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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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기억은 영원하기에 우리는 작별하지 못한다.

일산 탄현동과 중산동에서 거의 20년을 살다가 여기 임실로 내려왔어요.
탄현마을에 살 때는 마을 뒤쪽에 아담한 산, 황룡산이 있어서 곧잘 산책길에 나서곤 했지요. 황룡산 정상에서 내리막길로 내려가서 길을 건너면 고봉산을 올라갈 수가 있어서 제법 등산다웠어요.
그런데 황룡산 내리막길 가는 왼편에 방수천으로 덮여 있는 큰 구덩이가 있어서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누가 뒤에서 나를 당기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다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곳에 서 있는 게시판을 읽어 보았어요. 금정굴의 사연은 이랬어요.
1950년 북한의 남침이후 3일만에 고양 지역은 인민군에 넘어갔고, 그들은 인민재판을 열어 우익 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합니다. 또 주민들을 인민의용군으로 징집했고요. 그러다가 그해 9월에 인천 상륙작전이 이뤄져서 9월 28일에 일산이 수복되었어요. 그때 좌익과 우익간의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국군에 의해 부역자들이 색출되기 시작했어요. 10월에 복귀한 고양경찰서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인민군이 아닌 이상 부역자들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주민들의 고발 속에서 이루어진 이 사건에는 개인적인 앙심에 의한 고발이 많았어요. 부역혐의자들 중 몇몇은 풀려났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금정굴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어요. 무고한 160명의 사람들이 ‘빨갱이’로 낙인 찍혀 재판 한 번 받지 못하고 학살당한 채 금정굴에 버려져 있었지요. 그러다가 1990년 고양시민회장 김양원에 의해 향토사 발굴 도중 금정굴 학살 사실을 접하고, 첫 조사가 들어가게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년 겨울, 남편이 읽어보라고 건네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고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검색해봤어요. 얼핏 듣기는 했지만 자세히는 몰랐던 사건이에요.
제주 4.3 사건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과북으로 갈라진 것이 원인이되어, 우익과 좌익의 싸움으로 인해 무고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된, 참으로 가슴아픈 사건이었어요.

‘당시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생업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 극심한 흉년등이 겹쳤으며,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에서 다시 경찰로 변신하고, 군정 관리들이 사리를 채우는 부정행위를 일삼는 등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에 경찰이 시위하는 군중들에게 발포하여 일반 주민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 도당은 반경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결과, 제주 도내 전체의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3.10 총 파업’에 동참하였다. 미군정은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들 교체하고, 경찰과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이 대거 동원하였다. 이로부터 4.3 사건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1년간 2,500명이 구금되고 테러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에 350명의 무장대가 우익 단체들을 공격했다. (…) 이승만 정부는 그해 10월 11일에 제주도 경비 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였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에 앞서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료되었고, 중산간 마을에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실시되었다.
1048년 11월부터 중산간 마을에 대한 강경 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산간 마을 주민 2만 명가량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의 일원이 되었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을 자행했다. (…)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발발 이후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이 사건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죄의 유무 에 관계없이 당시 군경 토벌대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이른바 ‘ 빨갱이’ 딱지가 붙어 피해를 대물림하였다.’ <출처: 과목별 학습백과 한국사 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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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2021년)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그녀의 아이들과 손을 나눠 잡고 서로 도우며 우물 안쪽 벽을 타고 내려갔다. 아래쪽은 안전할 줄 알았다. 예고 없이 수십 발의 총탄이 우물 입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힘껏 안아 품속에 숨겼다. 바싹 마른 줄 알았던 우물 바닥에서 고무를 녹인 듯 끈끈한 풀물이 차올랐다. 우리들의 피와 비명을 삼키기 위해.(21쪽)

총에 맞고,
몸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로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57쪽)

집을 나서기 직전에, 엄마가 쓰는 안방을 돌아봤던 것이 기억이 나. 미닫이문이 열려 있었고 이불은 반듯이 개켜져 있었어. 하지만 전기장판이 깔린 요는 그대로 펼쳐져 있었어. 그 요 아래 실톱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날카로운 쇠붙이를 깔고 자야 악몽을 안 꾼다는 미신을 엄마는 믿었거든. 하지만 실톱을 깔고도 엄마는 자주 꿈을 꿨어. 그 모습, 그 소리가 나한테 지옥이었어. (78쪽)

그 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84쪽)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 못하고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87쪽)

그 가을에 유골들이 발굴됐어.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209쪽)

그해에 아버지는 열아홉 살이었어.

