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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에서 개가 튀어나올 때 ㅣ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브라이언 코나한 지음, 김인경 옮김 / 책과콩나무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다.
물론 책 소개에는
"투렛 증후군이 있어 특수학교에 다니는 열여섯 살 남자아이 딜런 민트.
설상가상으로, 딜런은 정밀 검사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7개월 뒤에 죽게 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를 듣는다.
그래서 딜런은 ‘죽기 전에 해야 할 멋진 일들’ 목록을 만든다.
그 목록의 첫 번째는 바로, 좋아하는 미셸 몰리이와 성관계 갖기……. "
이렇게 심각한 듯하면서도 웃기게 설명돼 있고
표지와 제목도 마치 90년대 가족영화 포스터를 보는 듯해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소년의 분투를 담은 좌충우돌 코믹 드라마'
같은 느낌을 기대하기 쉽다.
하지만 아니다.
주인공이 투렛 증후군을 앓는 것은 맞고,
자신의 수명이 얼마 안 남았음을 깨닫고 버킷리스트를 짜는 것도 맞다.
그 첫 소원이 '좋아하는 여성과 성관계를 갖기'란 것도.
하지만 번역자와 출판사에서 말하는 느낌과 달리,
그 이야기가 썩 밝거나 유쾌하게 흘러가진 않는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군복무 탓에 집을 비웠는데
엄마는 그 사이 외간남자와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그 모습을 본 주인공은 낯선 남자가 아빠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에 분노,
이로 인해 엄마와 갈등한다.
집안 사정이 이런데 바깥 사정도 어둡긴 마찬가지다.
주인공의 단짝 친구는 파키스탄 출신이라 인종차별자들 사이에서
항상 놀림감이 되기 일쑤, 주인공 본인도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불량배들에게 욕설을 듣고 괴롭힘을 당한다.
첫 번째 소원이라는 '좋아하는 여자와 성관계 갖기'를 시도하려고
그 여자아이에게 접근하면 매번 차갑게 무시당해서
자신은 전혀 그 여자의 상대가 되지 않는 한심한 녀석임을 깨달으며 찌그러지고...
모두 현실적이고 쓸쓸하기만 하다.
심지어 주인공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그렇게 많지도 않다.
겨우 셋 뿐이다.
1. 좋아하는 여자와 사귀는 것
2. 파키스탄 출신이라 무시당하는 친구를 인기있게 만들어주는 것
3. 자신이 죽기 전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
나는 좀 더 기상천외하고 별난 소원을 한 100개 정도 만들어서
그것을 이뤄 나가는 과정을 다룰 줄 알았다.
그런 내용이라면 충분히 유쾌할테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위의 세 가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멸시받는 친구를 도와주고,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루기 힘든 세 가지가 전부다.
그게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비행기를 타고 싶다거나, 즐겨보던 TV 퀴즈쇼에 출연하고 싶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저 단순하면서 가까운 세 가지를 이루고 싶은데, 그것마저 이루지 못해 좌절하고...
그러는 사이 엄마는 외간남자와 계속 가까워지고...
참으로 슬프기 그지없는, 한 소년의 비애가 담긴 내용이다.
뒷부분에 가선 분위기가 밝아지긴 하는데
그것도 4분의 3을 넘긴 정도가 돼서야 그렇다.
그런데 그 뒷부분도 사실 문제가 하나 있다.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뒷내용을 언급하진 않겠지만, 이 사실 하나는 밝혀야 겠다.)
'너무 갑자기 밝아진다'라는 것.
앞부분에선 노력들이 그렇게 쉽게 좌절되는데,
뒤에 가서는 갈등이 너무 갑자기 전부 해결된 듯이 순탄하기만 하다.
그것도 앞 장에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뒤에서 일이 잘 풀린 게 아니라
앞에서의 노력은 별 영향이 없었고 그냥 뒤에서 갑자기 잘 된 느낌...
해피엔딩이라 다행이긴 한데, 너무 억지스러운 느낌이라 당황했다.
마치 시체 그림 위에 물감을 덧칠해 꽃밭을 그려놓은 듯한 부자연스러움이랄까...
내용 얘기는 이쯤 해두고 번역 쪽으로 몇 마디 하자면,
일단 욕설이 난무하는 작품답게 욕 번역은 잘 돼 있다.
다만 어떤 욕은 자연스러운데, 어떤 욕은 부자연스럽다.
'염병 엄청나다' 처럼, 현실에선 들어본 적도 없는 감탄사 욕이 그렇다...
(대체 원문이 뭔지 모르겠으나, 이 소설에선 '염병'이란 말이 꽤 많이 쓰인다)
그리고 '헐!' '여신강림' 등등... 나름 10대 수준에 맞는 표현을 써서
독자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시도를 볼 수 있는데,
아쉽게도 이 부분이 좀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지금 읽어도 부자연스러운데 5, 10년 지나서 읽어보면 어떨지...
당장 만화를 번역할 때도 유행어나 채팅용어를 쓰면
'이런 건 몇 년 지나면 촌스러워진다'고 지탄을 받는데
이 소설도 그 길을 피하긴 힘들 듯하다...
결론은,
번역은 나름 자연스러우나 몇몇 표현이나 용어는 부자연스러움.
출판사와 역자는 작품을 유쾌하다 소개하고 있으나
실제론 쓸쓸하고 암울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갑자기 밝아지는 느낌.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긴 했으나,
역시 너무 갑자기 밝게 끝나는 결말이 영 내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