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핵심진리 102가지 -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 성경적 근거
R.C.스프룰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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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정리해 놓았다. 나의 경우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어야 했기에 빠른 속도로 읽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책이었다. 성도들이 꼭 읽고 알아야 할 내용들이 가득하다.

별점: ★★★★☆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요소들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어린아이의 믿음“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어린아이의 믿음은 젖만 먹으려 하고 단단한 음식은 거부한다. 비록 신학계에 회의적 신학이 만연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해로운 신학을 피하기 위해 모든 신학과 신학 교육을 거부하는 것은 영적 자살행위다. 신학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 과목이다.

 
안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거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기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실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 호칭이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제자에게는 하나님의 것을 학습하기 위한 훈련이 요구된다.

논쟁은 신학 연구에 전념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다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논쟁을 해야 한다. 논쟁의 긍정적 측면 한 가지는 진리, 특히 신학적 진리가 영원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성이라는 우선순위에서는 마음이 먼저다. 머릿속에 올바른 교리가 있다 해도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나라를 잃게 된다.

우리는 쾌락주의, 물질주의, 향락주의 등의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를 유혹하는 가장 강한 힘은 ‘오늘날의 문화가 선호하는 진리에 대한 시각’을 받아들이라는 유혹이다. 

진지한 성경 연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개인 예배다.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거나 무릎을 꿇고 경건 서적을 읽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손에 펜을 들고 까다로운 신학을 파고들 때 마음에서 찬양이 울려나는 체험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보다 더 집중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 경건 시간의 말씀 읽기는 진지한 성경 공부를 훌륭하게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진지한 성경 공부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게으른 그리스도인은 애써 공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1부/ 계시

˝계시한다(reveal)“는 말은 가려져 있는 어떤 것의 덮개를 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일반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지식을 얻는다. 햇빛이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사람에게 비치듯 날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주어진다. 자연을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것은 피조물과 창조자를 혼돈하는 것이다. 특별계시는 자신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 나타나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현현, 꿈, 환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특별계시의 궁극적 형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계시한다. 우리는 세 인격이자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삼위일체), 혹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진 한 분(그리스도)을 이해할 만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역설은 모순과 같아 보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 속에 확고한 뜻이 있다. 신비란 우리가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이후에 알게 될 어떤 것이다. 모순은 피조물도 풀 수 없고 하나님도 풀 수 없으며, 이 세상에서도 풀 수 없고 장래 세상에서도 풀 수 없다. 모순은 거짓말하는 자(진리를 멸시하는 거짓의 아비)가 사용하는 도구다.


간접 일반계시는 뭔가를 통해서 전해지는 계시다. 하늘이 하나님을 드러낼 때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매개체, 즉 수단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전 우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매개체다. 하나님은 또한 사람의 마음에 직접 자신을 계시하신다(직접 일반계시).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잠재울 수는 없다. 억제할 수는 있어도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종교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아는 선천적인 지식을 심어주셨다. 이것이 직접 일반계시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은 많은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가 믿고 있는 대로, 성경을 기록할 때 인간 저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는 주장에 근거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고 썼다. 영감 Inspiration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신‘이라는 헬라어를 번역한 것이다. 성경은 인간 저자에게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무류하고 무오하다고 단언한다. 성경의 저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틀린 것을 영감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번역본이 오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경 원본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성품은 도덕적으로 완전할 뿐 아니라 완전함의 근원적인 표준이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올바르게 행하신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 또한 옳게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궁극적인 의의 기준이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규범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법으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도덕법은 십계명에 나타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법을 파기하실 권한이 있다.


선지자들의 예언서는 ‘소선지서‘와 ‘대선지서‘로 분류된다(대선지서: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소선지서: 호세아, 아모스, 요나, 나훔, 스바냐, 스가랴, 요엘, 오바댜, 미가, 하박국, 학개, 말라기). 이것은 선지자들의 중요도가 아닌 정경으로 인정된 글의 분량에 따른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대언자였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은 사람만 선지자가 될 수 있었다. 


˝정경 canon˝이라는 용어는 헬라어의 ‘측정하는 잣대‘, ‘기준‘, 혹은 ‘표준‘이라는 말에서 나왔다. 즉 역사적으로 성경은 믿음과 교회의 예배 의식을 위한 권위 있는 기준이 되어왔다. 신약성경의 정경에 관해서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완벽한 동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구약성경에 어떤 책을 포함시킬 것인가에 관해서는 양측이 심한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외경을 정경으로 간주하는 반면 개신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성경의 외경들은 신구약 중간기에 기록되었다). 2세기경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쓴 위조본 중 진지하게 고려된 책들은 클레멘트전서, 헤르마스 목자서, 디다케다. 그러나 이 책들은 사도들이 기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경에 포함되지 않았다. 개신교도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의 돌보심으로 타당한 책들을 포함시키도록 보장해주신다고 믿는다. 교회는 성경의 정경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에 복종한다. 정경성의 지표들은 다음과 같다. 1) 저자가 사도이거나 사도들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 2) 초대교회에 의해 권위가 인정되어야 한다. 3) 다른 정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회는 정경을 ‘창출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책들이 정경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으며, 그 인정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권위 있는 것이 되었다.


