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 臣下
류기성 지음 / 바른북스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류자광이라는 인물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조선 초기 가장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를 소설의 형식을 빌려서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를 묘사했다. 소설의 시작은 노년에 유배지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류자광의 소회로부터 시작한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왕을 위해 나의 모든 삶을 바쳤는가?” 


그는 세종 21년 1439년에 남원에 출생해서 중종 7년 1512년, 강원도 평해 유배 중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궁궐을 지키는 내금위 병사인 ‘갑사’로 궁에 입궐했다. 그만큼 인물과 무예가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의 가장 큰 공적 중의 하나는 함경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 이시애의 난을 빨리 제압 못하자, 바로 세조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그는 속전속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자신이 300명의 병사만 있으면 난을 진압할 수 있다고 호언했다. 이는 그의 목숨을 건 큰 도박이었다. 갑사, 서자 출신에 감히 왕에게 이런 대담한 제안을 올릴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세조는 그를 신임하고, 계책을 받아들여서, 난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이등 공신이 되었으며 왕의 경호관이면서 정3품인 ‘병조참의’에 올랐다. 그것도 과거 시험도 없이 오른 파격 인사였다. 당연히 신하들의 불만은 컸다. 이에 세조는 온양온천에 쉬러갈 때, 별시를 치러서 류자광이 시험을 보게 했다. 시험관인 신숙주는 오타가 있다는 이유로 그를 제외하고자 했으나, 세조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그를 장원에 앉혔다.


이렇게 왕의 무한 신뢰에 류자광은 충성을 맹세하면서 최선을 다했다. 이후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서 1등 공신, 무령군에 임명되었다. 또한 그는 성종이 19세가 되면서 그녀의 어머니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끝내려는 것을 한명회가 반대를 하자 세력가인 그를 탄핵했다. 이 또한 자신의 목숨을 건 행위였으나, 그의 충심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결국 파직을 면하지 못했고, 그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입을 가진 신하로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없다면 올바른 신하가 아니다.” - p136


물론 경호실장의 위치로서 정치에 관여한 것은 다분히 월권 행위였기 때문에, 성종은 그의 충심을 높이 샀지만 그를 성토하는 무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파직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성조는 곧 그를 도총관(정2품, 무관의 최고 높은 지위)으로 임명했다. 그런데, 또다시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그도 다른 사건에 연루되면서, 결국 부산 동래로 유배를 떠나고, 이후 고향인 남원으로 다시 유배지를 옮기면서 7년간의 유배 생활을 했다. 


그는 다시 복권을 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에 사신으로 2차례 다녀오고, 명나라의 국경에서 견고한 성을 본 후 우리나라 국경에도 성을 축성해서 오랑캐의 침입을 대비해야 된다고 주청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또다시 사대부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평화로운 세상에 왜 백성들을 괴롭게 하냐는 논리였다. 사대부들의 논리도 말은 됐으나, 자주국방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결국 왕의 명으로 성을 짓게 되었고, 사대부들의 그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다. 


이후 황해도 감사 등을 거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는 등, 공을 세우면서 기존 종1품 숭정대부 지중추부사에 더해 장악원 제조도 맡았다. 이렇게 성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지만, 어머님이 떠나신 후 얼마 안 있어 성종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모친상을 치르고 나니 58세였는데, 연산군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연산군도 그를 신임해서 옆에 두려고 했으나,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사건을 알게 된 이후 점차 폭주하게 되자, 결국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후 중종 반정을 묵인하고, 그의 이전 부하들이 반정을 주도한 가운데, 다시 반정의 공신이 되었다. 


그는 당시 신진 사대부인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특히 그가 서얼이고 무인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준 것 같다. 또한 폐비 윤씨 사건이 연산군에게 알려진 계기가 결국 김종직 문하의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사초에 ‘조의제문’ 내용을 넣은 것이 문제가 되어서 이것을 왕에게 알린 것 때문이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의제를 조상하는 글인데, 이는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글이었다. 


당시 류자광은 실록 편찬의 특진관(특별보좌관)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해서 삼정승과 상의한 후 연산군에게 이를 알렸는데, 이것이 결국 무오사화로 연결되었다. 수많은 사대부들이 처형당하고, 김종직도 부관참시를 당했다. 이에 많은 사대부들이 무령군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이로 인해서 사대부들은 끊임없이 그를 탄핵했고, 중종 즉위 후 그는 벼슬을 그만 두고, 말년에 유배를 가야했다. 


그가 정계에 입문한 시기는 세조 14년인 27세 때였고, 이후 예종, 덕종, 성종, 연산군, 중종을 거쳤다. 심지어 연산군 밑에서도 8년간 무사히 벼슬살이를 한 뛰어난 처세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서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력으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특히 그는 왕의 편에 서서 충성을 다하면서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왕에게 간언을 하는 대간원이나 다른 신하들에게 미움과 질시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바른 소리를 계속했고, 청렴한 삶을 유지하면서, 당시 서출 신분이 오를 수 없는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인 정1품 ‘대광’(영의정에 준하는 왕의 자문역, 지금의 특별보좌관과 비슷한 직책)의 품계에까지 올랐다. 


저자는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의 성격상 바른말 하기 좋아하고, 남의 비리 사실을 가만히 보고 있지 못하는 성격으로 왕에게 직언을 하다 보니 적을 많이 만든 부분은 정치가로서는 커다란 결점이었다는 생각이듭니다.” 


즉, 그는 왕의 입장에서는 ‘충신’이었지만 다른 신하들이 보기에는 ‘간신’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회사에서도 CEO나 사장의 입장을 대변하는 직원은 다른 사람들에게 밑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일에 있어서 열정이 있지만, 남들과 타협을 안 하는 고지식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엇갈린다. 

《연려실기술》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어우야담》은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평가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그를 간신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벼락출세를 한 인물로 묘사했다. 


저자에 따르면 《연려실기술》을 지은 이긍익은 소론 출신이라서 류자광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있고, 반면 《어우야담》은 어느 정도 실록을 참고해서 썼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서에서도 논란의 인물이라는 류자광이라는 사람을 입체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한 마디로 자신의 원칙을 믿고 따르면서, 왕에게 충성을 다한 ‘신하’였다. 결국 신진사대부와의 갈등으로 시련을 겪었으나,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조선 초기 역사를 다시 한 번 짚어보면서, 권력의 무상함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한 신하의 영욕의 세월을 보면서 더 그런 마음이 든다. 과연 ‘충신’과 ‘간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가 충신이라고 생각한 인물들은 정말 충신이었을까? 아니면 그렇게 꾸며진 것일까? 간신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100% 동의하는 간신(나라를 말아먹고, 백성을 고통에 빠지게 한 인물들)을 제외하고, 정말 간신일까? 아니면 권력자들이 보기에 간신이었을까? 


역사는 과연 진리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 시대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일까? 

조선왕조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께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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