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석, 산 70-7번지 - 나는 노동자 박영재입니다
이수경 지음 / 도서출판 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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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논란과 관련해 당 혁신비상대책위원회에 항의하며 분신했던 당원 박영재(43)씨가 분신 39일째인 22일 오후 4시37분 서울 한강성심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한겨레] 2012. 6.22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는 오늘은 박영재 열사의 12주기다. 마석 모란공원에서는 박영재 열사 12주기 추모대회가 열렸을 것이다.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12년 전 진보세력의 단결과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 정치를 호소하며 불꽃이 된 노동자 박영재 열사.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사람 박영재는 이수경 작가의 책, <마석, 산 70-1번지>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전태일 열사가 외쳤던 것처럼 ‘노동자, 농민 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외친다.

노동자 박영재가 목숨을 던져 지키려 했다는 그 당 통합진보당은 2011년 12월 5일,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이 이끌던 <새진보통합연대>, 유시민 대표의 <국민참여당>, 이정희 대표의 <민주노동당>이 통합해 약 30만 당원으로 창당한 진보연합정당이었고, 그해 4월 11일 19대 총선에서 노동계 조준호 대표가 합류한 4인 공동대표 체계로 지역구 7석, 정당지지율 10.3%, 비례대표 6석 등 13개 의석을 확보해 원내 3당이 된다.
그런데 2012년, 통합된 당을 만든 지 몇 달 만에 진보세력은 다시 분열했고, 한 노동자가 죽었다.
10년 전 19대 총선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부정에 대한 진상 보고서가 발표되고 노동자 박영재의 분신까지 12일.
그 복잡하고 풀리지 않는 의혹의 시간 속에서 내가 괴로울 만큼 헤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비극이 일어난 곳이 수십 년간 노동 운동, 진보 사회운동을 해온 사람들의 메카였고, 그가 그들의 동지였기 때문이다. (22쪽)

작가는 박영재 열사와 접신을 하듯 그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열여섯 살 시골버스 차장에서 자동차 정비기사로, 건설현장 덤프트럭 기사에서 버스노동자로, 숨 쉴 틈 없이 고된 노동 속에서만 살아가던 내가 그들을 만나 함께 공부하고 활동하고 마침내 민주노동당 수원시당 부위원장이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이 얼마나 벅차고 설레고 또한 두려웠는지 그녀는 알고 있을 것이다. (33쪽)

생애 처음으로 꿈꾸어 본 세상.
그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던 새로운 시간 앞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카메라에 잡힌 낯선 내 얼굴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그 날의 중앙위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 일로 인해 동지들과 당이 더 큰 시련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때, 나는 무엇을 해야 했나.

육체적 생명이 끊어져 땅속에 묻히고 영혼으로 떠나온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해 2012년 5월 12일.
그날 이후 이틀의 시간
부정한 세력이라는 누명에 폭력의 오명까지 덮어쓰게 된 동지들의 하얗게 질린 얼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중앙위 대표들이 있는 단상으로 뛰쳐 올라가고 말았던 나의 모습,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훼손되고 당에서 내몰릴 동지들, 꿈꾸던 노동자 진보정치의 미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로 고통스러운 이틀 밤 이틀 낮을 보냈다. (34쪽)

내가 떠나온 다음해 2013년 8월 28일, 국정원 프락치의 불법 녹취로 동지들이 붑잡혀 갔을 때,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위헌 정당 선고로 기어이 당이 해산되었을 때, 나에게 몸이 있다면 다시 동지들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육친 같은 동지들에게 피눈물 나는 누명을 씌운 첩자는 누구인가.
2009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은갈치 양복’이라고 이름 지어 준 내게 있는 단 한 벌의 회색 양복을 입고 밤낮으로 성심을 다해 도왔던 민주노동당 수원시 국회의원 후보, 이성윤이 아니었나. (38쪽)