성경 해석의 주된 규칙은 ‘성경은 자기 자신의 해석자다.‘라는 원칙이다. 이 말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다는 뜻이다. 애매했던 성경의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에서 명확해진다. 즉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의 한 본문을 다른 본문과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텍스트는 직접 접해 있는 문맥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문맥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성경이 우리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관에 따라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이해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견해로 보려는 마음을 억제해야 한다. 사탄이 그리스도를 죄에 빠지게 하려고 유혹할 때도 성경을 인용했다(마 4:1-11). 

성경의 해석 원리: 문자적으로, 교훈적 본문에 비추어, 명시적인 것에 비추어, 논리 법칙에 따라.


신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발견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진리로 꾸며낼 자유는 없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경 해석의 건전한 원리를 이해하고 주관주의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말씀이 무어라 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특정 말씀에 수많은 개인적 적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올바른 의미는 한 가지다. 



2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

유한한 존재가 어찌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겠는가? 이 원리는 정통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 한 가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라는 교리다. 하나님의 불가해성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부분적이고 제한적이어서 초에적이고 완벽한 지식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해주시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삼위일체는 그 통일성과 다양성에서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정의하려는 용어다. 본질은 하나이고 위격은 셋이신 하나님이라는 이 삼위일체의 역사적인 공식이다. 교회는 양태론과 삼신론이라는 이단을 거부해왔다. 양태론 modalism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단지 표현 방법에 불과하므로 하나님 안에 위격의 구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삼신론 tritheism은 하나님을 구성하는 세 존재가 있다는 그릇된 주장을 한다. 각각의 위격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다. 구원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삼위의 모든 위가 공통으로 하시는 일이다. 그러나 활동 방법에서 성부는 창조와 구속을 주도하시고, 성자는 창조물을 구속하시고, 성령은 구속을 적용시키면서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성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발을 내디뎌서는 안 될 곳의 경계를 정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능력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속 존재하게 하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 없다. 이것이 ˝스스로 계신다˝라는 뜻이다. 피조물에게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창조주에게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창조하실 수 없지만 우리와 달리 스스로 존재하신다. 스스로를 창조한다는 개념은 비합리적이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합리적 개념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들어 옮길 수 없을 만큼 큰 바위를 만드실 수 있나요?˝ 어떻게 대답하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는 셈이다. 이것은 그릇된 딜레마다. 신학용어로서의 전능이란 하나님께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는 일을 몇 가지 언급한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히 6:18).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동시에 누군가로부터 창조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같은 시간, 같은 관점에서 하나님인 동시에 하나님이 아니실 수 없다. 그러므로 전능하심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에 대한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 가능하다. 하나님께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말은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유한한 것에 제한받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에 제한받는다. 하나님께는 죄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모든 장소에 계실 뿐 아니라 어느 곳에나 충만하게 임재하신다. 이것을 하나님의 광대하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의 편재에는 그분의 광대하심이 포함된다. 그 광대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충만하게 거하실 수 있다. 


‘전지’(omniscience)라는 단어는 ‘모든(omni) 지식(science)을 갖는다’는 뜻으로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자로서 우주를 통치하신다.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성경에서 나오는 “거룩(holy)”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구별됨’, 혹은 ‘다름’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 거룩은 하나님의 순결하고 의로우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옳은 일을 하신다. 우리를 향한, ˝거룩하라˝라는 부르심은 타락한 죄성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또한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다(약 1:17). 하나님께는 ‘어두운 면’이 없다는 비유적인 표현, 혹은 도덕적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완전히, 시종일관 선하시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선의 기준일 뿐 아니라 모든 ‘좋은 것’(선)의 원천이시다. 우리는 재난, 불행, 불의, 그 밖의 많은 악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하여 결국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비극이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법이 되신다. 


자비란 잘못을 범한 자에게 벌을 덜 줄 때, 혹은 상 받을 자에게 더 큰 상을 줄 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엄한 공의를 자비로 누그러뜨리신다. 은혜가 하나님에게 요구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은혜로우셔야 하는 의무를 갖고 계시다면, 우리는 이미 은혜가 아닌 공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것은 그가 옳게 행하신다는 것이다. 공의는 마땅히 받을 것을 주는 것이다. 자비는 공의의 범주에 들지 않지만 공의를 침해하지는 않는다. 



3부/ 하나님의 행하심과 뜻

분명하게 시작이 있는 사물과 사람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에 시작이 있다고 결론지으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불합리의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는 치명적인 비약이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무는 그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무는 존재할 수 없다. 무는 존재가 아니기에 아무런 능력도 없다. 그러므로 무엇인가가 존재하려면 어딘가에 그 시작을 갖지 않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 혹은 ‘누구’냐다. 하나님은 시작을 갖지 않으시므로 최고의 존재라 불린다. 다른 모든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하나님은 그 자신 외에 아무로부터 말미암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최고이시다. 영원한 창조자이시다. 현재 뭔가가 존재한다면 시작을 갖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창조되지 않은 존재는 어디에 사느냐에 관계없이 피조물보다 우월하다.


섭리라는 말의 어원적 의미는 ‘앞서서 보다’, 혹은 ‘공급하다’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이 섭리 교리의 핵심이다. 섭리에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의 의지를 통해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협력의 개념도 포함된다.


