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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슬픔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4년 6월
평점 :
당신,
사랑이 전부를 결정한다고 말했던,
당신
어디에 있어(요)
1
.
네거리에서 노인이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딸에 집에 다녀오던 그는
익숙했던 길을 잃어버렸다
날 선 하늘이 그를 클로즈업하고,
아이가 달려가는 구로동 골목길
버려진 유치원 모자, 녹슨 세발자전거와 식은 연탄
빨래를 흔들고 가는 공장의 냄새, 녹슨 철문.
그 철문에서 나오는 젊은 얼굴,
너는 그때 비로소 ‘사랑해요’라고 말했다
아니, 너는
사랑이 지나가고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3
.
사랑은
이 추운 날,
당신의 녹슨 철문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들어와
철문이 삐거덕거리면
당신이 오나 하고 내다보는 거야
그 철문
녹슨,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
쌓인 연탄재,
귀퉁이 부러진 작은 평상
이층집 베란다를 흔드는 빨래
바람에 흔들리는 게 다 풍경이 아니야
너는,
그때 그 풍경 앞에서 목이 메었다고 했지
가난에 오버랩되는 눈물은
너의 유년이 목구멍까지 치밀었기 때문이야
.
당신,
아무것도 없이
어떻게 시간을 건너왔는지 말해야 해
목이 메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가난이야
차마 말하지 못했던 거
말해 봐, 사랑이었다고?
그거, 그냥 끝나는 거지
돌아볼 필요가 없는
괜찮아
이젠 아픈 척하지 않아도 돼
10
너는 언어를 찾아가다가
삶을 놓쳐버린 거야
가장 가까이에 있던 것
가장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었던 것
한때는 위대했던 것이
오랜 시간 뒤
골목길
비 맞는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처럼
누추해지는 것임을
17
.
자주 만나자
운명에도 절차가 있다는 걸 나도 안다
병을 통해
퇴로 없는 생의 어둠을 보기도 했다만
삶이여, 그런 거 다 내려놓고
그저 자주 만나서
바다에 가서 바다가 주는 설교나 듣자
이제는 나도
한없이 파들어가는 짓 다버리고
강변에 웅크려 앉아 강물소리 듣는 게
비루한 짓거리가 아니라는 걸
알 만큼 철이 들었다
19
.
풍경을, 시가 나중에 건드리듯
영육의 병듦이
개인의 잘못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 병든 몸으로
지금 깨닫고 있을 겁니다
세계는 바뀌어야 합니다
침상을 잡고 일어나는
중풍 들린 이의 걸음걸이가
우리가 원래 온전하지 않음을 가르쳐 주듯이
각자의 걸음걸이로
한 세상을 건드리며 간다는 것을
따라서 이해받고 싶다는 말보다
너로 인해
내가 한 줌의 모래알로 저항할 수 있음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일 겁니다
23
내 빈말이라도 그대가
염려 말라고 우리 힘내자고 말해줄 때
나는 행복했네
가 보지 않은 길들 다 놓치고
빨래 더미로 쌓인 일상에서
눈시울 뜨거워질 때
그대가 빈말이라도 힘들지 믈어줄 때
나는 행복했네
바람 부는 날이면
떠나고 싶었던 날들
비록 상처 주고 상처 입는 세상 길에서도
피 흘리는 정신으로 견디는 게 삶이라는
늦은 밤의 문자 메시지
바람 부는 길목에 홀로 서 있어도
나, 두렵지 않았네
28
중요한 건, 살아남는 거야
어떤 치욕이어도, 고통이어도
일단은
그냥, 살아남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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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골목은 가난의 풍경이었다
들어가면 걸어나오는데
너무 긴 시간이 걸리는,
형체가 바람에 의해 무너져내린 빨래
가장 아프게 저려지는 것들이 담긴 쓰레기통
그대가 바란 기적은
소망이 모두 무너진 후에
느닷없이 다가오는 것임을
그 녹슨,
철문 앞에 섰을 때
너는 후련하게 깨닫는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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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이유보다는
서툴고 불안하지만
이 운명에 지불해야 하는 치 떨리는 통증을 견디는 것
치유란
그런 거겠죠
거기
깊은
깊고 추운
골목길 나의
당신?
.
깊고
깊은
깊고 추운
깊고 어두운 우물 안
이제 온몸으로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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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리 시인이 추천의 글에서 ‘시집 <친밀한 슬픔>은 조현병을 앓는 한 시인이 절망과 비애를 문학의 자양분 삼아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간 생의 비망록이다‘ 했다.
박종언의 시집 <친밀한 슬픔>은 제목 없이 숫자로 시들이 이어지는데 이 시들은, 생은 ‘시장바닥의 쇠파리를 쫓아가며 걸어가야 하는 먼 길이라는 것을 후련하게 깨달아가는’ 비망록이다.
유년의 그가 달려가는 곳은 구로동 아주 좁은 골목길에 녹슨 철대문, 바퀴 빠진 세발자전거, 이층집 베란다를 흔드는 빨래. 그 풍경은 ‘가난을 증명하는 온갖 생의 파편들이다. 그것은 ‘세계의 슬픔’과의 접속이다. 그 접속은 마음에 상흔을 남긴다.
그는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루투갈어과를 졸업하고 문학도룰 꿈꾸며 부푼 마음으로 브라질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정신적 어려움을 겪은 후 병을 얻었고, 병과 싸웠다. 그러나 싸움만으로는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치유란 온전한 이유보다는 서툴고 불안하지만 이 운명에 지불해야 하는 치 떨리는 통증을 견디는 것’이라고 깨닫고, ‘깊고 추운 골목길’ 이고 ‘깊고 어두운 우물 안’이었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나온다.
현재 그는 <마인드포스트> 편집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다른 저서로는 작년에 출간한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삶과 치유의 기록책인 <마음을 걷다>가 있다.
그는 말한다. ‘광기로 번역되는 정신질환이 부정되고 타자화되어야 할 금기의 용어가 아니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의미’이다 라고. 정신질환도 다른 신체 질환처럼 예외가 아님을.
결코 쉽지 않았을 고통의 시간들을 안고, 극복해가는 박종언 시인에게 ‘염려말라고 우리 힘내자’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