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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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권의 시작은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동맹군과의 전쟁 후를 다룬다. 동맹의 중심에 있던 밀라노 측에 남은 자치도시는 알레산드리아, 피아첸차, 브레시아, 볼로냐까지 4개뿐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완전히 백기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코르테누오바 전투에서 5천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남은 병력은 여전히 1만 3천 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전히 자치도시(코무네)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들은 강력한 황제의 권한에 도전했고, 봉건시대의 지방자치권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다. 이는 황제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북부 이탈리아까지 포함한 자신의 제국, 즉 신성로마제국을 정치, 외교, 군사, 사법, 경제까지 아울러 황제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는, 법에 근거한 중앙집권국가로 바꾸겠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 p26 


 프리드리히 황제는 반 황제 연합군 중의 하나인 브레시아 지역을 공격했으나, 몇 개월의 성공방전을 치르고 함락하지 못했다. 그가 승리를 하지 못하자 교황청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황은 태양, 황제는 달’이라고 믿는 교황 그레고리는 프리드리히 2세를 2번이나 파문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표면적으로는 그가 ‘이단’이라는 것이다. 사실 프리드리히 황제는 이슬람인과도 잘 어울렸고, 이들을 자신의 호위병사로 두었다. 이슬람인도 자신을 보호해주는 황제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충성을 다했다. 이는 그가 어릴 적 시칠리아 섬에서 많은 아랍인들을 만나면서 편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뛰어난 외교술과 이슬람인과의 친화력을 잘 활용한 것이 바로 6번째 십자군 원정이었다. 그는 무력보다는 외교를 통해서 예루살렘을 다시 그리스도교의 품에 안겨주었다. 이는 그전에 수많은 왕들이 하지 못했던 일이다. 참고로 7번째 십자가 원정을 간 프랑스의 루이왕은 왕을 포함해서 전군 2만 5천명이 포로가 되고,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만큼 십자가 원정은 힘든 여정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6번째 십자군 원정을 가는 도중에 두 번째 파문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수행하던 템플, 병원, 튜턴 기사단은 교황의 말을 따르지 않고 황제와 함께 했다. 


 “프리드리히가 이끌고 출발한 제6차 십자군은 군을 이끄는 황제부터 그를 따르는 베라르도 이하 참가자 전원이 파문당하는 기묘한 십자군이 되었다.” - p110 


 이런 표면적으로 ‘이단’이라는 것 외에 파문을 한 더 큰 이유는 자신에게 불손하다는 것이었다. 황제는 교황의 밑에 있다고 믿었던 것이 그 당시 중세시대 사고방식이었다. 황제는 현세를 책임지지만, 교황은 더 중요한 내세를 책임지기 때문에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절대 굴하지 않았다. 세 번째 파문을 당했을 때는 반박문을 써서 전국에 마을에 모두 돌려서 사람들이 직접 보도록 했다. 이쯤 되니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추기경들도 교황이 너무 심하게 권한을 남용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프리드리히 황제가 45세, 그레고리 교황이 70세가 되었을 때다.


 “교황 그레고리우스가 보기에는 프리드리히는 완벽한 이단자고, 그런 그를 배척하는 일은 공의회에서 토론할 가치가 있는 의제다.” - p57 


 프리드리히는 북부 이탈리아 일부 자치도시 코무네의 반란, 교황과의 갈등에 의한 세 번째 파문 등으로 어려움에 쳐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 때의 프리드리히를 ‘교향악의 지휘자’로 묘사할 정도로 이 황제는 안과 밖을 모두 잘 조율했다. 


 우선 자신의 아들과 심복들도 북부 독일과 남부 이탈리아를 관리, 감독했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통해서 외부의 침략을 막았다. 또한 술탄인 알 카밀이 죽자, 그의 아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루살렘의 통치를 10년 더 연장시켰다. 그의 뛰어난 외교술과 용인술이 또 한 번 빛을 발한 순간이다. 


 그는 결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자신의 정적들의 목줄을 죄었다. 황제는 교황이 그를 축출하기 위해서 소집한 공인회를 무산시켰다. 거기에 참석하기로 한 성직자들을 모두 바다에서 납치한 것이다. 이를 멜로리아 해전이라고 한다. 이어서 그는 대담하게도 교황이 다스리는 영지에 군대를 이끌고 접근했다. 실제 공격을 한 것은 아니지만 위협이 되기에 충분했다. 궁지에 몰린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황제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교황 인토켄티우스 4세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고, 그와 미팅을 잡은 뒤에 도망쳤다. 그리고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 


 교황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통해서 그가 얻으려고 한 것은 하나였다. 성직자들은 영혼의 구제에 충실하면 되고, 세속 통치자들은 현재의 육신의 구제하면 된다는 것이다. 즉 각자가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서로 간섭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한 마디로 교황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대한 반발이다. 


 그가 추구한 것은 결국 법치에 기반한 평화로운 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래서 국립학교를 세우고, 법률을 재정비하고,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포용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서 암흑의 중세기는 종말을 고하고, 르네상스 시대로 더 빨리 이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황제 프리드리히가 목표로 한 것은 법에 근거한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운 국가의 건설이다. 거기에는 성직자보다 ‘배움’이 없는 제후를 비롯한 일반 세속인들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 p156 

 

 그는 신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황제다. 시오노 나나미 작가가 왜 프리드리히 2세에 매력을 느꼈는지 알 것 같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양의 과거 통치자 중에서 과연 이렇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에는 세종대왕 정도이지 않을까? 


 이 책은 서양 역사, 리더십 등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다.  


 - 한 줄 요약 : 프리드리히 2세의 교황과 갈등, 신성로마제국의 강력한 통치, 법률화 등 업적을 다룬다. 

 - 생각과 실행 : 프리드리히 2세는 법치에 대한 열의, 자신이 믿는 소신을 지키는 용기, 공정함, 지적 탐구심 등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무력보다는 주로 외교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마음, 그리고 다양한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마음을 끌어들였다. 기존의 잘못된 관습에 도전하는 그의 열정도 배울 만 하다. 


 * 이번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으로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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