수많은 노동 열사는 왜 여기에 있나.
버스 기사로 하루 열입곱 시간씩 일하던 나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불안하고 험한 일을 하며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노동자들이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였나. 누가 그들을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고 그들의 삶을 생각했나. 중금속 맹독에 장기가 서서히 파괴되고 기계에 잡아먹혀 온몸이 부서지고 쇳물이 떨어져 흔적없이 사라진 사람은 누구였나.
이 세계의 가장 비천한 이름으로 불리던 노동자를 가장 멋진 계급으로 되살려낸 이들이 당을 잃고 감옥으로 거리로 흩어졌을 때, 육신이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39쪽)

가장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할 때, 죽음으로밖엔 지킬 방법이 없을 때, 누군가는 목숨과 바꾸기도 합니다. 동지가 아는 전태일이 그랬고, 이 묘지의 많은 열사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청계천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을 지키고 싶었고, 피땀 흘려 만든 노동조합을 지키고 싶었고, 군대 녹화사업으로 강요받은 프락치 활동에 의로운 친구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지키고 싶었고, 민주와 평화와 이 땅의 자주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나는 노동자 민중의 삶을 위한 진보정치의 미래, 당을 지키고 싶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동지들 누구의 책임도 아닙니다. 내 길과 내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것일 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막다른 곳으로 밀려나는 운명에 순응하고, 불의를 보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저항할 수 없는 하루살이 노동자로 살던 40여 년 나의 인생에 동지들이 찾아왔을 때, 내 삶은 달라졌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한 날들, 삶의 어려운 고비고비를 홀로 넘어야 했던 외로운 날들이 동지들과 함께하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50~51쪽)

작가는 당원수로만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민주주의일까는 의문을 제기한다. 양보했어야 한다고. 누군가는 분당하고 탈당을 했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도 없는 것 같다, 박영재 같은 사람들. 그들은 물러설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그런 계급.

해가 바뀌기 전 노작가의 장례식에 다녀온 날에는 그분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읽으며, ‘키 1백 17센티미터, 몸무게 32킬로그램’의 작고 힘없는 난장이 아버지와 그의 아들딸 영호, 영수, 영희 세 남매의 삶을 파괴한, 끝내 거대한 자본의 힘에 맞서 싸우며 죽어가게 했던 세상을 생각했고, 1970년대 문학작품의 인물인 난장이 아버지 ‘김붙이’와 세 남매와 어머니의 자리에 박영재의 아버지 ‘박석동’, 어머니 ‘차정예’, 영남, 영해, 영재, 영구, 다섯 남매의 이름을 넣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한 가족을 생각했다.
소설 속 난장이 가족과 현실의 전태일 가족이 고된 노동과 가난에 몸부림치던 그 시절에 박영재의 가족도 그들과 같은 삶을 살았던 이웃이었다.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핍박하는 불공평한 세계와 대립하며 난장이의 아들이 죽어가고, 노동자를 기계부품처럼 착취하는 숨막히는 개발독재 시대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껴안고 몸을 불사를 때, 어린아이였고 소년이었던 박영재는 난장이 아들딸이 살았던 어두운 시대를 지나 노동자 전태일을 만났고 전태일처럼 살고 싶었고 전태일처럼 목숨을 버렸다. (95쪽)

서산중학교. 본교 제6회 동문 증. 1982년 3.12.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 소년 박영재가 보낸 시간이었다.
이 학교를 마지막으로 소년 노동자가 된 사람, 서른여덟 살에야 진보정당을 만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당당한 노동자가 되었다고 했던 사람, 한 사람의 힘없는 노동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 전체를 위해 살게 된 사람, 노동자 민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여 집권해야만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온다고 믿었던 사람, 진보세력 간의 연대와 통합으로 막 꽃피우기 시작한 21세기 진보정치의 앞날이 또다시 불신과 분열로 파괴되어 갈 때 목숨을 버려 지키려던 사람, 그리하여 그는 자랑스런 동문이고, 그의 삶과 죽음은 진보정치사에 기록될 거라고, 누군가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까. (120쪽)

