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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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의 축제’

 

<염소의 축제>를 다 읽고 나서 느낀 점은 무언가 방대하고 복잡한 미로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의 사연이 얽히고설키는 이야기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줄기와 하고자 하는 이야기만큼은 분명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독재와 그로 인한 상처에 대해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소설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 보다 쓰게 된 것이 다음 두 개의 챕터이다.

 

네오콘의 초상

 

2010년 노벨 문학상 수상이 결정되자 바르가스 요사는 “나의 정치적 견해 때문이 아니라, 내 문학작품 때문에 수상을 결정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 말을 순수한 의도로 해석하면 그가 작품 본연의 문학성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발언 속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가 옹호 받아 마땅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재에 대한 저항과 반역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 또한 훌륭하지만, 소설 자체의 작품성을 주목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문학작품이 아닌 정치적 견해 때문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면 그 견해는 과연 타당한 것이었을까?

요사는 1970년대 초반 전향하여 쿠바 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좌파 지식인이었던 과거와 단절한 채 신자유주의 편에서 적극적인 정치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매력적인 독재자 소설 뒤에 ‘맹신론자’의 얼굴을 감추고 있는 요사는 네오콘이자 이라크전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여기서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분명 독재에 저항하고 그 속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그는 네오콘이자 이라크전 지지자이다. 미국의 패권과 독재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다른 나라의 독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일까?

작품 속에서 트루히요 측은 반미 세력이고, 발라게르 측, 또는 반트루히요측은 친미 세력을 대표한다. 트루히요 집권 기간 동안 계속된 미국의 압력을 받으면서 반미로 돌아섰던 도미니카는 트루히요가 제거되고, 그의 친족들이 나라를 떠나면서 결국 발라게르의 뜻대로 미국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물론 작품 속에서 발라게르와 반트루히요 측의 열광적인 미국 찬양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독재를 타도하고 진정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 도미니카에는 미국의 도움과 영향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은연중에 가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도 과연 그러하다면 다행일지 모른다. 허나 도미니카와 카리브 해의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의 개입은 단지 자신들의 이권과 패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 속에서 도미니카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자신들의 주체성을 상실해갔다.

작가와 작품은 별개의 문제로 놓고 봐야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소설 자체로 본다면 <염소의 축제>는 스웨덴 한림원이 지적한 바와 같이 ‘권력 구조의 지도를 그려내고, 개인의 저항, 반역, 좌절을 통렬한 이미지로 포착한’ 좋은 소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한 번쯤 작가와 작품을 연결시켜 바라봐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조금 극단적인 비유일 수 있겠지만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자. 그러니까 히틀러가 <쉰들러 리스트>를 연출했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가.

 

보이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이 소설이 출간된 시기는 2000년도이다. 1961년 트루히요의 죽음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이후에 왜 요사는 다시 그의 이야기를 갖고 온 것이었을까? 그것은 이 소설이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소설을 넘어 기본적으로 상처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란 40년이 흐르고, 50년이 흐른 오늘에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상처란 개개인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그는 말하고 있다.

이 소설 속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행동을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푸포 로만 장군이다. 그는 약속대로 트루히요가 제거됐음에도 군과 시민의 합동평의회를 이끌어 트루히요의 잔재 세력들을 제거한다는 계획을 실행시키지 못했다. 소설 속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이렇게 되뇔 뿐이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건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누구나 가장 뚜렷하게 느꼈을 의문이었을 것이다. 그건 바로 트루히요가 죽었음에도 그는 푸포 로만 안에 살아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트루히요는 로만의 존재 속에 두려움과 공포로 각인되었고, 그건 쉽게 지워질 수 없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상처를 가진 인물 중 책속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사람은 아무래도 우라니아 일 것이다. 그녀는 그 상처에 대해 자신의 삶으로 말해준다. 그녀는 35년간 조국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아버지와도 연락하지 않았다. 트루히요에게 처녀성을 뺏긴 이후 어떤 남자와도 사랑하지 않았고, 관계 맺지 않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고, 지워지지 않는 내면의 상처의 전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녀의 상처에 대해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것을 ‘이야기’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는 이자크 디네센의 말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소설이 우리의 가슴을 적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우라니아, 그녀가 35년 만에 자신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 끝내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은 바로 지식인 아구스틴 카브랄이다. 그는 끝내 딸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상처’를 그녀가 없는 35년 동안 안고 살아가야 했다. 그리고 그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며 겨우 생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그가 딸에게 안긴 상처는 씻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연민을 느낀다. 그건 그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좌절하고 방황했으며, 한 순간의 어리석은 결정을 범하고 말았던 한 사람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끝내 그에게 희망의 제스처를 보여주지 않은 것일까? 그건 독재에 가담한 이들이 결국 평생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결국 요사가 이 소설을 21세기에 내놓은 이유는 독재의 상처란 것이 결코 해묵은 이야기가 아니며 그것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라니아와 아구스틴, 푸포 로만, 그 외 다채로운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즉, 어느 한 사람의 관점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들 각자의 상처에 대하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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