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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나의 시간은, 어떤 별은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읽고
나의 시간은, 어떤 별은
슬픔도 그리움도 노래하지 않지만,
오직 거기에 있을, 낮은 목소리로 말하던 한 권의 책을 기억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스물의 노트」 中……
떠나간 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몫이다. 그것이 아름답건 혹은 추하건 간에, 잊히지 않는 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아등바등 사는 것이 인간이거나 인생이란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희미해지는 기억을 소생시킨다. 그 시작은 최승자 시인의 시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였다. 독자도 그렇지만, 작가에게도 청춘 속의 외딴 삶은 쉽게 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쉽게 잊을까봐 그것을 꼭 붙잡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저마다 평생 간직하고픈,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품고 산다. 때로는 그 기억 하나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 만화 영화의 주인공은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지워진다면, 그때 난 이미 죽은 것과 다름없어.”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나를 잊지 못해 슬픈 것처럼,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오래오래 숨 쉬고 싶어서 이렇게 가파르고 숨 차는 길을 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 불모의 의지는 윤이와 단이 그리고 미루와 명서를 환각된 기억 속으로 불러온다. 그리고 책을 펴든 수많은 이들은 그들 네 사람이 불러내는 저마다의 누군가를 상시하면서 울거나 웃거나 혹은 쓸쓸하거나 기뻐하면서 기억과의 조우에 감동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나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되는 일이 나이 먹는 일과 비례하는 건 아니다. 세월이 쌓인다고 알게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내게는 오히려 청춘 시절보다 지금이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에 더 서툴고, 느닷없이 찾아드는 죽음의 소식에 매번 당황하며 휘둘리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눈 내리는 새벽에 이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다가 가만히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싶다. 그게 지상에서의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한다. 책상 위에 쌓아놓은 책을 들어낼 때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죽음의 기척들을 물리치고 나는 끝내 책상을 말끔히 정리했다. 병원에 가기 위해 비누질을 여러 번 해 세수를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나도 모르게 책상 쪽을 돌아다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 본문 중에서
스물에 읽었던 신경숙 소설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 더 애처로웠고, 조금 더 막연하거나 쓸쓸했다. 그 안에는 꿈을 잃어가는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외면하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니, 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게 그것뿐이었다는 게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그즈음에 어느 자리에서 “난 니들이 어떻게 살지 다 보인다, 보여.”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많은 선배였다. 응? 그 자리에 있던 우리들은 골몰한 표정으로, 무슨 뜻이지? 했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세상을 모르겠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말뜻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가장 멸시했던 말은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것이었다.
이 도시를 알기 위해 걷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걷는 일은 스쳐간 생각을 불러오고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게 했다. 두 발로 땅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숲길이 나오고 비좁은 시장통 길이 등장하고 거기에는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말을 걸고 도움을 청하고 소리쳐 부리기도 한다. 타인과 풍경이 동시에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윤이에게 단이와 미루 그리고 명서가 있었다면, 내게는 S가 있었다.
세상 밖, 저 멀리로 사라진 S가……, 변치 않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에게는 S가 있었고, 그 시간은 변치 않을 것 같았다. 내게 처음으로 신경숙의 소설을 추천했던 것도 S였고, 서대문의 헌책방에서 김소진 소설을 집어준 것도 S였고, 현대미술관을 데려가준 것도 S였고, 홍대 거리를 구경시켜준 것도 S였으며, 스물이란 시간 속에서 꿈을 잃어가는 ‘나’를 다독거려준 것도 S였다. 따지고 보면 S였기에 가능했던 일들이 많은데, 지금의 나는 마치 S 따윈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그가 곁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S는 나보다 세 살이 많던 한 학년 선배였다. 시오노 나나미와 앤 라이스 등의 환상 작가를 동경했고, 낯선 사람을 보면 그 얼굴을 기억하고 싶어서 데생을 하던 엉뚱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가 나를 위로했던 건, 내가 늘 슬퍼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어렸고, 아니, 어리다는 핑계로 모든 걸 기만했었고, S를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마 이맘때였을 것이다. S는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짊어졌던 무겁고 고통스런 짐은 무엇이었을까. 짐작하는 게 있어도, 차마 떠나간 자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될 뿐이었다. 신경숙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가 책꽂이 한편에 꽂힌 것처럼, S도 내 마음 한편에 꽂히게 되었다. 그리고 조용한 나날이 흘렀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본다.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들만 떠오른다. 진실과 선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올바름과 정의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폭력적이거나 부패한 사회는 상호간의 소통을 막는다. 소통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엔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아 더 폭력적으로 된다.
- 본문 중에서
짧으면 짧고, 길으면 긴 시간이었다. 그간 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한테는 이런, 이런 일들이 있었어.”하고 말하면, 상대방 친구들에게서도 “나한테도 그런, 그런 일들이 있었어.”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셋이 모인 자리에서 한참이나 웃음이 계속 되었다. 결국 너도 나도 다를 게 없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삶의 무늬를 무서워했다. 내가 그들과 다르면 어쩌나, 나 혼자 뒤처지면 어쩌나……. 그제야 “난 너희들이 어떻게 살지 다 보인다, 보여.”라는 말이 이해됐다. 그 말을 이해하는 데, 못해도 육여 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리고 다시 읽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좀 더 친숙했다. 거기에는 꿈을 잃어가는 ‘나’도 있었지만, 다시 꿈을 찾아가는 ‘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등을 바로 세우고 앉았다. 언.젠.가.언.젠.가.는.정.윤.과.함.께.늙.고.싶.다. 그의 글씨였다. 여기에 이런 문장이 씌어 있었던가. 그러니까 이 문장을 지난 팔 년 동안 여기에 봉인되어 있었던 것인가. 나는 노트를 커버에 끼우려다 내려놓고 새벽을 지나온 아침빛이 책상 위로 번져들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에밀리가 슬며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노쇠했어도 여전히 푸르른 눈. 걱정 말라니까, 에밀리…… 중얼거리며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고 팔 년 만에 발견한 그의 갈색노트에 한 문장을 이어 써넣었다. 내.가.그.쪽.으.로.갈.게.
- 본문 중에서
스물에 썼던 시를 지금 다시 쓴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나의 시간은, 어떤 별은……
그 이후에는 어떤 문장, 어떤 감정들이 찾아올는지……. 창가와 마주한 낮은 책상에 앉아 나는 스물의 노트를 덮었다. 옆에는 희재 언니에게 이별보다는 또 다른 만남을 고했던 『외딴방』이 놓여 있었다. 나 또한 S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S에게 또 다른 만남을 고하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 손가락을 꼭 한번 오므렸다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