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이레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사람은 이 책의 저자 소로우였다. 원제는 이었지만, 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48년 맥시코 전쟁 전비를 대기 위한 세금 지불을 거부한 그는 감옥에 갇혔었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불복종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1950~60년대에 미국의 반전시민운동에 쓰여지면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간디의 무저항운동에 사용되어서 더 유명세를 탄 것 같다.
소로우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 나아가서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p9)였다. 이 말만 본다면 그가 무정부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이 말은 지나친 국가의 간섭은 필요없다라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이 자신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선택한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지만, 국민이 그것을 통해 행동을 하기도 전에 정부 자체가 남용되거나 악용되기 쉬운 것이다.(p10)
정부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그 수단에 국민들이 휘둘릴 가능성은 매우 높다.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p26)
모든 사람이 혁명의 권리를 인정한다. 다시 말해서 정부의 폭정이나 무능이 너무나 커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정부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정부에 저항하는 권리 말이다(p16)
정부의 부당한 요구나 제도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는 그의 생각에 나도 찬성한다. 어떤 방법으로 저항해야하는지는 조금 생각해봐야겠지만.
소로우가 말하는 불복종의 판단기준은 개개인의 도덕적 양심에 따른다. 양심은 언제나 법에 대한 일반적인 복종의무보다 우선권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의 견해에 따른다면 법에 대한 일반적인 복종의무가 사라지는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조금 곤란하지 않을까?
시민불복종이라는 말을 뉴스나 신문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보게된다. 가끔은 '대체 저게 어딜봐서 불복종이야?' 하는 생각이 드는 어이없는 것들에 갖다붙이는 만행(?)을 저질러서 안타깝다.
예전에 사학재단과 관련해서 한참 tv가 시끄러울 때, 인터뷰 중 불복종하겠다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나오는걸 보면서 속이 얼마나 부글부글하던지.
다른것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지나친 일반화는 안될 듯 싶다.
'저항'과 '불복종'이라는 말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니깐.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의 특정 정책에 반기를 드는 어떤 집단들에게 불복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건, 불복종에 대한 실례다.
시민불복종에 대한 논의는 부당한 법이나 제도의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디까지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유의할 점은 불복종이 합법적이냐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불복종은 그 자체로는 불법이다. 그럼 난 불법을 부추기는(?) 글을 왜 읽었을까? 박물관에서 유물을 보듯 그리 읽었다. 이 글이 쓰여졌던 19세기 미국에선 무언가 혁명적인 글이었을지도 모르지만,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에겐 그저 빛 바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p13)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 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p33)
이 구절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과연 거대해진 정부의 권력에 맞설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의 불복종>에 대한 이야기는 전체 200페이지 중 60페이지 정도고 나머진 간단한 수필 형식의 글이 5개 정도 실려있다. 개인적으로 뒤에 실려 있는 글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무래도 <월든>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