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은 조선이 내부에서 무너지는 과정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제대로 된 싸움 한번 없이 모래알처럼 허물어진다. 그의 말대로 ‘치욕은 크고 깊었다.’ 나는 읽는 도중 안타깝고 답답하여 책을 두어 번 덮었다. 사실 <남한산성>의 사건은 세 개뿐이다. 입성하여, 자기들끼리 싸우다, 항복한다. 그 간단한 과정을 400페이지에 걸쳐 늘여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김훈의 의도는 무엇인가? 모국의 굴욕을 소재로 날쌔고 단단한 필체를 자랑하기 위함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의도는 결말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읽을 수 있다.
몽고병들이 남한산성 안에 있는데 살림집이 대부분 불타고 시체가 길거리에 널리다. - 인조실록 1637년 2월 1일
청군은 화친이 이루어진 뒤에도 잠잠하지 않았다. 임금이 떠난 산성을 노략질하고 부수었다. 도륙의 도가니에서 살아남은 것은 없다. ‘남한산성’에서 온전한 것은 성벽뿐으로 그 안의 생명들은 연못에 독약을 부은 것처럼 절멸했다. 그러나 김훈의 <남한산성>은 파괴되지 않는다. 소설 속의 청군은 행패부리지 않는다. 무도회장의 남작처럼 신사적으로 철군한다. 청군이 돌아간 자리에 성을 떠난 백성들이 돌아온다. 농사꾼은 땅을 갈고, 대장장이는 쇠 질을 하고, 부인들은 밥을 짓는다. 그렇게 봄이 움트고 삶이 이어진다. 소설의 결말을 평화로운 봄날로 처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조선 사람의 몰락을 그려놓고 마지막을 희망으로 덧칠한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작가의 ‘권유’로 받아들였다. 우리가 비록 약소하지만, 그 안에 많은 다툼이 있고 세월이 어지럽지만, 그래서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보라. 임금의 머리가 땅바닥에 박히고 병사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그럼에도 용기 내어 살아보라. 말(馬)소리보다 말(言)소리가 시끄럽고 성 밖의 적보다 성안의 적이 밉겠지만, 그래도 같이 한번 살아보라. 땅의 길이 이어지듯 삶의 길도 이어진다. 네 삶이 괴롭고 고달픈 것을 안다. 그럼에도 살아보기를 진심으로 권유하노라.
나는 김훈의 권유를 기쁘게 받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