기적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비상한 능력을 지칭하는 일상의 일을 언급할 때 사용된다. 이차적 수단을 통해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역사하시는 것을 본다. 자연법칙에 반하는 하나님의 역사다. 기적은 초자연적인 일이다. 그러나 초자연적인 일이 모두 기적은 아니다. 


하나님 뜻의 세 가지 의미: 1) 주권적이고 작정적인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일어나며 실제로 일어날 때까지 우리에게는 숨겨진다. 2) 교훈적인 뜻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된 율법과 계명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을 어길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권리는 없다. 3) 하나님의 성향적 뜻으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성향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관계의 기본 구조는 언약이다. 성경에서의 언약은 평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대 근동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과 같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계약은 정복하는 왕과 정복 당하는 자들 사이에 맺어진다. 즉 쌍방 간 협상 같은 것은 없다. 언약 형태의 마지막 부분은 축복과 저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언약을 따를 때 주실 축복을 나열하신다. 또한 백성들이 자신의 책임을 수행하지 않을 땐 저주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신다. 


본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언약은 행위 언약이다. 이 언약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규례를 온전하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셨지만 불순종하면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아담이 죄에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비하심을 좇아 새로운 은혜 언약을 더하셨다. 그리고 그 은혜 언약은 우리의 구원을 가능하고 실제적이게 했다. 오로지 한 분만이 행위 언약을 지킬 수 있었다. 바로 예수님이다. 둘째 아담, 즉 새로운 아담으로서 이루신 그의 일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의 모든 조항을 만족시켰다. 또 예수님이 이루신 그 일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 이이와 같이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행위 언약을 만족시킨다.



4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존재‘는 바로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다양한 증거로부터 유추된 것이다. 성육신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피조물보다 선재하실 뿐 아니라 영원하시다.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요 1:1-3).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아들은 자발적으로 아버지께 복종하신다. 순종으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일을 성취하셨다. 첫째는 힘없는 어린 양, 우리 구주가 되신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지키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을 얻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복종하는 한 사람으로서 복종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셨다.


성자 하나님이 실제로 인간의 본성을 입으셨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가지는 지극히 중요한 교리 중 하나다. 구속에는 이중적 교환이 있다. 즉 우리의 죄는 예수님께 전가되고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불완전한 인성 때문에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는 그의 완전한 인성으로 인해 축복을 받는다. 예수님께 죄가 없으셨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 인성 속에 우리 모든 인류가 갖고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시공간의 제한을 받으셨다. 땀 흘리셨고 배고프셨고 우셨고 고통을 견디셨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죽음을 괴로워하셨다. 이 모든 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한 희생 재물의 자격을 갖게 되신 이유는 바로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완전한 자로서 불완전한 자를 위해, 죄 없는 자로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에 필요했던,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다.


동정녀 탄생이란 예수님의 탄생이 육신의 아버지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태에 기적적으로 잉태된 결과라는 교리다. 여자에게서 났다는 말은 그가 참으로 인간이며 우리 중 하나같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와 정확하게 똑같지 않다. 우리의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원죄가 없었다. 예수님이 육신의 아버지에게서 나시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들로서의 신성을 나타낸다. 


성경에 예수님을 ˝아버지의 독생자˝(요 1:14)라고 언급한 부분은 교회사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또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불리시는데, 이 구절도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만 높여진 창조물이라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독생하다˝라는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된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아버지의 독생자(only begotten)˝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는 ˝독생하신 하나님(only begotten God)˝이라 표현했다. 예수님은 ˝독(only)˝생하셨다(monogenais).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것을 제대로 다루려는 시도다.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비롯된다.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삼위 중 제 2위로서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독생자˝, 그리고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라고 불리는 사실은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려고 요단강가에 가신 것은 지상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예수님은 셰레 받으실 때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았고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라는 이사야의 기록대로 메시아의 사역을 이행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것은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하실 죄인들과 동일시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의 변형은 그 모습의 변화로서 자연과 초자연 사이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단순히 하나님 영광의 반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크나큰 중요성을 갖는 구속 사건의 하나다. 그것은 재림에 앞서서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아지신 순간을 나타낸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신 때였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우편으로 가셨다. 우주의 권세의 자리로 올라가셨다. 대관식을 위해, 만왕의 왕이신 것을 확증하기 위해 하늘로 가셨다. 그리스도는 승천과 함께 우리의 대제사장 역할을 시작하셨고 무한한 권세의 자리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화목을 위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에 영원 전부터 동의하셨다. 


예수님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며 그 자신이 선지자이셨다. 예수님은 제물인 동시에 제물을 바치는 분이셨다. 제사장으로서 그는 죄에 대한 완벽한 제몰로 드리셨다.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시다.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신분과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의미하는 호칭이다. 그리스도와 메시아 모두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다. 신약에서 두 번째로 자주 사용되는 예수님의 호칭은 ˝주˝다. ˝주˝라는 호칭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교회가 고백하는 예수님의 두 가지 본성에 따라 예수님은 참사람이시며 참하나님이시다. 인자라는 호칭이 인성의 요소를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 역시 신성과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아들로서 예수님의 순종에 초점을 둔 것이다. 이 호칭의 중요성은 구약에서 다니엘이 사용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단 7장 참조). 여기서 인자란 우주의 심판자 역할을 하는 하늘의 존재를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분명한 신적 권위를 선포하신 것이었다. 인자는 예수님이 가장 자주 사용하신 호칭으로 온 우주의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나타낸다. 로고스라는 말은 단순히 ˝말씀˝으로 번역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풍성한 의미를 주는 철학적 용례의 역사를 가진다. 이 용어가 헬라의 철학적 개념으로 채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사용하는 로고스의 용례는 헬라 철학에서의 용례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창세기 1장 3절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 ... 있으라 하시니 ... … 있었고˝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로고스의 개념이 헬라 철학과 구별되는 가장 중대한 점은 신약에서의 로고스가 인격이시라는 점이다. 즉 말씀(로고스)는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서 사시고 죽으셨다. 



