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시에 꽂혀서는 텍스트T 2
정연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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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한가운데, 마음이 무너진 소년 이겸이 있다. 이 책은 가족을 잃은 겸이 시를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시와 겸의 이야기가 이리저리 뒤섞여 울창한 숲을 만들어낸다.

 

사람은 죽어 반드시 별이 된다.

지금부터 유난히 반짝이는 별은 언제나 엄마 별이다.

 

엄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 겸은 열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엄마를 잃게 된다. 속이 무너질 대로 무너졌는데, 세상은 계속해서 겸을 찌른다. 선생님은 위로랍시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건네고, 겸의 보호자라고 나타난 사람은 겸이 그토록 미워하던 아빠 ‘H’.

 

완벽한 메소드 연기를 펼칠 거다.

H의 접근을 막기 위해 진입장벽을 설치한 뒤 육중하고 견고한 침묵을 보여줄 거다.

그 무게감에 짓눌려 항복하고 결국 나를 포기하는 순간까지.

 

겸의 슬픔은 아빠 H를 향한 분노로 돌아선다. H와 함께 H의 고향으로 내려가 살게 된 겸은 그에게 조금의 곁도 주지 않으리라, 그렇게 H가 행한 빈자리가 만들어낸 침묵의 무게를 느끼게 하리라 다짐한다.

 

짐을 모두 챙겨 이사 온 낯선 공간에서 겸을 반기는 것은 커다란 숲과 시다. 짐을 정리하다 발견한 엄마의 시집. 겸은 엄마가 종종 읽곤 하던 시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시가 낯설기만 하던 겸에게 행간의 세계를 보여준 첫 시집은 바로 기형도의 입속의 검은 잎이다. 일찍 세상을 뜬 그가 부려 놓은 문장들이 잔뜩 얼어붙어 있는 겸을 녹아내리게 만든다. 누구도 겸에게 해주지 못했던 위로를 시가 해낸다.

 

시는 가슴에 작은 냇물을 만든다. 내 속에 존재하는 온갖 감정들을 냇물에 실어 보내자 시가 온몸 구석구석 실핏줄처럼 뻗어 나간다.

 

시는 섣불리 손을 내미는 법도, 넘겨짚는 법도, 나를 찌르는 법도 없다. 겸이 겸의 이야기를 쥐고 겸만의 방식으로 읽어낼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다. 무해하고 다정한 시들을 읽고 쓰면서 겸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문장과 문장 틈의 행간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 그 틈에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지 깨닫는다. 마음이 단단해진 겸은 비로소 엄마의 마음에, 그리고 그토록 미워하던 H의 마음에 닿게 된다.

 

시가 겸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다면, 겸을 일어서게 해준 것은 은혜다.

 

사람들 눈이 그리 중요하나?”

넌 안 중요해?”

밸로.”

 

마을의 칼국수집 은혜 칼국시의 손녀 은혜는 자유로운 소녀다. 겸과 달리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은혜는 비인기 종목인 포환던지기를 한다. 포환던지기가 어떤 종목이든 은혜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나는 포환던지기를 좋아한다는 거. 그거면 된다.”

 

은혜를 통해 겸은 세상과 마주하는 새로운 방식을 배운다. 시로 마음을 배우고 은혜에게서 삶의 자세를 배운 겸은 비로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제야, 몸과 마음이 단단해지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진짜 애도, 진짜 미움, 진짜 용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엄마가 늘 앉아 있던 아끼던 낡은 의자가 H의 카페에 놓여 있다. 같은 의자가 아니다. 같은 사람, H가 만든 두 개의 다른 의자다.

 

의자를 빼고 엄마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의자를 챙겨온 이유였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엄마한테 이 의자는 무엇이었을까. H한테 이 의자는 무엇이었을까.

 

비로소 엄마의 빈자리와 H가 새로 비집고 들어온 자리를 오롯이 마주하게 된 겸. 겸은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의 죽음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유방암을 희화화하며 사람을 추행할 생각밖에 안 하는 반 친구들, 위로로 사람을 더 진창에 내몰리게 만드는 선생님들, 단 한 번도 아빠 노릇을 한 적 없는 H. 소설 속 겸에게 남겨진 건 단지 엄마의 빈자리만이 아니다. 열일곱 겸에게는 그새 크고 작은 생채기가 많이 나 있다. 마음에 온통 구멍이 뚫린 겸. 그 구멍 사이사이로 별빛이 지나간다. 빛나는 시의 문장들이 지난다.


우리에게는 다양한 형태의 슬픔이 다가오곤 한다. 그 슬픔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에 남은 구멍의 모양이 조금씩 달라서,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 흔적을 메워내야 한다. 시는, 그리고 이 소설은 정해진 모양의 퍼즐로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 대신 손에 잡히지 않는 흐릿하고 물컹한 형태로, 우리가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채워넣을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의 형태로 다가온다


겸이 시를 시인의 의도와 의미를 해석하는 대신 온전히 자신의 마음으로 느꼈듯, 이 소설 역시 마음으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조금 다른 방식의 위로가 필요한 청소년들에게 겸의 숲을 건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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