산 위 무장대 삼백 명과 내통할 수 있다고 군경에게 의심받을 나이는 맏아들뿐이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직 아버지만 걱정했어. 이북 사투리를 쓰는 경찰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쳐서 남자들을 잡아가 실적을 올린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일제 때 부역하던 고등계 형사들이 그대로 남아 해방 전에 하던대로 고문을 한다고. 그렇게 읍내 경찰서에서 죽은 고등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듣고 온 뒤로는 아버지 혼자 동굴에 숨어 지내게 했대. 동굴에서 아버지는 낮에 호롱불을 켜고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시국이 지나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을 쳐보고 싶다고 생각했대- , 해가 지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불을 끄고 앉아 있었어. 자정 녘에야 집에 들러 식은 밥을 먹고 눈을 붙이고, 찐감자 서너 알이랑 종이에 싼 소금 한 첩을 동트기 전에 싸들고 동굴로 올라갔대.(217쪽)

그 11월에 밤에도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동굴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
건천을 건네는데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며 별안간 사위가 밝아졌대. 집들이 불타기 시작한 거야.
어디로도 움직여선 안 된다는 걸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알았어.
건천 기슭 대숲에 몸을 숨기고 있는데 마을 공터 쪽에서 일곱 발 총성이 울렸대. 뒤이어 군인들이 호각을 불며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걸 아버지는 숲 사이로 지켜봤어. 먼 거리였지만 손을 잡고 걷는 두 동생을 알아보았대, 더 어린 아이들을 앞세워 걸리거나 아기를 업은 여자들, 허리가 굽은 노인들은 넘어지거나 빨리 걷지 못해 행렬이 자꾸 지체됐는데, 그때마다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개머리판을 휘둘렀대.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한 거야. (217~ 218쪽)
겨우 일주일 만에 아버지는 붙잡혔어.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만으로 더 버틸 수가 없어서, 타다 남은 곡식을 찾으러 내려왔다가 경찰과 마주쳤대.
시신을 매장하러 올 사람들을 잡으려고 매복하고 있었던 거야.
제주읍 부두에 있는 주정공장에 보름 동안 갇혀 있다가 목포항으로 실려갔대. (219쪽)
그럼, 군이 데려간 사람들은?
P읍에 있는 국민학교에 한 달간 수용돼 있다가, 지금 해수욕장이 된 백사장에서 12월에 모두 총살됐어.
모두?
군경 직계가족을 제외한 모두.
젖먹이 아기도!
절멸이 목적이었으까.
무엇을 절멸해?
빨갱이들을. (220쪽)

방으로 총알이 들어올까봐 이불을 쓰고 총소리를 듣는데, 아이들이 있었던 게 자꾸 생각이 나서 가슴이 떨렸습니다. 우리 아들만한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들도 봤고, 산달인지 배가 불러 허리를 짚고 서 있는 여자도 있었습니다. 어둑어둑해지는데 총소리가 멈춰서 문구멍으로 내다봤더니, 피투성이로 모래밭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군인들이 바다에 던지고 있었습니다. (225쪽)

밤마다 악몽이 내 생명을 도굴해간 걸 말이야. 살아 있는 누구도 더이상 곁에 남지 않은 게 아니야. (238쪽)

1949년 봄, 이만 명가량의 민간인들이 한라산에 가족 단위로 숨어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즉결심판이 이뤄지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것이 굶주림과 추위보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3월에 임명된 사령관은 빗질하듯 한라산을 쓸어 공비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효율적인 작전 수행을 위해 먼저 민간인들을 내려오도록 삐라를 뿌렸다, 아이들과 노인을 등뒤로 숨기고, 총에 맞지 않기 위해 흰 수건을 나뭇가지에 묶어 들고 내려오는 깡마른 남녀들의 행렬이 자료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처별하지 않겠다던 약속과 달리 수천 명이 체포됐는데. (263쪽)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애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으니까. 낙인찍힌 유족들도, 입을 떼는 순간 적의 편으로 낙인찍힐 다른 모든 사람들도 침묵했으니까. 골짜기와 광산과 활주로 아래에서 구슬 무더기와 구멍 뚫린 조그만 두개골들이 발굴될 때까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고, 아직도 뼈와 뼈들이 뒤섞인 채 묻혀 있어.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317~318쪽)

폭력은 육체의 절멸을 기도하지만 기억은 육체 없이 영원하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통해서 잊지않고 끝까지 끌어안고 가겠다는 한강 작가의 결의를 읽어 보면서, 초등학교 때 곧잘 그렸던 반공 포스터가 생각납니다. 온통 빨강색으로 공산당의 얼굴을 그려놓았었지요. 나중에 북한 사람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것을 알고는 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념의 너울을 쓰고 무고한 민중들을 희생하는 비극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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