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저자인 김훈의 칼의노래, 남한산성이라는 책 제목만 들어보고 읽지 않았다. 이 에세이를 보고 나니 살짝 흥미가 당기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한국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소설책보다는 자기계발서라던가 인문-사회-경영 분야의 책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물론 어렸을 적에는 소설을 읽긴 했지만.... 에세이집은 좋아한다. 작가의 생각을 바로바로 알 수 있는 그러한 책은 내 딴에는 읽기 편하달까. 여타부타 하지 않고 바로 알수있으니깐....

 

 그런데 김훈의 에세이는 에세이인데 약간은 소설같은 풍미가 난다. 어떠한 사물을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느껴지는 소설가의 냄새! 흔히 보이는 사물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미술가 같은 느낌!이 든다.  또 어떤 때는 날카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분석적인 눈빛이 느껴진다. 어떻게 이렇게 표현했나 싶을 정도로 신기함이 드는 것도 많았다.

 

에세이의 특징 답게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 그대로 담겨져 있어 좋다. 아직 많이 미숙한 내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현실은 절대 녹녹치 않다. 돈이 없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현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일도 해야할 때가 있고, 꾹 참아야 할 때도 있고, 진실을 모른척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 에세이는 2002년 초에 나온 것이어서 2001년의 일을 얘기하고 있는데, 지금 2009년에 읽어봐도 몇일 전에 일어난 사건처럼 우리나라는 그때와 똑같다. 똑같이 어리석다.

 

 

인상깊었던 구절

p.79~80  한국 현대사는 사회적 고통을 분담해본 역사적 경험이 없다. 농업을 세계무역시장 앞에 개방하는 것이 국가 전체의 이득이며, 그 종합적 이득이 수많은 농민들을 고루 이롭게 하리라는 학설과 정책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일수록 공허하게 들린다. 그러한 위기극복 정책이 공허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논리가 개별적 인간 삶의 구체성 위에 바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p.85~86  '사실'이 먼저 있은 후에 '의견'이 있을 뿐이다. 사실이 여론을 이끌고 가는 세상이 민주주의다. 여론이 사실을 뭉개버리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p.96  모든 언어는 다른 언어에 의하여 부정당할 수 있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 언론과 공론의 기본윤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p.147  나는 이 대목의 역사에 감격한다. 우륵은 악기를 들고 무기 쪽으로 투항했다. 그는 악기를 위하여, 조국인 그 손바닥만한 부족국가를 배반했다. 그리고 그의 가야금은 그가 배반해버린 손바닥만한 부족국가가 조국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히 전했다. 가야금은 신라의 대표적인 현악기가 되었고, 왕조는 멸망해도 우륵의 악기는 찬란히 빛난다.

 

p.167  길은 저절로 생기지도 않지만 억지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길은 길이 아닌 곳을 오래오래 다님으로써 길게 이어진다. 길은 인간이 지상에 남긴 자취들 중에서 가장 강인하고 가장 겸손하다. 길은 마침내 산하를 건너가지만 산하와 대결하지 않는다. 산맥을 넘어갈때, 길은 산맥의 사나움을 건드리지 않는다. 길은 땅의 가장 여리고 순한 곳을 찾아서 구불구불 돌아나간다.

 

p.196  도다리는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지 않는다. 도다리는 백이숙제와 같다. 굶어 죽어도 더러운 먹이를 먹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은 도다리를 양식장 안에서 기를 수가 없다. 도다리는 그 본질이 자연산이기 때문에 모든 도다리는 자연산이다.

 

p.200  '무엇을 먹어야 옳으냐'는 선택의 갈림길에는 즐거움은 적고 고통은 크다. 이것을 먹기로 하면 저것이 그립고, 저것을 먹기로 하면 이것이 아까웁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버리는 결과가 된다. 겁나는 일이다. 고통스러운 망설임 끝에 겨우 주문한 음식을 먹고 있을 때도, 이제는 돌이킬수 없는 다른 음식이 더 아늑하고 풍성하리라는 상실감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p.212  물은 붓을 쥔 자의 감수성을 흡수하지만, 기름은 거기에 저항한다. 붓을 물에 적실 때 화폭은 재료와의 복받은 화해로서 펼쳐지지만 붓을 기름에 적실 때 화폭은 재료와의 다툼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기름으로 그린다는 일은 재료의 끝없는 저항을 감수성 속에서 항복받는 일이다. 

 

p. 231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 중생들은 개나 말이나 사슴이나 사람이나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궁으로부터 태어나는 일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포유류들에게는 '인륜'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p. 249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이 산이요, 만 갈래가 모여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물이다.

 

p. 252  해바라기는 여름의 꽃이다. 사람과 개들이 더위에 늘어져 기진해 버리는 8월의 폭양 속에서 그 꽃은 피어난다. 모든 꽃들에는 멸망 직전의 애상이 있지만, 해바라기에는 그늘이 없다. 해바라기는 강건한 남성성으로 피어난다. 그 꽃은 일 년생 풀이지만, 풀의 연약함을 보이지 않고, 나무처럼 우뚝우뚝 솟아오른다. 꽃봉오리는 그 우뚝한 높이의 맨 꼭대기에 달린다. 그 꽃은 봉오리 시절부터 아무런 수줍음이 없다. 봉오리들은 그 안에 숨긴 미완의 잠재태들을 수줍음으로 꾸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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