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장면'은 내게 김엄지 작가를 알게 해 준 첫 작품이다. 항상 새로운 작가를 만날 때면 설렘과 긴장이 동시에 찾아오는데,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만날지 기대되는 마음과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 할까 걱정되는 마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지의 것은 이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문장의 호흡이 짧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R로 시작하는 문장이 계속해서 반복되었기 때문에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문장의 길이가 짧은데도 불구하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 개의 번호로 나눠진 R의 기억이 마구 뒤섞인 채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8개월 전 5미터 아래로 추락한 R은 기억을 잃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지도, 상사의 성을 기억하지도 못 한다. 아내와의 기억도 떠오르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다가도 드문드문 단편적인 기억들이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생각해보면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자 메시지(13p)를 보낸 번호의 뒷자리가 아내의 5년 전 전화번호 뒷자리라는 사실(29p)이다.
이렇듯 R의 기억을 따라 의식의 흐름대로 펼쳐지는 것 같은 이 소설은 이어지지 못 하고 파편화된 R의 기억들이 뒤얽혀있다.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는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R은 그 속을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