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여름 - 류현재 장편소설
류현재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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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수 문학을 읽는 시간이 참 좋다.

활자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뭔가를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전공서적이나 연구논문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다 좋아하지만, 소설을 읽고 있으면 그 안에 푹 빠져 책 속의 세계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좋아서 제일 좋아하는 편이다. (에세이는 공감되는 정도가 작가에 따라 크게 갈리는 편이고, 시는 완전히 몰입하기엔 흐름이 금방 끊기는 느낌이라 살짝 아쉽다)

최근엔 주로 요즘 트렌드에 대한 책이나 배움을 위한 책들 위주로 읽느라 읽지 못했던 소설...

그래서 그리움이 컸는데 이번에 강릉 여행을 가서 오랫만에 실컷 읽었다.


강릉에 가져갔던 책은 류현재 작가님의 장편소설 네 번째 여름.


나는 권위에 호소하는 편도 아니고, 그걸 믿는 편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나라 심사제도에 불신마저 있는 인간이라

책 띠지에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수상작' 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도 시큰둥했다.

(... '대한민국 콘텐츠' 심사가 잘못됐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두께는 적당히 도톰하고 크기도 크지 않아서 가벼운 1박 2일 여행가방에 짐스럽지 않게 들어가줘서 좋았다.

내가 요즘 홀로그램에 심하게 꽂혀 있다고 얘기했던가?

요즘 만들어대고 있는 스티커며 키링이며 죄다 홀로그램 투성이다. 반짝거리는 느낌도 좋지만 방향에 따라, 랜덤하게 항상 다르게,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는 색의 조화가 마치 우리네 인생같은 느낌이라 좋다.


표지를 잘 보면 바다에 섬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처음엔 제목이랑 표지를 보고 공포나 스릴러물인가 싶었는데 그런 분야는 아니고 어두침침한 가족소설이라고 해야될지,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해야될지 한가지로 분류하기 힘든 굉장히 특이한 장르의 소설이다.

사실은 책의 내용과 전반적인 분위기를 적잖이 내포하고 있었던 책 표지 일러스트.

주로 드라마 방송작가로 활동했던 이력 때문인지 류현재 작가님의 소설은 스토리텔링이 참 촘촘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늘고 질긴 날줄과 씨줄로 작은 치어 한마리 빠져나갈 수 없게 짜놓은 그물망 마냥 빈틈없이 짜여져 있는 전개들.

질긴 힘줄과 단단한 뼈마디도 턱턱 끊어내는 푸줏간 주인의 칼 솜씨처럼 이런 먹먹한 이야기를 무덤덤한 문체로 잘도 풀어낸다.

현직 검사인 정해심(딸)은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입원중인 아버지 정만선 같은 병원에 입원 중인 할머니 고해심에게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에 방문하게 된다.

사건에 대해 조사할수록 단순한 성추행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고 믿기 힘든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성범죄와 관련된 범죄 소설이거나 성범죄자들에게 엄한 검사인 여주인공이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개과천선(?) 스토리인가 싶었는데 절대 그런 단순한 얘기가 아니더라고...

이토록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여름 소설은 없었다!

드라마 한 편을 정주행한 듯 완전무결한 서사!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던 책 내용은 띠지에 있는 독자평처럼 강렬하고 먹먹했다.


지금은 파킨슨병과 치매에 걸린 노인이 되고 나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던 그 시간마저도 찰나에 머물수 밖에 없었던 두 남녀의 사랑.

모든 진실이 드러난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잘못을 따지고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는 측은함이, 슬픔보다 아픔이 먼저 들어온다.

이번에 다녀온 아름답고 따뜻했던 여름 오후의 강릉 경포 바다와는 사뭇 다른...

십년 전쯤인가, 뛰어들어야겠다고 수십번을 되뇌이며 들여다 봤던 제주 용두암의 시꺼먼 초겨울 밤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책의 모든 내용이 사실은 여주인공 '해심'의 독백인 이 프롤로그에 담겨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굳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욕망을 쫒는 평범한 인간의 악함이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결합됐을 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최악의 결과...

그 해 남해바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고 수십년의 시간을 건너 현재에 어떻게 매듭을 맺게 되는지 따라가는 과정이 가슴아프면서도 흡입력이 있어서 흠뻑 몰입해서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해심과 만선이 문어처럼 사랑을 나누었던 문어무덤.


특수효과 하나 없이, 유명한 배우 한 명 없이 사람들을 TV앞에 앉게 만드는 드라마처럼 너무 재미있어서 순식간에 정주행 해버렸지만...

여름 밤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으려고 가져갔던 책이었는데 오히려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던 책이다.


사실 정확히는 여름밤 바닷가에서 읽은 것은 아니고, 오며가며 지하철과 고속버스 휴게소에서 그리고 깊은 산 속에 있는 펜션에서 읽었다.

그래도 여름 밤에 읽기 좋은 책이다. 서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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