5부/ 성령

구약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곧 성령이 말씀하신 것이라 기록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되˝와 ˝하나님의 영이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번갈아 쓰인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성령에게 돌린다. 


성령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삼위의 제3위가 영향력이 아니라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말씀하신다. 성령은 인격이시므로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 합당하다. 성령은 택함 받은 자들을 ˝위로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신다˝(요 16장). 성령은 살피시고 선택하시고 계시하시고 위로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권고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말씀의 확실한 증거에 순응하고 굴복하게 만든다. 그는 우리를 움직여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에 굴복하게 하며 완전한 확신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성령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확증하시면서(롬 8:16) 우리 영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우신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생각을 아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지금도 성경의 계시를 조명하는 사역을 계속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고 그 안의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우리 삶에 적용하도록 도우신다. 또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말씀을 통해 역사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책이다. 


중생은 성령이 신자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죄로 죽었던 자를 살리는 것이며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사역을 맡기시기 위해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신약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방언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행 2:16-21). 성령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것 가운데 성령세례는 사역을 맡기시기 위해 주시는 은사와 구별된다. 사도행전의 네 부류(유대인, 사마리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그들 모두가 신약 교회에 포함됨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순절은 성령이 제한된 소수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한 구약 예언의 성취다. 


보혜사란 위로자, 혹은 상담자로 번역되는 말로 헬라어 ‘파라클레테(paraclete)‘에서 유래되었다.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아버지께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하셨다. 그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최고 대리인이시다. 보혜사의 개념에는 위로자의 역할도 있다. 먼저 그는 상처받은 자, 실패한 자, 슬픔에 빠진 자에게 부드러운 위로가 되신다. 


성도란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화는 평생 동안 계속된다. 성화는 신자와 성령이 함께 협력하는 일이다. 



6부/ 인간과 타락

우리의 정체는 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연관된다. 즉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지 않았고 하나님과의 관계있는 피조물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주 속의 우발적인 산물이다. 우리의 기원은 무의미하고 우리의 운명 역시 무의미하다. 우리가 우연히 암흑으로부터 출현했으며 종국에는 무(無)의 심연 속으로 해체되어 버린다면 우리는 출생과 사망이라는 절대적인 무의미의 양극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는 존엄성을 갖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남자와 여자 모두)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인간이 타락하면서 그 안의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다. 그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은 물질인 육체와 비물질인 영혼으로 구성된 피조물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육체는 선하게 창조되었으므로 신체에는 본질적인 악이 없다. 다만 육체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인간의 죄악됨이 육체와 영혼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육체로부터의‘ 구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육체의‘ 구원을 가르친다. 정통 신학은 인간을 육체와 영과 혼, 이 세 가지로 구분하는 삼분설을 거부한다.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본질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영혼은 물질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물리적인 힘으로 파괴될 수 없지만 하나님에 의해서는 파괴될 수 있다. 즉 영혼은 하나님이 유지하시는 능력 없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우리는 육체가 죽어도 영혼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 계속 산다. 다만 신자는 그들의 육체의 부활과 영화가 이루어질 구원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는 반면, 회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기다린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타락했으므로 영혼, 육체 모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은혜의 대상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 충만하다. 성령 ‘충만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께 의지하는 정도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를 나타내지만 성령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신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우리가 타락한 본성(육)의 힘은 어느 정도 정복당하지만 완전히 말살되지 않는다. 따라서 평생의 성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이 성령과 은혜로 자라 가려면 매일 옛 본성과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옛사람(육신)과 성령 사이의 이 싸움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완전히 육적일 수 없고 육적인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사탄을 마녀나 도깨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진지하고 냉정하지 못한 행동이다. 성경에서 사탄은 ‘대적‘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가 마귀라는 것을 안다. 그는 인류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된 천사와 같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어둠의 임금, 거짓의 아비, 참소자, 미혹하는 뱀으로 불린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탄은 훨씬 더 세련된 모습이다. 그는 광명의 천사로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은 사탄에게 자신을 선한 모습으로 위장하는 교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탄은 신적 능력이나 성품이 없는 유한한 피조물이다. 


귀신은 사탄을 수종드는 초자연적인 존재다. 그들은 사탄과 마찬가지로 한때 천사였다. 그러나 사탄의 반역에 가담했다가 그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쫓겨났다. 사도바울은 이교도들이 숭배하는 신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은 그런 것을 부추기며 퍼지게 하는 귀신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교도들의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귀신을 경배하며 귀신의 통제를 받고 있는 것이다.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과 요한은 마지막 때에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의 활동이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귀신은 실재하고 힘이 있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을 정복할 수 있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우리는 귀신에게 괴롭힘당하거나 유혹 받거나 참소당할 수 있지만 통제받지는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임재가 우리를 귀신 들림으로부터 보호한다. 성령은 우리를 공격하는 그 어떤 귀신보다 강하시다. 


