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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세계 - 페미니즘이 만든 순간들
손희정 지음 / 오월의봄 / 2020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손희정씨의 칼럼을 인터넷 기사로 종종 읽고는 했는데, 흔하지 않은 단독 칼럼집이 나왔다고 해서 서평단을 신청했다.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나는 소수자인권에 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청소년인권으로 치환해보는 습관이 있는데(;;) 주변에서 늘 듣고 경험하는 이야기가 청소년인권 문제다 보니 그렇게 된다. 아무튼 이 책도 그런 사고 습관으로 읽었다.
1장, <자라지 않는 남자들과 남성연대> 에서는 남성들이 박정희로 대표되는 남성 영웅에 대한 트라우마 혹은 향수, 그리고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환상이 여전히 상징적인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를 ‘죽이지’ 못한 남성들이 여전히 ‘어린 아들’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어린 아들’로 남아있다는 말은 남성들이 스스로를 피해자화하고 있다고 읽힌다. 문재인 정부를 가리켜 ‘소수 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지켜달라’고 징징거리는 것, ‘잘 나가는 여자’와 대립되는 ‘고개 숙인 남자’의 프레임을 만드는 것, 인셀(비자발적인 순결주의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 등이 남성을 피해자의 위치에 놓으려고 하는 현상이다. 이는 남성/가부장제가 가진 권력을 비가시화하고, 그로 인한 문제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사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한편, ‘어린 사람’이 ‘피해자’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점은 다소 불편하다. 우리 사회에서 어린 사람이 피해자로 인식되는 것은 매우 익숙하다. 예를 들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애 관계에서 사회는 당사자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어린 사람을 피해자 또는 ‘도둑맞은’ 대상으로 (나이가 많은 쪽을 도둑놈이라고 부르는 것) 상정한다. 물론, 책에서도 나왔다시피 위험은 평등하게 오지 않기 때문에 자원을 덜 가진 어린 사람이 피해를 더 크게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사람을 아무 맥락 없이 피해자로 등치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어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저항하고 있는 이들을 가려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아버지’를 ‘어른들로 이루어진 기득권 제도와 관행’로 비유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렇다면 그 중 하나는 학교다. 많은 청소년활동가들은 학교에 불만을 가지면서 활동을 시작한다. 스쿨미투 사건들을 통해 드러났다시피, 학교는 교장과 교사의 권력으로 학생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교사의 말 한마디에 책상 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거나, 교사가 하는 성희롱에 가까운 말을 참고 들어야 한다.
폭력적인 학교를 견디지 못해 자퇴를 하거나 교사와 맞서 싸우다 강제로 전학을 당한 주변 활동가들이 있다. 입시를 빌미로 학생들을 협박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대학/입시거부선언을 한 활동가들도 있다. (같은 출판사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에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학교에 저항할 때 동시에 가부장제에도 저항하게 되는데, 애초에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식을 너그럽게 대하는 아버지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식의 학력이 미래에 가부장의 부양책임과 경제 상황 등과 연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아니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학교를 경험해본 대부분의 사람은 학교의 부조리함에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부조리함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때, 폭력의 기억은 미화되고, 또는 ‘당할 만한’ 것이었다고 정당화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학교를 ‘죽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학교가 바뀌지 않나 보다.
인상 깊었던 또 다른 글은 2장의 ‘수치심의 학교’였다. 글쓴이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 진상 규명을 위한 청문회에 참석한 대기업 총수들의 무능함의 기괴함을 느꼈다고 했다. 무능한 답변만을 늘어놓던 이들이 노동자들에게는 온갖 종류의 ‘스펙’과 자기계발의 신화를 강요하는 각자도생의 담론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만들어 우리를 구속하는 ‘유능함’이라는 주술로부터 벗어나되, 그들에게는 무능을 가장한 부정에 대한 응당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89p).”
학교를 뛰쳐나온 청소년활동가들에게 사회는 능력이라는 판단 기준을 끝없이 들이민다. 어떤 활동가는 ‘사실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학교를 못 다닌 것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학교가 가진 문제는 보지 않으면서, 비학생 청소년 개인을 ‘문제가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프레임화하는 사회의 영향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학교를 나오지 않았으니 대신 다른 전문적인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라’는 압박도 심하다고 했다. 세습 받은 재벌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능력을 요구받지 않지만 그런 위치가 아닌 노동자들은 능력을 요구받는 것처럼, 학생이라는 위치를 갖지 못하게 된 비학생 청소년은 학생 청소년보다 더 많은 능력을 요구받는 것을 알 수 있다. 비학생 청소년들에게 각자의 삶의 궤적을 묻지 않고, 편견으로만 대하는 사회의 무지 역시 부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쭉 읽으면서 강남역 살인 사건, 안희정 성폭력 사건, 낙태죄 폐지, 백남기 농민 사건, <까칠남녀> 종방, 트랜스젠더 A 하사 강제 전역 사건까지 그 당시 집회에서, 또는 SNS를 통해 분노하고, 또 기쁨을 나누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밤늦게까지 페이스북 라이브를 붙잡고 백남기 농민의 시신 부검을 막기 위해 병원 앞을 막는 활동가들을 응원하던 때도 생각나고, 낙태죄 폐지 된 날 저녁에 집회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정신없이 춤추던 때도 생각났다. 이 책에 실린 칼럼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함께 달려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낀다. 뭔가 든든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