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엘 Ciel 8
임주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한낮의 환희여! Daylight Delight!'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이비엔 마그놀리아가 쓰는 마법 주문이다. 그는 (마법을 사용하는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마녀고, 로우드 마법학교의 우등생이며, 시민을 마수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펜타곤 크라이시스 클럽의 멤버다. 첫머리에서부터 들통났다시피 이비엔이 펼치는 이야기 『CIEL(씨엘- 하늘을 뜻하는 프랑스어)』은 판타지 장르에 속한다.

판타지는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폼이 중요하다. 내가 발붙인 이 세계를 두고 굳이 새 세계를 찾아간다면,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곳이어야 의미있지 않겠는가. 여성 작가의 판타지 만화는 특히 미려한 비주얼이 전면에 부각되는 경우가 많다. 장르가 아름다움을 보장한다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다.

『CIEL』의 장면장면도 참 아름답다. 판타지인 만큼 배경이나 특수효과 등이 눈을 사로잡을 수도 있겠는데. 이 작품에선 주로 미형 캐릭터가 마음을 훈훈케 한다. 학교 안의 2대 미녀로 소문난 이비엔과 그의 파트너 라리에트는 물론이요, 동급생 제뉴어리도 소녀심에 불지르는 미소년이다. 그의 단짝 도터도, 그들의 마법교사 크로히텐도 훌륭한 미남. 배경보다 인물이 도드라지는 연출이 대다수인지라, 어여쁜 교복+가느다란 펜선으로 무장한 인물들을 내내 흐뭇하게 감상할 수 있다.

인물 사이의 관계 또한 흥미진진하다. 백합 코드(여성간의 복잡미묘한 마음을 다룬)와 야오이 코드(남성간의… 이하동문)와 일반(?) 로맨스 코드가 전부 들어있다. 게다가 각 코드 애호가가 충분히 상상을 펼칠 정도, 비애호가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선을 지킨다. 초점 방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읽히는 재미를 선사한다.

인간관계에서는 연애감정 못지 않게 유대감도 중요할진대, 『CIEL』은 이 또한 주의깊게 다룬다. 외로운 어린 시절을 견뎌낸 사람들이 기숙학교에서 만난다. 목숨이 오가는 힘겨운 나날을 함께 헤치며 자신의 능력만이 상대를 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비엔과 라리에트, 제뉴어리와 도터는 그리도 애틋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네들을 항상 뒤에서 지키는 크로히텐까지도. '그런 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바랐던 '결코 혼자 두진 않겠다는 영원한 약속을'(3권), 기실 우리 모두의 꿈을, 『CIEL』의 인물들은 질투나도록 보여 준다.

허나 이 선남선녀들도 때로는 배경에 압도된다. 『CIEL』이 무대 배경의 근간으로 삼는 근대 유럽 자체도 이국적인 화려함을 담고 있지만, 작가는 자연 풍광이 얼마나 신비로운지를 매우 공들여 묘사한다. '칠흑의 밤에 내리는 선연한 은빛의 한낮 비'(3권), '포플러 나뭇잎이 은화처럼 휩쓸리는 무거운 바람소리'(6권) 등의 나레이션은 만화의 분위기 조성에 글이 그림 못잖게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대사와 나레이션이 대체로 간결명료한 편이라 저 시적인 묘사가 더욱 돋보인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꽃은 어느 순간 바닥흙에 뒤엉켜 버리므로 더 아름다운 법이다. 모든 것은 결국 끝을 맞는다.『CIEL』의 부제 'The Last Autumn Story'는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주는 씁쓸하고 달콤한 여운을 담고 있다. 이비엔의 발랄함과 작가의 개그센스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쓸쓸한 기운이 맴돈다.

이야기의 기둥, 이비엔의 생애가 매우 짧으리라는 것이 작품 속에서 여러 번 알려졌다. 『CIEL』은 이비엔의 이야기와 다른 인물의 이야기 사이를 오가며 진행되는데, 다른 인물의 운명도 그리 밝아뵈지 않는다. 왕국도 위기다. '고스 나이트'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가 왕국 안에 마수를 끌어들였다. 배후에는 쉽사리 물리치지 못할 존재가 버티고 있다. 이비엔네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여름 방학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방학은 곧 끝난다. 인생의 한낮도 당연스레 지나가 버린다. 그렇더라도 어쩌랴. 바로 그 때문에 아름답다는 걸 안 이상은 그저 기원하는 수밖에. 부디 존재하는 동안 한껏 빛나기를. 모두 한낮의 환희처럼- 찬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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