죄의 성경적 정의는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을 때 과녁을 빗나가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나간 목표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규범을 말한다. 죄는 ‘이성적인 피조물에게 규칙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하거나 위반하는 것‘이라고 정의되어왔다. 성경은 어떤 죄가 다른 죄에 비해 더 극악하다고 간주한다. 하나님의 의의 심판대에서 언도되는 처벌에도 각각 정도의 차이가 있듯 사악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죄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불순종(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하는 것과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는 죄)하는 것이 포함된다. 


원죄는 본래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원죄는 첫 번째 죄의 결과(인류의 타락), 즉 우리가 태어날 때의 타락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한탄했다. 죄의 보편성은 사회적 요인이나 환경적 요인으로 설명할 수 없다. 죄의 보편성은 인류의 타락에 기인한다. 


사담 후세인이나 아돌프 히틀러에 비하면 평범한 범죄자가 성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눈 들어 궁극적인 선의 기준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시선을 두면, 세상에서 근본적으로 선해 보이는 것들이 속속들이 부패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Total) 타락을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것보다 더 자주, 더 심하게 죄지을 수 있다. 즉 우리는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지만 전적으로 타락했다. 인본주의는 죄를 인간 삶의 가장자리나 끝부분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생각한다. 성경적인 기독교는 죄가 우리 삶의 중심에 퍼져 있다고 가르친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음성이며 우리 마음은 양심을 통해 죄를 고소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한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고 말씀에 사로 잡혀야 한다는 것이다. 양심은 말씀을 잘못 알 수도 있고 반복되는 죄로 인해 무감각해지고 둔해질 수 있다. 설령 죄가 아니라 할지라도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죄다. 


복음은 죄를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용서를 주지만 이 죄에 있어서만큼은 한계를 갖는다. 예수님이 경고하신 용서할 수 없는 죄, 또는 용서받지 못할 죄란 성령을 훼방하는 죄다. 예수님께서는 이 죄를 현재에도 미래에도 용서받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모독이란 사람이 말이나 글로 하는 행위이다. 즉 모독에는 말이 포함된다. 또한 신성 모독은 어떤 형태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심하게 모욕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간주된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몰랐던 사람들이 범한 모독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다.


혼합주의는 한 종교의 여러 면이 다른 종교에 동화되거나 융합되는 과정을 말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혼합주의의 압력과 유혹에 대하여 크게 걱정하신다. 하나님의 법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분명하게 금지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도 금지했다. 또한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이방의 가르침과 관행에 융합시키는 것에 대한 심판을 경고했다. 기독교 신조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종교의 속임수와 철학들로부터 자신을 구별시키려는 노력의 역사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기독교의 고유한 것을 포기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와 같은 비기독교 철학이 기독교 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 혼합주의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떼어 놓는 강력한 무기다. 오늘날의 교회는 기독교 사상과 이방 종교와 세속 철학을 연합하려는 시도에 위협받고 있다.



7부/ 구원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다.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가장 간단한 의미는 ‘위험하고 위협적인 상황에서 구출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을 우리가 죄로부터 궁극적으로 구속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는 것을 나타내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한다. 끝으로 구원에 관한 성경의 또 다른 관점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완성하시고 하나님이 시행하신다. 구원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다. 다시 말해 우리를 주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성경은 과거, 현재, 미래의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하면서 여러 가지 시제로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예정론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든 교리는 없다. 때문에 예정론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어려운 교리이다. 예정론이 의미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우리의 극적인 목적지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인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인류 가운데 어떤 자들은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고 나머지는 멸망하도록 두셨다는 말이다. 

비개혁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택할 자들이 누구인지 아시고 그들을 선택하여 영생을 주신다. 이것을 예정은 선견적(prescient) 관점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결정과 행동을 미리 아신다는 점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관점은 하나님의 선택이 주권적이다. 그것은 미리 아신 바 된 인간의 결정이나 반응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결정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믿음은 거듭남에서 오는 선물이다. 오직 선택받은 자만이 믿음 안에서 복음을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예정론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선택하여 구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자비로우셔야 할 의무가 없다. 그가 얼마나 자비로우셔야 할지는 그의 결정에 달려 있다. 결코 하나님께서 불의하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없다(롬 9:14-15). 


예정론에서는 선택과 유기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성경을 진지하게 살펴본다면 이중적인 예정론을 피할 수 없다. 초칼빈주의는 하나님께 선택과 유기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가르친다. 이중적 예정론을 보는 개혁주의 관점은 소극적-적극적 형이다. 그는 선택받은 자들을 일방적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들의 보증을 확증하신다. 반면 유기된 자들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악이 역사하게 하시거나 그들의 믿음을 방해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그들에게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자신들의 죄악된 뜻 가운데 버려두신다. 


하나님께는 세상이 존재하도록 부르시고, 무덤에서 시체를 부르시고, 사람을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부르시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외적 부르심인 복음을 듣고 그것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적 부르심은 언제나 효과가 있다. 그 부르심은 기대되는 결과를 낳는다.


