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
/ 토마스
부타 /
이종실
/
동연
/ 2015.05.15.
얀 후스.. 이 책은 후스의
서신과 그의 생각, 설교 등을 모은 것이다.
부록으로는 체코 종교역사와 프라하에
서려있는 후스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부록과 관련된 대한 자세한 내용은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 / 이지 오르떼 / 김진아 / 한국장로교출판사 / 2012.07.17를 참조하면 더 좋을
것이다.
[걸어서 가보는 프라하 종교개혁 이야기]는 이 책의 번역자인 체코의 이종실 선교사님의 사모님이 번역한
책이다. 김진아 사모님은 한국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신 분으로 체코 프라하 찰스대 한국학과 교수이시다. [체코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만나다]의
번역자이신 이종실 선교사님은 장로교 통합 측 총회 세계선교부 간사로 계시다가 체코슬로바키아가 아직 공산국가였을 때 직접 선교의 현장으로
뛰어들으셨다. 약 20여년전 한국인 최초로 동유럽의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로 선교사로 가셨다. 처음에는 경제적으로도 언어나 문화적으로도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이제는 체코 형제개혁교단 총회 목사면서, 체코 프라하 꼬빌리시 한인교회 담임 목사이기시도 하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면서, 또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뉘게 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겼으면서도 한국교회와 체코교회와의 많은 가교 역할을 하신
분이시다.
올해가 후스 순교 600 주년이 되는 해이다. (1415년 7월
6일 순교)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더욱 기념비적인 책이다.
후스는 루터보다 약 백년전에 종교개혁을 한 전종교개혁자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허나 후스가 어떻게 사역을
했으며 어떤 글과 설교문을 남겼는지는 번역된 자료가 없어서 그저 막연했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옴으로서 얀 후스의 사역을 조금이라마 알게 되어
기뻤다. 또한 얀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로 가면서 어떤 심정으로 가게 되었는지, 가는 도중에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후스가
남긴 편지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아프고, 그가 왜 죽음의 길을 택했는지, 또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가
남긴 편지를 볼 때, 글자 한자 한자 가슴이 먹먹함을 느끼게 했다. 또한 체코 개혁교회의 순교의 역사를 보면서 히브리서 11장을 익는 것
같았다. 교회사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앙의 순결성이 지키려고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눈물나는 일인지 고개가
저절로 숙여질 것이다.
얀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는 우리가 아는데로
보헤미야(체코)의 아버지로 민족의 추앙받는 목사요 신학자다. 지금도
프라하에 여행을 가보면 커다란 후스의 동상이 시내 광장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그것만 봐도 체코 민족에게 후스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상의 앞면에는 후스가
콘스탄츠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한 문장인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당신의 나라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씌여있고, 그
뒷면에는 후스가 감옥에서 체코인에게 보낸 편지 "신실한 체코인에게" 가운데 한 문구가 적혀 있다. 그 문구는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에게 진리가 있도록 하십시오"라는 문장이다.
후스는 영국의 전종교 개혁자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4)에게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존
위클리프의 예정구원론을 바탕으로 성경을 믿음의 유일한 권위로 보았다. 결국 성경을 통해서 교회와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의
부패를 비판하다가 1411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당했고,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1415년 7월 6일
화형당했다.
그리고
그 유해도 라인강에 뿌져졌다. 하지만 그가 화형당한 이후 그의 신학사상은 체코 형제단으로 이어졌고, 후스의 사상은 마르틴 루터 등의
종교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공부했고, 1400년부터 대학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일했다.
사제가 된 후에는 프라하의 성 미카엘 교회
(Kostel
sv. Michala)에서 설교를
했고, 1402년 3월 14일부터 그 유명한 베들레헴
채플(Betlémská
kaple)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1402년에는 체코
프라하대학의 총장이 되어 체코인들이
독일의 힘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한다.
얀 후스는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체코어 설교와 체코어 찬양을
시작했고, 체코어를 개량하고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하였으며,
체코어로
찬송가를 보급하였다. 교회의 타락을 지적한 것과 개혁을
주장은 왕족은 물론이고 대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고위 성직자들과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이에 반발하게 되었다.
