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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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에쿠니 가오릴를 처음 만난 것은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현실의 본질적인 고독과 결핍..

 그리고 일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빼놓을 수는 없다.

 우리가 겪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어쩜 끄리

 인생을 느끼게 하는지, 삶의 순간순간을 되돌아보게 하는지..

 

  

"수박향기"는 11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1개 이야기 모두 어찌보면 단순한 일상의 일들이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모두 소녀이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 같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다.

열한 명 소녀들의 비밀 이야기..

비밀이라고 해서 무슨 대단한 것을 폭로한다는 느낌보다 그저 물흐르는 듯한 일상의 이야기를

그냥 차분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 차분한 어조 속에는 소녀 감성 본연의 순수함도 있었지만

조금은 충격적이거나 놀랍거나 한 이야기들,

약간은 의외의 무겁고 잔인한 표현들 역시 심심찮게 등장했다.

 

죽은 사람을 덮어씌우듯 이불째 쓰러지며 즐겼던 장례식 놀이가 등장한 '남동생' 이야기

아이들로부터 괴롭힘을을 당하는 등딱지를 벗은 거북의 모습을 보고 싶어 부엌칼로 배에 금을 그어 죽게 만들고, 겨울잠놀이를 한다며 땅에 구덩이를 판 후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대 '후키코씨' 이야기

그림자 극을 순회공연하고 있는 대학생과 헤어지는 날 주머니에서 면도칼을 꺼내 스즈키 진타의 손바닥을 그은 '소각로' 이야기

개미떼가 잔뜩 붙은 수박을 먹는 모습이 등장한 '수박향기' 이야기

 

무엇보다 타이틀인 '수박향기' 이야기는

휘리릭 읽어 내려간후 끝부분에서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

엄마의 동생 출산으로 인해 당분간 숙모네서 지내게 된 나는 매을을 울며 지낸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가득한 서글픈 저녁때가 되면 그 마음은 더한다.

계획에도 없게 무작정 숙모집에서 도망쳐 나온 나는 밤이 되자 강 건너 조그만 불빛이 보이는 집으로 들어간다. 남의 집을 엿보고 있는 순간, 뒤에서 커다란 수박을 껴안고 있는, 분노로 시퍼렇게 빛나는 눈을 가진 아줌마를 만난다.

아줌마를 따라 들어간 방에는 윗몸을 공유하고 있는 샴 쌍둥이이 남자아이 둘과 만난다.

등꼴이 오싹하도록 소름 끼친 나는 방으로 들어가자는 아줌마의 제안에 들어가 앉는다.

방에 들어가 싹둑싹둑 소리나게 자른 수박을 먹다가 잘라 놓은 수박에 잔뜩 꼬여 있는 새까만 개미를 목격한다. 무언가 불길하고 오싹한 집이다.

세 평짜리 방에서 잠을 잤다. 겁이 날 정도로 조용하고 후덥지근했지만 신기하게도 푹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덧문을 여니 경찰 아저씨와 숙모 부부, 할머니가 서 있다.

 

아침일찍 한 여자가 경찰서에 찾아와 이 집에서 여자아이 소리가 난다며 신고했다고 한다.

"어제는 어떤 여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렇게 말하자 경찰 아저씬 노숙자였겠지,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비어 있는 집이라면서.

 엄마가 동생을 낳은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 밤의 일은 숙모에게도, 우리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수박향기' 22쪽 중에서

 

  

 

아홉살 여름, 주인공은 꿈을 꾼 것일까.

어쩌면 아홉살 숙모네집에서 지내는 몸서리치게 고독한 마음이 무언가 불안정한 가족의 모습으로 환상 속에 나타났을 수도 있고, 엄마가 있는 가족의 공간에 대한 그리움이 만들어 낸 따뜻한 환상의 품이 아니었을까...

아직까지도 긴 여운이 남는 이야기이다.

 

"수박향기"는 일상의 비밀스런 일들을 조심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뭐,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특별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드는 아이러니함,

공감이 가면서도 공감할 수 없는 모호함도 느낄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억지로 꾸미는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수수한 이야기..

읽는 내내 에쿠니 가오리, 그녀만의 차분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에

폭염의 열기을 식힐 수 있는 시간 여행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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