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흥선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펼쳤을까? - 박규수 vs 흥선대원군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45
이정범 지음, 조환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흥선대원군~
쇄국정책을 추진한 분이지요, 왜 펼쳤는지에 대한 재판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있는 책이랍니다.


원고는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로 태어난 개화사상가 박규수예요.
박규수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문호 개방의 기회를 놓쳐 결국 조선 왕조가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쇄국 정책의 책임을 묻고 공식적인 사과를 요구하는 재판입니다. 박규수는 일찍이 외국과 문물을 교류하는 개화의 필요성을 깨달아 개화파 사상가들을 키워낸 개화파의 시조예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당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세계 정세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였지요.  게다가 흥선대원군은 병인박해를 일으켜 희생자를 내고 병인양요까지 이어져요.  흥선대원군도 이 부분을 인정하기는 하나 외세는 순수하게 들어온 선교자들조차 조선의 문을 열고 들어와 삼키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였기에 무작정 문호를 개방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며 반박하였어요.

흥선대원군은 오히려 그럴수록 조선을 강한 나라로 세우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서구 열강뿐만 아니라 가까운 나라 일본 또한 조선을 삼키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므로 조선을 지키기 위해 나라의 문을 닫아둘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원고측 변호사는 쇄국정책이 조선 왕조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밝히면서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세상을 모르게 하는 정책을 펼친 흥선대원군은 조선이 멸망의 길로 가는 장본인을 만들었다고 말하였고, 피고측 변호사는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쇄국정책을 펼친게 아니었고 제너럴셔먼호 침략사건, 오페르트의 남연군 묘 도굴 사건,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같은 서양 세력의 무력 도발을 겪은 후 서양 오랑캐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에 신무기를 개발하는 데 투자하고 조선의 국력을 먼저 키운 후 외국에 문호를 열 생각이었던 것이라고 옹호하였어요.

이에 판사는 원고 박규수의 청구 내용을 부분적으로 인정해요. 

흥선대원군이 추진했던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역사는 후퇴되었고,

일찍이 자주적인 통상개화를 추진했다면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한국전쟁 같은 비극을 겪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원고측 주장을 타당하다고 하지요.

하지만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적용되지 않으니 오늘날의 시각이 아닌 당시의 시각으로

쇄국 정책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점에서 원고의 주장은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게 판결 내용이에요.

  

정말 '만약 이러일 했다면....'이라는 가정법이 역사에서 통한다면,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의 발전이 지금보다 더 빨랐을까요? 이에 대한 답변은 어디까지나 상상적 사고에 맡길 수밖에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네요. 이 판결을 통해 넓은 시야를 갖지 못한 꽉 막힌 정치적 성향의 소유자로만 여겼던

흥선대원군에 대한 나의 판단이 어느 정도 유연하게 열리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역시 흥선대원군과 같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