프라하 대학 내의 독일인 교수와 체코인 교수의 갈등은 1409년 바츨라프
4세의 크트나호라 칙령이 있게
되었고, 1348년 카렐 4세가 체코인 교수에게는 3표,
독일인 교수에게는 투표권이 한표로 배분되게 따라서 대학의 주도권이
체코인 교수에게 돌아간 것이다.
독일인
교수들과 학생들은 이에 대한 항의로 학교를 떠나 라이프치히에서 새로운 대학을 설립했다.
1414년 10월 독일과 스위스 국경 지대인
보덴제(호수) 근교의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는데,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츨라프 4세의 동생인
지기스문트(Sigismund
Luxcemburg)가 안전을 보장하면서 후스로
하여금 종교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후스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해 콘스탄츠로 향한
것이다. 결국 후스는 콘스탄츠에 오자마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뜻을 버리지
않자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약
1년 후 1416년 5월 30일에는 후스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프라하의 예로님(Jerome
of Prague)도 콘스탄츠에서
처형당했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1415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종교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고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한다. 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으며,
민중봉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면서 눈물 겨운 따보르파의 전투와 철저한 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의 죽음이
이어지게 된다.
후스는 교회와 사제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에 해당된다면
교황과 교회에게 대항하라고 설교했다.
첫째,
만일
교황과 교회가 하나님의 율법과 복음을 아는 경건한 자들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전통에만 눈을 돌린다면 이것은 교황을 거절해야 하는 표시가
된다.
둘째,
교황과
영적인 고위층들이 경건한 삶을 벗어나서 세상적인 일에 얽매여 산다면 이것이 교황과 교회를 거절해야할 표시가 된다.
셋째,
교황과
교회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세상의 장사꾼들을 내세우고 자신의 세속적인 삶에만 욕심을 내어 교회를 압박하는 경우 이는 교황과 교회를 거절해야
할 표시가 된다.
넷째,
만일
교황이 자신의 명령서를 통하여 구원을 필요로 하는 영혼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탈취한다면 이것이 교황을 향하여 대항할
표시이다.
후스는 교회의 부와 사치스러움은 사악함과 불신앙의 표징이라고
보았다.
그는
교회가 온갖 비싼 성화들과 성직자의 예전복,
성배와
종과,
오르간을
사용하여 행하는 의식들을 비판했다.
1415년 후스의 처형
후 보헤미아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농민·하층시민을 중심으로 한 과격한
타보르파가 프시네츠의 니콜라우스,
얀
지슈카 등에 의해 형성되었는데, 프라하에서,
독일
각지에 조직을 확대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마르티누스
5세와 황제 지기스문트는
5차례에
걸쳐(1420∼1431)
십자군을
일으켜 탄압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십자군과 개신교인들 사이의 전쟁을 후스전쟁이라 한다. 쿠트나호라(Kutná
Hora)에는 이 전쟁 때 목숨을 잃은 개신교인 희생자들의 해골과 뼈로 장식된 '해골성당'이 있다.
1996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로 지정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이 해골성당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사람의 실제 해골과 뼈로 장식되었는데
약 4만명 가량의 해골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프라하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이들의 피와 죽음으로 아직 체코에는
소수이지만 개혁교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따보르파가 활약했던 체코의 남부지역에 있는 '진지'라는 뜻의 타보르(Tábor)라는 작은 도시도 꼭 방문해 보길 바란다. 당시
활약했던 애꾸눈 장군인 지슈카 장군의 동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또 동상에서 백비터 정도 전방에 있는 그곳 박물관에도 꼭 들러보면 당시 어떤
전투가 있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들이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다만 체코말를 몰라 글을 읽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아울러 19세기 체코의 작곡가 스메타나가 작곡한 교향시 '나의조국' 도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음악은 1420년 경 전쟁 당시 후스파가 건설한 타보르를 배경으로 그들의 활약상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