“통합진보당을 보며 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준이 다르구나… 처음에는 노동운동이나 진보정당이나 똑같다고 봤어요. 그런데 움직이는 방법이 다른 거고, 그렇게 가다 보면 결국 다른 정당과 비슷해질 것도 같고… 그러다가 점점 멀어져서 연결된 것이 끊어질 것도 같고. 그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그때 상황을 가끔 떠올려 봐요. 그 사람이 왜 그랬을까. 버스노조 활동을 하려다가 더 크게 바꾸자는 절실한 마음으로 당에 갔는데 분열하고 찢어지는 걸 보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점점 멀어지는 느낌….”
버스노동자 이광언 선생은 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기준이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왜 노동자와 연결된 선이 끊어질지도 모른다고 느꼈을까. 왜 결국에는 기존 정당들과 비슷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통합진보당의 어떤 모습 때문에….(158쪽)

얼마 뒤 헤겔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를 만났을 때, 이광언 선생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대학 강단에 서다가 퇴임한 철학자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이던 분이었다. 나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격렬하게 대립했던 통합진보당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철학자에게 물었다.
“진보정치의 중심에 현장을 떠난 지식인들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직접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당원들도 있었는데, 성향이 달랐던 갔습니다. 개인적인든 아니든 간에 진보정치의 어려움을 겪으며 좀 더 효율적으로 대중정당으로서의 권력을 추구하는 경향도 생겼고, 여전히 순수한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의 열망을 지켜가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겉으로 드러난 것은 경선부정 사건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이 두 측면의 충돌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박영재의 죽음 또한 경선부정 사태의 진실을 밝히라는 표면적인 이유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진보정치가 가야 할 길에 대한 근본적인 요구, 그것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철학자의 입장이었다. 그분의 말은 그때의 진보정당에 대한 이광언 선생의 시선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159쪽)

해방 후 70여 년을 지속해온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양당정치를 깨고 노동자, 서민,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를 위한 진보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진보정당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나.
노동운동은 정치하면 안 된다는 이광언 선생의 이야기기가 나는 좀 아팠다. (160쪽)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 되어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항상 뺏기고 살아잖아요. 이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노동자, 농민, 모든 진보세력이 손잡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꿈입니다.”
- 이소선 어머니의 추모비 글 각색

뿌리가 깊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잎이 험상궂어 사자 이빨처럼 무서워서
부정부패가 벌벌 떠는
나의 이름은 으라차차 민들레

박영재는 누구인가.
그는 죽은 자와 산 자 누구도 이 땅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 진정한 진보가 집권하는 세상, 인간이 품은 자주와 평등의 숭고한 가치를 지향하는 진보정치의 길 위에서 목숨을 바친 열사이다.
세상은 아직 그를 모르겠지만 우리만은 알고 있다. 한순간의 나태도 없이 삶을 아끼고 살아했던 동지가, 동지들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이유를. 그의 이름은 한국 진보정당사에 뜨거운 햇불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

‘어렸을 적 가난하고 불우했던 삶이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아직 어린 우리에게 반복되지 않도록 좋은 사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꿈’이었던 박영재 열사. 그러기에 그가 2012년 5월 12일에 열렸던 통합집보당에 걸었던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뒤 비례대표 후보선출 과정에서 드러난 ‘부정. 부실선거’를 놓고 당권파와 비당권파 사이에 벌어진 갈등에서 그는 얼마나 큰 실망, 큰 절망을 느꼈을까.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단상으로 달려오던 그의 분노로 가득찬 얼굴에서 그의 외로운 절망감을 짐작해본다.

세계인권선언 제23조 1,2,3항에는 모든 사람은 일, 직업의 자유로운 선택, 정당하고 유리한 노동 조건, 그리고 실업에 대한 보호의 권리를 가지며, 모든 사람은 아무런 차별 없이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동등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지며, 노동을 하는 모든 사람은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의 존엄에 부합하는 생존을 보장하며 필요한 경우에 다른 사회보장 방법으로 보충되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지 말아었야 했다.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든 비당권파든 노동자와 농민과 힘없는 서민들을 위해 서로 양보하고 하나의 힘이 되어 진정한 진보의 당이 되어서야 했다.
‘누가 박영재를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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