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 바쁜 일상에 치여 놓치고 있었던, 그러나 참으로 소중한 것들 46
정희재 지음 / 걷는나무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딱히 가리고 편식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심리학 서적들과 수필 글들이 독서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냥 호기심과 거창하게는 상대방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수단으로 읽기 시작했던 심리학 책들이, 한 때의 심리학 열풍이 불어대던 시간을 지나고서 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어 어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혹은 유사한 위안을 느끼기 위해서 비슷한 내용의 심리학 서적들에 계속해서 손이 가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위안의 말들이 전혀 위안이 되지 않기 시작했다. 위안의 말들이 오히려 결국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면에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면서부터, 전형적인 심리학 책들은 멀리하게 되었다. 그 대신 심리학 서적들이 해주던 역할을 이제는 수필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어떤 분야에 있어서 전문가의 일상과 생각을 담은, 그래서 덤덤하게 써내려가지만 힘이 있는 그런 글들을 좋아한다.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라는 책은 그런 위로와 덤덤함의 적절한 경계에 있는 책이다. 우연히 길을 가다 깨끗한 중고서적이 있어 구매한 책 치고는 행운에 가까울 정도로.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도시의 삶'이라는 것에 특유의 관찰을 통해 생각을 이끌어낸다. 도시의 삶이라는게 별 것이 있겠는가? 하지만 밥먹기, 이사하기, 택배받기, 대화하기 등의 46가지의 일상적인 도시의 삶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오히려 덤덤하지만 진심이 담긴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책에서 다루는 많은 일상 생활들. 그 유사한 상황과 생각들을 나 역시 도시 생활을 통해 겪어왔고, 또 지금도 겪고있다. 9년 전 대학 진학의 문제로 대구에서 서울로 상경한 시기 이후로 나에게 '도시'란 곧 '서울'을 뜻하는 말처럼 되어버렸다. 대구도 작은 도시는 아니지만, 서울과는 다른 느낌이 있으니까. 반지하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해서, 옥탑방도 전전하면서 폭설에 문이 열리지 않는 경험도 해보고 이런저런 가난한 젊은 시절을 겪었다. 이천원으로 일주일을 버텨본 적도 있고, 지나치게 화려한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이 마음을 갑갑하게 짓눌러 답답함을 호소하며 무작정 강원도로, 그리고 다시 도보로 부산까지 여행을 다닌 시절도 있었다. 여전히 떠나는 것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조금은 적응이 된 것일까. 다행히 예전처럼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은 조금 덜한 것이 사실이다. 아니, 사실은 적응이 되었다기 보다는 시간들과 경험을 통해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또 새로운 도시의 벽에 부딪치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의 진통을 겪는 것을 반복하는건 어쩔 수 없으리라. 그 또한 아직 젊기 때문이라 생각하자.

 

결국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그 사실은, 책에서 말하는 것과 공교롭게도 맞닿아있다.

냉정한 도시의 삶에 지치고 외로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쓴 글이지만,

결국은 문제는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임을 책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윌리엄 포트너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좋은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 '관찰', 그리고 '상상력'이라고. 우리는 삶에 지칠 때마다 휴식이나 위안을 얻기를 원하고, 때론 그런 삶의 아름다움을 문학과 다른 책들에게서 찾기도 한다. 정말 문학에 위로의 기능이 있다면, 작가에게는 그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세가지의 능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삶이 꿈꾸는 문학마냥 아름답게 전개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인생의 작가인 본인만의 태도와 관찰력이 필요하다. 각자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하는 것은 때론 멀리서, 때론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우리의 시각이 아닐까.

 

"엄마, 아부지가 이런 거나 주지 뭘 해 주겠냐. 쌀 걱정은 말고 열심히 살거라." 

나는 안다. 엄마가 표현하는 '이런거나'의 무게를. 과연 이 도시에서 밀려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불안한 청춘의 날을 통과하는 동안, 왜 사회생활을 집벌이나 옷벌이라 하지 않고 밥벌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된 터였다. 밥벌이의 무게만큼이나 엄마의 상자들은 태산의 무게로 나를 이 지상에 붙들어 주었다.

