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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호퍼 자서전 - 떠돌이 철학자의 삶에 관한 에피소드 27
에릭 호퍼 지음, 방대수 옮김 / 이다미디어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저는 이 책을 번역한 방대수님과 사연이 있습니다. 제가 문화일보 기자로 일하던 시절, 제게 글을 가르쳐준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 몇권의 책을 낸 허명에 들떠있던 저는 방선배(저는 방선배라고 부릅니다)로부터 '눈물이 찔끔나도록' 당해야했습니다. 벌써 9년전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간혹 아주 비슷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미와경부 역할을 한 배우가 방선배와 아주 닮았습니다. 전반적인 골상, 눈웃음치는 것이 모두 그러합니다. 방선배의 특징이라면 좀더 인상을 찡그리고, 마치 '꼰대'처럼 노려본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무엇인가 글을 쓸 때면 방선배가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환상에 젖곤 합니다. 멈칫하게 되지요.
방선배가 에릭호퍼 자서전을 번역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드디어 챤스가 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흠을 잡아내서 잔뜩 괴롭혀줘야지...하는 심통이 났지요. 또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에 내쳐 읽어내렸습니다.
음...에익호퍼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었더군요. 전혀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가 스스로 공부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만들었습니다. 기존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데다, 늘 노동을 하는 긴장 속에서 사물을 관찰했다는 장점이 그의 이야기에 고스란히 녹아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구체적이고, 신선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쉽게 공감을 얻어냅니다.
방선배는 늘 저에게 '손에서 책을 놓질 말아라!'며 공부하기를 강조했는데, 에릭호퍼가 마침 그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 책의 136페이지를 보면 (노동자로 추정되는) 한 무리의 곁에서 외롭게 책을 읽고 있는 에릭호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실려있는 에릭호퍼의 사진들 중에서 에릭 호퍼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라고 봅니다.
굳이 방선배가 이 책의 번역을 결심 내지 수락한 이유가 무얼까. 번역료에 관심이 있었을 사람은 아니고. 이 책을 읽으면서 늘 궁금했던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에릭 호퍼의 삶을 알게되면서 저는 에릭 호퍼의 모습에 방선배가 오버랩되는 환상에 자주 빠졌습니다. 방선배가 서울대를, 그것도 석사까지 끝낸 인텔리 출신이라는 점을 제외한다면 방선배는 에릭 호퍼와 닮은 꼴입니다. 늘 (영어로 표현하지면) Critical하게 생각하는 것을 즐기고, 미간을 찌푸려가며 세상을 가감없이 관찰합니다. 검증되지 않는 상식들, 불필요한 사변들, 허위들....방선배가 끔찍히도 싫어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변화가 정말로 빠릅니다. 이를 틈타 온갖 요설과 허위가 준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매일의 노동을 즐기며 그 굳은 땅 위에서 세상을 가감없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릭 호퍼가 지금 한국땅에서 유의미하다면 이런 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습니다. 특히 에릭호퍼가 주로 활동했던 캘리포니아주에 살고 있습니다. 해서 이 책의 여러 지명들이 눈에 익숙했습니다. 이제 이를 재산으로 한가지 심술을 부려볼까합니다.
이 책에 보면, UC Berkeley를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라고 번역을 해두었더군요. 아마,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를 직역한 것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곳 교포사회에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 캠퍼스라고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냥 다를 'UC Berkeley'라고 부릅니다.....헤헤헤 십년 체중이 씻은 듯이 내려가는 것같습니다. :-)
나중에 만났을 때 혼날 것이 두려워 조금 약을 쳐두자면, 이 책은 아주 번역이 유려하게 되어있습니다. '영어투'의 표현을 '뜻을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방선배는 늘 허름한 차림입니다. 재산도 없는 사람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한쪽 어깨는 아래로 쳐져있습니다. 만약 교보문고에서 이런 중년의 사내를 만나걸랑 방선배가 아닌지 슬쩍 물어보세요. 책을 읽고나니 또 방선배가 그립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