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냐 삶이냐 - 팬데믹 시대의 사유
장 피에르 뒤피 지음, 이충훈 옮김 / 산현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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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분노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하여”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회 정문에 자전거 자물쇠로 목을 걸기도, P4G 서울정상회담이 열리는 동대문디지털프라자 앞에서 녹색 물감을 뿌리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 하나 유심히 살펴본다. 결연하게 굳어 있는 얼굴들, 긴장하고 있던 걸까?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터뜨리며 목이 터져라 호소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 안는다. 등을 토닥이며 서로의 눈물을 닦아준다. 재앙을 예고하는 사람의 얼굴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 사랑과 분노는 이렇게도 함께 있을 수 있구나. 그렇게 나는 멸종반란을 만났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장 피에르 뒤피는 임박한 파국의 도래를 경고하는 자의 역할에 모순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불행이 닥칠 것을 예고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힘, 불행이 다가오지 않게 할 수 있는 힘을 깨우려고 한다. 그는 한스 요나스와 귄터 안더스를 인용한다. “불행의 예언은 그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피하고자 행해졌다.”, “우리가 묵시론자인 것은 오로지 틀리기 위해서이다. 매일 다시금 그곳에 존재할 기회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스꽝스럽지만 항상 서 있어야 한다.” 위기를 경고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고가 실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울부짖는다. “우리는 멸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기후위기는 위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그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의 기후 단체들은 연달아 직접행동을 하고 있다. 명화에 물감을 뿌리고, 자동차에 밀가루를 붓는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 “이상해. 너희들이 더 폭력적인 거 아냐?”,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는데, 수단이 잘못되었어.” 하지만 편하게 느껴지는 말은 우리가 이미 충실히 따르고 있는 권력의 문법을 용인하는 말일 따름이다. 잘못된 것은 수단이 아니라 그 수단을 거부하는 사회다. 듣지 않는 귀는 복종하는 귀이며, 읽지 않는 눈은 종속당한 눈이다. 폭력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몸은 폭력을 바라보지 않고 폭력이 아닌 것을 폭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과 싸우지 않는다. 대신, 들리지 않는 비명에 집중한다. 보이지 않는 학살을 찾아낸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위해 싸운다는 것은 비명과 학살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힘을 응시하는 일이다. 그것만이 절멸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이며, 생명을 지키려는 행동이다.

“생명을 보호하는 행동이란 정확히, 생명을 주어진 사실로 다루고, 그것을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제멋대로 가공하는 재료로 환원해 버리는 생명 권력을 일리치가 고발하면서 했던 바로 그 행동이다. 일리치의 주장은 생명을 ‘우상화’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생명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군가가 그랬다. 세상은 한편 너무나도 슬프고 아프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풍요롭고 감사하다고. 사실 아픔과 풍요는 늘 함께 존재해왔다. 세월호가 전복되고, 역병이 돌고, 이태원에서 죽음의 축제가 열릴 때조차. 슬픔과 감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평화로운 일상을 전쟁이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평화 속에 전쟁이 있고, 전쟁 속에 평화가 있다. 안전한 공동체는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 공동체가 아니라 갈등을 투명하게 대하는 공동체이다.

모든 생명이 무너져내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생명을 지켜야 할까? 생명과 죽음이 화해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죽음은 무엇일까? 늘 우리 안에 살아 숨쉬는 생명은 우리가 마주해야 할 질문을 가르쳐준다. 생명은 이렇게 말한다. “무기력과 냉소와 좌절과 슬픔과 고통 또한 나의 모습이야. 그러니 그것을 거부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아파하고 외로워할지 고민하자. 수백의 노동자가 죽는 세상에서, 수억의 돼지들이 학살당하는 세상에서, 가덕도와 새만금과 강정이 파헤쳐지는 세상에서 우리 무기력해 있지 말자. 그들이 마땅히 향유할 죽음을 취할 수 없게 하는 세상에 분노하고 사라져가는 것들과 그 속에서 오염되어가는 우리를 사랑하자.”

생명을 망가뜨리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망가뜨리는 일이다.

파국의 세상 속에서 태어난 우리가 파국의 바깥에서 죽을 수 있기를.

“박애, 그것은 언젠가 자신도 예외 없이 죽을 운명인 형제요 자매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산현재 출판사의 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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