시골의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묶었던 끈은 칼이나 가위로 싹둑 자르지 말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더라도 손으로 풀라고 이르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세상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 다름 아니었으며, 매사에 정성을 들이라는 산 가르침이기도 했다. (중략) 결국 인생은 인내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의 문제임을 아버지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 『택배 받기 : 내가 먹어치운 상자들이여』

그날 나는 처음 만난 두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 동안 어떤 글을 써 왔죠?" 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 라는 질문을. 비슷한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두 질문이 너무나 다른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쪽이 과거와 성취 중심이라면 다른 한쪽은 미래와 기대가 담겨 있다. (중략) 그날 나는 최 선생님을 통해 인생에 중요한 갈림길이 될 만한 '결정적 순간'이 존재한다는 오해를 풀었다. 인생이란 어느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다림이며, 가장 나다운 나와 만나는 먼 여정임을 이해했다.

『면접 보기 : 면접관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

모르는 사람 일에 선뜻 나서기도 어렵거니와 두 번이나 호의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걸 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으리라. 남자는 술에 취해서도 예의 바른 젊은이가 아니라 부당한 실존에 항거하는 외로운 병사 같았다.  (중략) 저 남자는 참 외롭게 살겠구나, 싶었다.

한 사람의 존재가 마음속에서 폭발력을 발휘하며 각인되는 순간 세상은 한없이 낯설면서 신비로워진다. 그런데 나는 생각할틈도 없이 반사적으로 답하고 말았다. "괜찮아요. 됐어요." (중략) "넌 '됐다'라는 말을 자주 쓰더라. 상대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봐. 잘 받는 사람이 잘 줄 수도 있는 거야." 

『호의 받아들이기 : 잘 받고 잘 주는 법을 배우기까지』

"어느 날은 화장실을 밀대 걸레로 닦는데 손에 힘이 팍팍 들어가더라고요. 정말 미친 듯이 닦았어요. 구석구석 빈틈없이, 눈에서 불이 날 정도로. 어찌나 그 일에 열중했는지 나중에는 눈물이 나더군요. 그거 알아요? 정말 뭔가에 정신을 쏟으면 눈물이 나는거? "

 

나는 B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몰입과 열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략) 초라한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물 나도록 힘이 솟게 하는 뭔가를 찾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었을 뿐이다.

『일하기 : 일에 관한 지극히 소박한 진실』

"널 꼭 한 번 이 집에 데려와서 삼계탕을 먹이고 싶었어."

"왜?"
"내가 먹어 본 삼계탕 중에 가장 맛있었거든."

그랬다. 그건 한 끼니의 식사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 가둬두고 괴롭혔던 것들을 풀어주는 제의같은 것이었다. 나보다 먼저 그 집 삼계탕을 맛보고 언젠가 한 번 나를 데려와 먹여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맞은 편에 앉아 있어서, 내 고단한 여름은 치유 받을 수 있었다.

『도시에서 사랑하기 : 천국에서 미리 가불한 시간』

밤하늘에는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이 약 3천5백 개 있대요. 그런데 도시에서는 잘해야 50개 정도밖에 못 봐요. 꼭 은하수나 별을 보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에요. 어둠이 좀 더 어둠다워서 밤에 좀 푹 잤으면 좋겠어서요. 전 유난히 잠에 약해서 푹 자지 못한 날이면 괜히 비관적이 되곤 해요. 인류 평화가 여기서부터 깨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도시산책1 : 밤이 더 어두웠으면 좋겠어요』

오늘은 음력 설날이다. 사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타향으로 떠났다. 그렇다. 이제는 타향이 돼 버린 고향으로 간 것이다. 일 년에 서너 차례 들를 뿐인 곳을 왜 굳이 고향이라고 할까.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을 왜 타향이라고 못 박는가. 고향과 타향의 역전된 이 역설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려주는 요약문 같다. (중략)

 

"일부러 내 방까지 찾아왔는데, 왜 선뜻 문을 열어 맞아들이지 않았을까. 비약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난 종종 그런게 죄가 아닐까 싶어."

 

어찌 D뿐이랴. 서로의 불모, 불구를 인식하고도 모른 척 지나친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다 서로 어긋나서 생긴 부서질 것 같은 고통만이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 일 없이 헤어졌다는 것. 그림자 끝자락도 겹쳐 본 일이 없다는 것, 그 역시 막막함이다.

