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 소설, 향
김엄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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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장면'은 내게 김엄지 작가를 알게 해 준 첫 작품이다. 항상 새로운 작가를 만날 때면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찾아오는데,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만날지 기대되는 마음과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 할까 걱정되는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은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문장의 호흡이 짧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R로 시작하는 문장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기 때문에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문장의 길이가 짧은데도 불구하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 개의 번호로 나눠진 R의 기억이 마구 뒤섞인 채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8개월 전 5미터 아래로 추락한 R은 기억을 잃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도, 상사의 성을 기억하지도 못 한다. 아내와의 기억도 떠오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다가도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들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생각해보면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 메시지(13p)를 보낸 번호의 뒷자리가 아내의 5년 전 전화번호 뒷자리라는 사실(29p)이다.

이렇듯 R의 기억을 따라 의식의 흐름대로 펼쳐지는 것 같은 이 소설은 이어지지 못 하고 파편화된 R의 기억들이 뒤얽혀있다.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R은 그 속을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R은, 모르는 R을 상상해야 했다.

R은 생각보다 더 R을 모르고.

13p

R은 눈을 감고, 감은 눈 안에 자기를 떠올린다.

그는 R과 같은 수많은 R을 상상한다.

그는 그와 아주 똑같은 R을 상상할 수는 없다.

언제나 R은 R에게서 이미 지나쳐 너무나 먼 것이었다.

94p

R은 왠지모르게 불안정해 보이는데, 그렇기 때문인지 R의 기억은 정말 R의 기억이 맞는지, R의 착각은 아닌지 계속해서 혼란스럽다. 안개가 가득한 길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R의 심리와 기억들, 조각난 기억들이 연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R이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R은 삶을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R은 견디고 있었다.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뭔 견디고 있는 걸까. 손톱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히터 바람을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이 R의 머리칼을 날리고.

26p

R은 지쳐서 누군가 더 믿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왜. R은 지쳤던가?

R은 언제부터였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R은 R에게 지쳤다.

매순간 R은 R을 버리지 못한다.

136p

R이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외로움, 복잡함은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는 의사의 말대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든 것은 R의 선택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난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타일의 소설이지만 김엄지 작가의 독특한 문체가 그냥 좋다. 그냥 그 자체로 음미하게 된다. 계속해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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