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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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1998 (KOR. 2023)


“음식을 가지런히 차려서 먹는 것은 별들의 순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동의한 합의사항이었다.”


정물화가 지닌 기묘한 점은, 다른 회화양식과 달리 수 천년 간 표현 방식과 의미가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일용할 양식과 풍요에 감사하는 의미, 두 번째는 종말의 의미이다. 

일 년간 농사 지은 과일이 광주리에 담겨 식탁 위에 놓여 있고 먹기 알맞게 익어 있다. 음식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오기 직전 가지런히 놓여진 그 시간에 인간은 이를 보며 무언갈 느꼈고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로써 동굴 벽이나 화폭에 그려진 음식들어떠한 종류의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살아있는 화석같은 원시적 영감.

그러나 나는 먹고 살 수 있음에 감사는 하지만 먹고 살 수 있음에 영감을 받아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는 사회에 정물화가 지닌 풍요로서 첫 번째 의미는 이미 말소되었다. 이에 나는 종말이라는 두 번째 의미에 관심이 가는 것이다. 


종말은 죽음을 뜻하고, 죽음을 그려둔다는 것은 이를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표현되는 이 말은 꼭 직접적인 상징물인 해골뿐만 아니라 순식간에 사라지는 파이프 연기, 더 나아가서 가장 풍요로울 때 거둬들인 여름 과일 광주리로부터 모순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아니면 당신이 이따금 입에 집어 넣어야 했던 약 봉지가 될 수도 있다이것들 모두가 정물still life이다.

생이 시작되었을 때의 쾌락은 아득해서 기억나지 않고 죽음은 저 멀리 있는 것만 같다.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은 늘 한 방향이니 그 도착지인 죽음을 기억하자는 것. 이는 도대체 생과 죽음 사이에 나의 오늘이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하는 가늠자로 사용할 때 요긴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므로, 어제에 비해 오늘 더 나은 지독한 삶을 살 바엔 내 삶의 샷따를 내리는 날에 비해 지독하게 재밌었던 오늘을 기억하겠다는 의미로 난 받아들일란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들의 순행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인간이 합의한 사항이 음식을 가지런히 차려 먹는 것이라는 말은 너무도 다정한 말이다. 우리가 야만으로 되돌아가면 별들은 더 이상 정해진 궤도를 돌지 않을거고 하늘에서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할거야. 강은 양쪽으로 변덕스럽게 흐르고, 즉흥적이고 예측불가능하며 염소머리를 단 신들이 다시 지구를 지배하게 될 거야. 마치 어린아이에게 타이르듯, 경건하며 유쾌하게. 태양을 향해 고개를 쳐드는 것도 짜릿하지만 숙여서 쓰다듬어지고 내 안을 쳐다보는 것 또한 아늑하니.


*본 서평은 을유문화사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을유문화사#스틸라이프#정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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