중생(重生)은 거듭남을 가리키는 신학 용어다. 중생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기원, 새로운 시작을 말한다. 중생은 철저하게 새로워진 사람이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출생이 우리의 시작인 것처럼, 영적 거듭남은 영적 생활의 출발점이 된다. 중생은 하나님의 거룩한 주권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주권적이고 즉각적이고 순간적인 일이다. 또 중생은 믿음의 필수 조건으로 믿음에 앞서는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의 진노를 당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에게 버림받으셨고 지옥을 온전히 경험하셨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대속과 만족 두 가지를 다 이루셨다. 성부와 성자는 우리와의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 함께 일하셨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온 세상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곳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넓은 의미에서 속죄는 모든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고, 좁은 의미에서는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졌다. 


우리의 욕망에 따라 선택하는 것, 이것이 자유 의지의 본질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성령께서 거듭나게 하시기 전에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려 한다는 주장을 고수한다. 즉 거듭남은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켜 자유롭게 회개하고 구원받게 한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자유는 우리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자유, 혹은 능력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바꾸셔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가질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소원을 주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이다. 


‘믿음(faith)‘이라는 말의 어원은 ‘신뢰하다(trust)‘라는 의미다. 히브리서에 믿음의 정의가 나와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믿음은 미래에 대한 우리 소망의 본질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것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미래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별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신앙은 맹목적으로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이상, 믿음은 구원의 필요조건이다. 누구나 자기에게 믿음이 있노라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고백만으로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믿음의 열매가 없는 입술의 예배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니다. ˝성실하기만 하다면 당신이 무엇을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러한 생각은 성경과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믿느냐가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잘못된 일에도 성실할 수 있다. 우리는 복음을 믿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을 믿는다. 또한 구원을 얻기 위해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그 지식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에 관련된 사실에 동의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독교 신학 시험에서 A 학점을 받을 수 있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복음의 진리에 동의하는 것이 포함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우리가 복음을 사랑하고 그 진리대로 사는 것을 요구한다.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지 못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복음에 관한 지적인 동의를 요구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그를 향한 사랑이 포함된다. 


칭의란 불의한 죄인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더해진 것이고 전가된 것이다. 즉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시킨 것이다. 


믿음이 아닌 선행으로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율법주의의 이단에 빠지는 것이며 아무런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칭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율법폐기론의 이단에 빠지는 것이다. 믿음과 선행은 구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진정한 칭의에는 언제나 성화가 타난다. 즉 성화가 따르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칭의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누구도 선행으로 칭의를 얻지 못한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얻지만 열매 없는 믿음은 아니다.


회개는 구원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진정한 회개에는 오직 고백, 보상, 죄로부터 돌아서는 결단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에게 용서와 회복을 약속하신다. 


공로와 은혜의 문제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역사적 논쟁의 핵심이다. 종교개혁의 주요 선언 중 하나는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진다. 은혜는 우리의 공로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가지만 우리 안에 있는 은혜의 분량에 따라 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비로운 도움을 주시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자란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적정공로, 재량공로, 여분의 공로를 구별하지만 개신교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부정한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선물이며 자비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를 가르친다. 이 교리의 핵심은 만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졌다면 결코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으며, 만일 그것을 잃었다면 애초부터 갖고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눅 8:5-8). 이 비유는 처음에는 믿었다가 나중에는 타락한 사람을 언급한 것일 수도 있고, 개혁주의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믿었던’ 사람이 거짓되고 위선적인 믿음을 가졌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오직 좋은 밭에 떨어진 씨만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눅 8:15)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잠시 넘어질 수 있지만 최후까지 타락할 수는 없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길 수 없다(요 10:27-30). 성도의 견인은 성도를 보존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성령의 인 치심을 받은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보증이다. 


구원의 확신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이것은 우리 영혼에 관한 쓸데없는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확신을 얻으려면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믿음의 열매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온전한 확신은 성령이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카톨릭에서 죽음 이후 천국으로 가기에는 부족하지만 지옥으로 갈 만큼의 죄를 짓지 않은 영혼이 잠시 머문다고 생각하는 곳이 연옥이다. 이곳에서 죄를 씻고 정화한 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기독교는 연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영혼가면설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영혼이 ‘가사 상태’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통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난다. 중간 상태는 죽음과 우리 몸의 부활 사이에 육체가 없는 우리 영혼이 의식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성도의 마지막 부활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그 첫 열매라고 선언한다. 이 땅에서 죽게 되는 몸과 우리가 받을 부활의 몸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다. 우리의 현재 몸은 부패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변화되셨을지라도 그 몸을 가지고 돌아오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현재 몸도 부활할 것이며 그 정체성을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변화될 것이다. 장차 우리 몸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지는 신비에 싸여 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영화의 교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진정한 신자들 모두(산 자나 죽은 자나) 그들 몸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속을 받아 마지막 상태에 이른다는 것이다. 장래의 영화에 대한 약속은 현재의 우리에게 위로와 영감을 준다.



