수장룡이 헤엄친다든가 하는 식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다.
(그래서 괜히 이 책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볼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미 영화화는 됐다더라. 그래도 역시 분위기와 소재 덕인지 애니메이션으로 보고싶다.
'파프리카'처럼.)
작품 분위기는 일단 '스릴러'... 라고 하긴 애매하다.
사악한 음모가 벌어진다거나, 누굴 죽고 죽인다거나,
뭘 하지 않으면 누가 죽는다거나... 뭐 그런 긴장감 있는 전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심하거나 긴장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동생이 왜 자살했는지 알아내기 위해 정신 세계로 들어간 후
동생과 대화를 나눌 때면 항상 의문만 남고,
그 외에 이런 저런 일이 벌어지면서
진실과 해답을 알아내기 위해 계속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되고,
중간 중간에 반전이나 충격이 이따금씩 나타난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전체적인 분위기가 '스릴러'라고 단정짓긴 어렵다...
그래서 반전이 확! 헉! 펑! 쿵! 빠밤! 쨍그랑! 하고 나타난다기보단
'기승전결'의 '전'과 '결' 사이에 살며시 고개를 들고 다가오는 느낌? 이고,
아직 해소되지 않은 몇몇 의문들을 그냥 놔둔 채
(물론 그 의문들의 해답은 얼추 암시가 나오긴 한다만...)
여운을 남기는 식으로 결말이 나버려서
보통 스릴러나 추리물처럼 의문을 모두 해소하고 끝내는 엔딩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난 후기에 스포일러를 쓰지 않으므로 더 이상 설명하기 뭣하지만
결론은, 이 작품은 일단 재밌다.
다만 죽음과 음모, 배신 등이 가득한 그런 스릴러나 미스테리는 아니고
모호한 분위기로 막을 내리기 때문에 깔끔한 결말만을 원하는 독자라면
피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아, 추가로, 작품 소재에 SF가 들어가다보니 의학적, 과학적 설명이
중간 중간에 인물을 통해서 자꾸 나타나는데... 이게 제법 머리가 아프다...ㅋ
머리가 아픈 건 둘째치고, 한 번 설명을 시작하면 계속 쏟아져 나와서
문득 '작가가 사전조사를 잘 한 건 알겠는데,
자기가 조사한 정보를 너무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그 불편함을 거의 잊어버린 걸 보면
그렇게 큰 단점도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