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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눈물은 닦지 마라
조연희 지음, 원은희 그림 / 쌤앤파커스 / 2021년 9월
평점 :
2010년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고 , 2016년 시집 <야매 미장원에서>을 냈던 조연희 시인이 가난했던 1970-90년대에 서울 산동네 서민 아파트에서 유년과 사춘기를 겪고 또 대학 시절을 보내면서 경험해야했던 독재와 폭력의 시대를 시와 산문으로 풀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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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행은 아버지의 힘이 넘칠 때 시작됐다. 불화의 전모를 알 수 없는 뒤주 속에서 이 땅의 의심 많은 아버지와 유약한 아들들이 일가를 이루고
강남구 압구정동 어느새 높게 키가 자라 있는
사각 뒤주와 뒤주 사이
눈물 많은 어머니들 밑넓이로 누워 있으면
주먹 센 아버지, 그 각을 밟고 섰고
우유부단한 아들이나 딸들,
대칭을 이루며 한 변을 쏘아보고 있다.
사각 숲 모서리 모서리들 속으로
익명의 수많은 사도세자들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사각 뒤주의 추억' (상략) p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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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적 사회를 살아가는 제도권에서 거세된 비주류의 아버지들은 무능했지만 집안에서는 왕이였지요. 사회에서 밀려나 집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화풀이를 하며, 술과 여자나 노름에 빠지곤 했어요.
저의 아버지도 그랬어요.
시인의 아버지가 집까지 팔아 도박을 하듯이 저의 아버지는 새집으로 이사할 돈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여자랑 여행을 다니며 흥청망청 썼었지요. 그 돈은 엄마가 밤잠 덜자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번 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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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보고 있으면
길 끝에서 엄마가 걸어나올 것 같아
봇짐처럼 정수리 가득 무거운 석양을 이고
눈물처럼 흐려지는 길을 따라 출렁출렁
오실 것만 같아
미나리며 깻잎, 열무에 총각무까지
머리 위에서 푸른 줄기들이 면류관처럼 자라고
염소 눈동자애 비친 노을처럼 쓸쓸한 것은 없지만
그 길에서 홀로 나오는 엄마.
검은 염소 닮았네.
내 앞가림하며 살기도 힘들어.
언제쯤 엄마 짐 받아줄 수 있을까.
기다림을 숨기고 길은 오늘도 저 혼자 달려가고.... .
'검은 염소 닮았네' p11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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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죽음이란 맨홀 같은 것이었다. 인디언 인형처럼 옆의 친구가 갑자기 사라져도 몰랐다.
1월에 서울대 3학년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아 사망했다. 피의자가 아니라 참고인 신분이었는데, 조사 협조인을 불법 체포한 것도 모자라 수배 중인 선배의 행방을 대라며 얼마나 심하게 취조를 했던지 기도가 막혀 질식사한 것이다.
최루탄은 점점 치사량에 가까울 만큼 독해졌고 신촌 일대는 황사 대신 최루탄에 뿌옇게 휩싸였다.p225
문학은 저항이라 했고 시대의 갈등이라고 했다.... 우리들이 주로 읽은 것은 노동자 출신의 박노해나 백무산의 시 같은 것이었다. 홍희담의 <깃발>이나 윤정모의 <밤길>,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같은 소설이었다. 친한 친구는 금서였던 제주4.3 사건을 다룬 <한라산>을 몰래 복사해 읽기도 했다.p226
그 시절 우리의 젊음은 너무 비장했고 남루했고 시대의 강박이 심했다는 것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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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희 시인을 알게 된지 벌써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우리는 고등학교 미술부의 누구누구의 엄마들로 아이들과 함께 만났어요.
그때는 절망과 희망을 공유하며 비슷한 꿈을 향해 나아가는 아름다운 청춘들인 딸들을 위해 엄마들도 함께 꿈을 꾸었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 페이스북을 통해 누구의 엄마가 아닌 각자의 이름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몇년 전 보내준 시집 <야매 미장원>을 읽으며 그녀가 시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또 이번에 보내준 <흐르는 눈물은 닦지마라>를 읽으면서 그녀가 아랫입술이 터질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눈을 부릅떴던 '응시'의 기록자임을 알게 되었어요.
현실의 폭력 앞에서 무력함에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꿈, 희망, 미래 등에 더 많이 시선이 갔던 청춘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