8부/ 교회와 성례전

‘사도 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께 부름받고 위임받았으며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말했다. 그러므로 사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도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함께했던 제자 2) 부활의 증인 3) 그리스도께서 직접 부르시고 위임한 자. ‘제자’와 ‘사도’는 동의어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도’이셨다. 오늘날에는 성경적 의미의 사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도의 권위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참교회의 표지는 다음과 같은 것들로 교정 지어졌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선포함.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 이신칭의, 속죄, 그리고 구원에 필수적인 그 밖의 교리들을 공식적으로 부인할 때, 교회는 그릇되거나 배교하는 것이다. 2) 제도에 따라 성례를 행함.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례전을 부인하거나 모독하는 것은 교회를 오류에 빠지게 하는 행위다. 3) 교회의 권징을 행함. 교회가 공개적으로, 그리고 완고하게 추잡하고 악질적인 죄를 허락하고 행하며 그것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참교회의 표지를 나타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출교는 교회의 징계 중 가장 극단적인 것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신실한 자들의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일이다. 출교를 포함한 모든 과정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다시 교제권 안으로 이끌기 위한 징계의 과정이다. 즉 출교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죄지은 자에게 그의 죄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교회의 징계가 사소하고 작은 일들에서 이루어지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것처럼 서로에게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을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교회의 징계는 지나치게 느슨해서도 안 되고 지나치게 가혹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참고 인내해야 한다.


‘성례전 sacrament’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약속을 외적 형태로 보여주시는 수단으로 정의되며 물, 떡, 포도주 등의 눈에 보이는 요소들과 그러한 상징들과 관련하여 계획하신 하나님의 뚜렷한 행위, 그리고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속, 은혜 등의 요소로 구성된다. 개신교에서는 성례전을 세례와 성찬 두 가지로 제한했다.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식이므로 기쁨으로 엄숙하게 참여해야 한다. 


세례는 선택된 자들이 은혜의 언약 안에 있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며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시고 용서해주셨다는 표징이다. 또한 성령에 의해 거듭났다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었다는 표징이다. 세례는 물로 씻는 것을 의미하므로 침수, 담금, 뿌리기로 시행될 수 있으며 세례의 유효성은 세례를 행하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성품에 달려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미쁘심에 있다. 세례가 자동적으로 중생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세례의 유효성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그 기반을 두며 한 사람에게 한 번만 줄 수 있다. 


신약성경은 유아세례를 명백하게 명하지도, 금하지도 않는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약과 구약 사이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세례가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아세례의 옹호자들은 믿음의 표징으로서 할례와 세례의 연속성을 지적한다.


칼빈은 성찬 시 그리스도의 육체의 임재를 부정했지만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는 확실하게 주장했다. 예수님의 인성은 하늘나라에 제한되어 있지만, 그의 신성은 무소부재하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화체설’을 가르친다. 화체설은 의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가 성찬식 도중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는 주장이다. 화체설을 둘러싼 논쟁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에 관련된 문제다. 몸과 피는 예수님의 인성에 속한 것이다. 즉 세계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미사를 드린다면 예수님의 인성(몸과 피)이 어떻게 같은 시간에 한 장소 이상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과 다른 신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불법으로 여겼고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속성인 인성과 신성이 혼합, 혼란, 분열, 분리됨 없이 각각의 속성을 보유한 채로 연합되어 있다고 확언하며 화체설이 이단의 한 형태임을 명백히 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날을 다른 날과 구분하시며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날로 정하셨다. 안식일 sabbath이라는 말은 ‘일곱 번째’라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몇몇 사람들이 토요일만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약성경에 나온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인 주의 날이 일요일(안식 후 첫날)이기에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칠일 중 하루’이라는 안식일의 원칙이 손상되지 않은 채 사도들에 의해 지켜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안식일에는 정기적인 노동으로부터 휴식하고 성도가 모여 함께 예배해야 한다. 


신자의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갖는 책임이다. 인간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으며 진리의 수호자시다. 경솔하게, 혹은 심중 유보를 가지고 서원하면 안 된다. 



9부/ 영성과 이 세상에서의 삶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훌륭한 온화함과 인내를 보여주는 비그리스도인이 많다. 이처럼 사람이 성령과 관계없이 ‘성령의 열매’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측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생기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등의 덕목들과 비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덕목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비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 동기에서 이러한 것들을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낼 때는 궁극적으로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하는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다면 성령의 열매를 드러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룻밤에 생겨나는 피상적인 성품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미성숙할 수 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재다(갈 5:22-23).


성경에서는 사랑을 훨씬 더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사랑은 의무다. 구약에서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아헤브 aheb”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필레오 phileo”와 “아가페 agape”라는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에로스 eros’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적이고 에로틱한 사랑을 말하며 우리가 로맨스와 결부시키는 사랑이다. 아가페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랑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는다.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용서하는 데 빠르다. 또한 선과 진리를 구하며, 보호해주며, 소망하며, 언제나 참아준다. 이 사랑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아가페는 성령의 궁극적인 열매다. 


성경이 말하는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이 미래에 성취되리라는 굳건한 신념이다. 소망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 자녀들의 부활과 하나님 나라가 오리라는 것에 대한 완전한 확신이다. 따라서 소망은 종말론과도 연결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공보다 고난으로 특징지어짐(고전 4:8-13, 고후 4:7-18)에도 불구하고 소망의 기초는 하나님께 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신뢰하는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이 미래에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바를 신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고난 가운데 소망을 준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통한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이다. 기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혹은 각 위의 하나님 한 분께만 드리는 것이다. 피조물에게 기도하는 것은 우상 숭배다. 기도는 진실하게 경외심을 가지고 겸손하게 드려야 한다.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자비하심을 신뢰하면서 드리는 기도다. 


