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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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된 김이정이 기록한 이 유령의 시간은 실제로 저자 아버지의 이야기이며, 자신의 이야기인 자전적 소설이라는 건 에필로그에 나와있어 뒤늦게 알았다. 그가 40년 만에 완성한 잊어버린 이야기를 읽는 데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이섭의 딸 지형을 통해 전개해 나간다. 창문 너머로 아파트가 보이는 북한의 한 호텔에서 지형은 작가가 되어 북한에 방문하게 되었고,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간절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려고 노력을 하나 쉽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 이섭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사회주의를 선택한다. 시대는 그를 빨갱이로 몰았다. 그가 좌익 사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사회안전법이라는 독재 권력으로 억압했다.

이섭 대신 아내 진이 잡혀가고 어린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 이섭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가슴에 그들을 품고 미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세상은 이섭의 이력을 외면했다. 직장을 구하려 이력서를 낼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했고 56촌 친척에게도 민폐를 끼쳤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았던 유령같던 아버지의 삶이었다. 작가는 그런 이섭의 깊은 슬픔과 무한의 고통을 아름다운 묘사와 비유로 나타냈다.

"우아하게 유영하는 새우는 물 속만 벗어나면 초라하게 짝이 없었다. 몸을 구부려 옆으로 누워있는 꼴은 언제나 투항의 자세처럼 보였다.“

이섭의 새우 양식장의 등 굽은 새우를 자기 투영으로 인식했듯,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돈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흔적이 지워진 비극을 보게 된다.

유령의 시간 속 이섭의 삶은 그렇게 생존하려 애쓰다가 스러진 삶의 전형이다. 자신의 사상을 좇아 월북했던 인물이 북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족은 자신을 찾아 이미 북으로 가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의지나 행동과는 상관 없이 외부의 폭력에 의해 사상과 사랑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노부모를 모셔야 했고, 어긋난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삶을 복원하고자 노력하지만,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편안한 자리는 없다. 현재의 자리에서 행복한 것도 옛 아내와 북에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괴롭고, 행복하지 않은 것도 새로 얻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그런 삶이다.

어쩌면 아버지 이섭은 유령이었는지 모른다. 이 땅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처럼 살아가야만 했던 김이섭의 생을 복기해 나가는 딸 지형이 작가가 되어 풀어낸 이 이야기가 내 가슴을 후벼 파고들었다. 이섭은 유령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지 않고 다시는 되풀이 되서는 안 될 역사의 증인으로 되살아 우리 곁에 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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