- 『명절 보내기 : 고향과 타향 사이』

누구나 인생의 한 시절은 싸움닭처럼 격렬하게 세상과 맞서는 시기가 있다. 화살의 방향이 외부로 향하든, 내부로 향하든 상처를 받는다는점은 같다. 상처 받지 않고서야 약을 찾을 일도 없다. (중략) 그때는 불타는 세상의 화염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야말로 그 불꽃을 키우는 기름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안다. 당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감정에 따라 혼자만의 법정에서의 유죄, 무죄를 따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나는 편안해졌다,고 감히 말하진 못한다. 다만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분에 약하고 강한지, 무엇에 가슴 뛰고 좌절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해하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세요."

『타인 이해하기 : 사람 때문에 마음이 다칠 때』

도시에 처음 입성하던 날, 봄기운을 머금은 비가 내렸다. 비슷한 지방 출신인데다 비슷하게 가난한 친구와 보증금과 월세를 합쳐 방을 얻기로 한다. 두 젊은이는 창조적인 삶에 부록처럼 따라 붙는 세 가지, 즉 젊음과 가난, 고독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도시에서는 가난한 이들이 가는 동네가 정해져 있다. 두 사람은 봉천동을 택한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가장 서러움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제 한 몸 누울 자리 마련하러 돌아다닐 때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집값은 물가를 웃돌아 올라 있다. 게다가 부동산에서는 늘 이편에서 말한 조건보다 한 단계 높은 곳을 보여준다.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 집을 보면 자신의 예산에 맞는 집은 단번에 추레한 오막살이로 추락하고 만다.

'저렇게 집이 많은데 내가 들어갈 집이 없다니...'

 

자발적 빈곤은 한없이 아름다운 말이지만 해가 갈수록 '자발적'이 맞는지 자신할 수 없다. 도시가 추구하는 욕망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자발적' 이라는 청렴한 수식어는 곧바로 무능으로 대치된다. 젊은이의 눈에는 시대의 우울이 담긴다. 다른사람들의 속도에 허겁지겁 따라가며 살다가는 인생은 이미 소모되고, 그 대가로 집 한 채가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데이빗 소로우는 한 인간이 평생을 걸쳐 자세하기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은 20킬로미터 이내라고 했다.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이었던가. 인간이 집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소유하고 가꿨던 시대에는 집 한 채 장만하는 일이 이처럼 살벌한 전쟁이 되진 않았다. 집의 노예로 사는 시대란 얼마나 비극적인가. 그런데도 집이 없는 사람에게 적대적인 이 도시를 왜 떠나지 못할까.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대도 생존의 두려움과 탐욕, 문화생활과 활기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욕망의 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젊은이의 원죄요, 정직한 초상이다.

『내 집 마련하기 : 집의 노예로 사는 시대』

여행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내 경험으론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다. 누가 그랬던가. 여행과 생활은 연애와 결혼의 차이 같다고. 여행이었기에 우리는 언뜻 새로운 세상을 보았거나 봤다고 생각한다.

『공항 가기 : 여행이 못 견디게 그리울 때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 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거다. 엄마, 아버지도 사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을 했느니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 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중략)

"엄마! 이 넓은 콩밭을 언제 다 맨대요?"

그때 엄마가 던진 한마디.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해가지면 안도하고 새벽이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던 시간. 그런 세월을 살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걸음, 손에 잡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인생 배우기 : 엄마가 말했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귀는 아무리 낮은 소리라도 다 알아듣는다 - 셰익스피어

도시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지금 상대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됐는가. 잘 듣고 있는가. 과거에 얽매인 기억을 벗어 두고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오롯이 상대에게 집중하고 있는가. 내가 만나는 이 사람은 얼마나 오래된 지혜요, 고전일까를.

『대화 나누기 : 오늘 처음 만난 것처럼 듣는다면』

살아보니 행복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것이었다. 행복에 관한 한, 우리는 일용직 신세였다. 비정규직이었다. 내일 몫까지 미리 쌓아두기 힘든 것, 그게 행복이었다.
- 『행복해지기 : 하루 벌어 하루 살기』

사람이 살면서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갖고 싶은 게 아무리 가까이 있다고 해도. 사랑도 이와 같다. 애당초 손바닥은 깨물기 좋게 생기지 않았다. 내 손바닥도 깨물지 못하거늘 상대의 손바닥이야 말해 뭣하랴. 전쟁 같은 사랑이 지난 뒤에야 손바닥과 손바닥은 서로 마주 잡기 좋게 생겼다는 걸 깨닫는다.
- 『서로 매혹되기 : 사랑의 호황기와 불황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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