율법 폐기론(antinomianism)이란 문자 그대로 반율법주의(anti-lawism)다. 이것은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 율법의 중요성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이다. 즉 율법 폐기론은 율법주의 이단과 반대되는 이단이다. 

‘협화신조(formula of concord, 1557)’에서 율법의 용도를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했다. 1) 죄를 드러냄 2)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에 필요한 예의를 갖게 함 3)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에 규율을 제공함. 

율법 폐기론의 기본적 오류는 성화와 칭의를 혼동한 것이다. 우리는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킴으로써, 즉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믿음 안에서 성장한다. 율법과 은혜는 구약과 신약 전체에 나타난다. 


율법주의(legalism)는 율법 폐기론과 반대되는 이단이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은혜보다 우위에 둔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정신의 배제된 채 율법의 형식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율법주의는 사소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중요한 것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종교개혁은 율법이 아닌 은혜에 기초를 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율법의 첫 번째 기능은 거울의 용도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리고 가는 엄한 몽학선생의 역할을 한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악을 제지하는 역할이다. 율법은 마지막 심판이 실현될 때까지 제한된 범위에서 이 세상의 정의를 허용한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에 순종함으로서 칭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기 위해 칭의를 얻었다.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거룩함이나 완전한 사랑을 모든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이 신자들을 고의적인 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교리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첫째로 이것은 율법의 준엄한 요구를 축소시킨다. 하나님 율법의 넓이와 깊이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완전주의자의 견해를 가질 수 없다. 둘째로 완전주의는 사람이 자신의 영적 성취를 과장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을 의롭다 여기신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떠나 신자들 자체만 보았을 때는 그대로 죄인이다. 성화를 통해 신자들이 죄인의 모습을 점점 벗어가지만 성화는 신자가 영화를 입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신다. 


교회가 얼굴을 붉히지 않고 정치적일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바로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어디서든 시민으로서 복종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라고 권한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는 권세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이 정한 규율에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 통치자들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하라고 하지 않는 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못 하게 하지 않는 한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교회와 정부는 모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서로 다른 기관으로서 각각의 임무에 대한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혼인관계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육체적, 정서적, 지적, 영적으로 연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다. 혼인은 평생 지속되도록 의도된 것이며 성스러운 맹세와 언약으로 보장되고 육체적인 결합으로 완성된다. 부부간의 정절과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 그리고 서로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결혼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혼인은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결합 관계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이 평생 지속되도록 고안된 것임을 강조하셨다. 그는 한 몸이 된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셨다. 모세는 이혼의 근거들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허용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러한 허용이 오직 죄(마음의 곧어짐)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이것이 혼인의 본래 의도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셨다. 그 후 바울은 믿지 않는 자에게 버림받은 믿는 자의 경우, 이혼을 할 수 있다고 허용의 범위를 확장했다(고전 7:10-15). 성경은 ‘무과실’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다.



10부/ 마지막 때

‘적(anti-)‘이라는 접두사는 ‘-에 반하는’, 혹은 ‘-를 대신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당한 자리를 침해하려는 존재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참그리스도라고 속이는 거짓 그리스도다. 요한은 “많은 적그리스도”(요일 2:18)와 “이미 이 세상에 있는 적그리스도의 영”(요일 4:3)에 대하여 말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적그리스도의 특별한 출현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불법의 사람”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일할 것이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기의 능력을 나타낼 것이다(살후 2:1-12).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께 패할 것이다. 


재림은 성도의 부활과 마지막 심판과 세상의 종말을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실 때처럼 영광의 구름 속에서 재림하실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오실 날을 깨어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그분의 재림의 날과 시간을 독단적으로 예측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신약은 예수님이 오시고 보좌에 오르심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선언한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존재하지만 예수님의 영광을 재림 때에 완전히 완성될 것이다.


천국에 없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눈물, 2) 슬픔, 3) 죽음, 4) 고통, 5) 흑암, 6) 불경건한 자들, 7) 죄, 8) 성전, 9) 해와 달, 그리고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창 3:14-19 참조). 반면 천국에 있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성도들, 2) 생명수가 흐르는 강, 3) 생명나무, 4) 하나님의 어린양, 5) 예배, 6) 어린양과 신부의 결혼 잔치, 7)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 8) 의의 태양. 또한 천국에서 누리게 될 행복에는 등급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여 같은 하늘에서 빛나는 별들 사이에도 밝기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비유로 들었다.


천국에 관해서는 우리 앞에 많은 신비가 놓여 있지만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이것을 확신할 수 있음을 약속해준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신현(불타는 떨기나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외적으로 현현되는 것)과 같은 방법을 넘어 천국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실 것을 확실하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보이셨다. 그를 보는 것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미래에 보게 될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의 영혼을 행복으로 충만케 하기 때문에 “지극히 복되다”(지복)고 불린다.


인간의 경험 중 지옥에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 중에 가장 지독한 것을 상상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상상은 지옥의 무시무시한 실제에 미치지 못한다. 지옥이 갖는 가장 무서운 면은 아마도 영원성일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리 큰 고통이라도 그것이 결국에는 끝날 것을 기대하며 참아낸다. 그러나 지옥에서는 그런 희망이 없다. 성경은 지옥의 형벌이 영원하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지옥은 영원하다. 거기서는 회개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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