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공부 - 삶의 고비마다 나를 지켜내는
이철 지음 / 원앤원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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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명심보감

아주 어릴 적 한자 공부를 시킨다는 명목으로 아버지는 나와 누나를 주기적으로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한자는 명분일 뿐이고 사실은 할아버지와의 시간을 많이 보내게 하려는 아버지의 의도였던 것 같지만... 뭐, 이유야 어찌되었 건 누나와 나는 주말마다 할아버지 댁에 (만화책을 한껏 빌려서는) 방문했고, 그렇게 주말을 조부모님과 함께 했다.


그래도 마냥 놀기만 한 것은 아니여서, 명심보감을 익히는 것으로 한자 공부를 대신했었다. 그러나 명심보감이 아무리 가장 쉬운 글들이여도, 한자조차 모르는데 한문을 읽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긴 했다. 그나마 고학년으로 넘어가던 누나는 곧잘 글씨와 글을 익혔던 것 같지만, 저학년이던 나는 한자를 익히는 것 대신 뜻풀이를 통해 명언?! 같은 것들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도 딱히 한자를 외워야하고 쓸 줄 알아야한다고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그냥 손주들과의 그 시간이 좋으셨던 것 같고, 또 의미가 있으셨던 것 같다. 비록 한자를 배우진 못해지만, 그럼에도 워낙 어린시절의 기억이다보니 종종 그 때 배웠던 문구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이를테면,

한소열(漢昭烈)이 장종(將終)에 칙후주왈(勅後主曰),

물이선소이불위(物以善小而不爲)하고,

물이악소이위지(物以惡小而爲之)하라.

라는 문장이나,

장자왈(莊子曰),

어아선자(於我善者)도 아역선지(我亦善之)하고,

어아악자(於我惡者)도 아역선지(我亦善之)다.

아기어인(我旣於人)에 무악(無惡)이면,

인능어아(人能於我)에 무악재(無惡哉)라.

같은 문장들 말이다.


첫 문장은 사실 삼국지 때문에 오래도록 기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한소열은 유비를 지칭하는데, 저 말은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후주(유선)을 불러앉혀놓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문장을 그대로 해석하면, '유비가 죽기 전 아들 유선을 불러앉혀 이야기하길, 작은 선이라고해서 행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작은 악이라고 해서 행해서도 안된다'라는 뜻이다. 두번째 문장은 쉬운 한자로 쓰여있어서 오래도록 기억을 하는 것 같은데, 이 역시 문장을 풀이하면 '내게 선하게 대하는 이들은 나 역시 선하게 대할 것이고, 나를 악하게 대하는 이들에게도 나는 선하게 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남을 악하게 대하지 않으면, 남 역시 나를 악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다. 예전에는 글공부가 인성을 가다듬는 수양의 수단이었고 그 시작을 명심보감과 함께 했다고 하는 것처럼, 역시 도덕책에서 나올 것 같은 문장들을 배운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까마득한 무의식에 남아있던 문장들을, 나는 과연 언제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문득 생각해보게 된다. 대체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때, 복잡한 일들에 치여 나를 잃어간다는 느낌이 들 때, 또 다른 고전문학이나 고전영화 혹은 철학 등 오랜시간 인류에게 주효했던 일종의 진리와 가까운 메세지들을 접할 때 그런 문장들을 되뇌이기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것이 바로 고전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더라도, 또 어떠한 원리를 둘러싸고 있는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더라도, 그것을 관통하는 핵심원리만큼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 말이다. 몇 년전 호황기에서 불황기로 경기가 전환이되던 때 경영학계에서는 고전 인문학 읽기가 유행을 했었던 것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경영위기를 타계하고 보다 효과적인 해답을 도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치유의 의미로 고전읽기가 유행하는 것도, 개별적으로 파편화되고 자본주의와 상업성으로 소외되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에 고전이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고보면 할아버지는 내게 결과적으로 한자를 가르쳐주시진 못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기를 함께하는 시간동안 일부 전해주시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삶의 고비마다 나를 지켜내는 <인생공부>

최근 짧은 시간이 날 때마다 토막토막 읽는 책이 있다. 논어와 한비자의 부분을 현대에 맞게 해석해놓은 <인생공부>라는 책이다. 거창한 제목보다 부제가 더 와닿아 읽게 되었다. '삶의 고비마다 나를 지켜내는', '삶에 내공을 더하는 실용적인 고전읽기'.


인정하긴 싫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일종의 위기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봄이 지나고 바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육아휴직을 기점으로, '아빠'로서의 역할에 도전을 했다. 육아에 엄마 아빠 구분이 어디있겠냐만은, 그래도 기왕이면 전업으로 육아전선에 뛰어든만큼 나는 복직을 하는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것 이상의 어떤 '특별한'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아이는 여러차례 잔병에 시달렸다. 감기, 폐렴, 수족구, 후두염 등등... 아내와 가족들은 어린이집에 적응하는 동안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며 나를 위로했지만, 주양육자로서 아이가 반복해서 아픈 것이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며 나는 자책했다. 그 뿐만 아니라, 가정 내 살림살이의 방법이 바뀌면서 그것에 맞는 규칙을 만들고 익숙해지는 것에도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보니 휴직을 하기 전 꿈꾸었던 나의 위시리스트과 투두리스트들이 죄다 무기한 연기되어버렸다. 눈 깜짝 하는 동안 한두달의 시간이 지나가버렸고, 그 기간동안 나의 삶은 삭제되었다. 더 이상 삶에 온전한 나의 시간은 찾을 수 없었고, 나는 그게 일종의 위기처럼 느껴졌다.


그 불편한 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들을 시도했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어느정도 극복을 하고 나의 시간들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산책이나 운동, 여행 등의 방법을 비롯하여 고전읽기 독서모임을 지속해왔던 것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데 주효했던 것 같다. 이 모든 노력들이 '중심잡기를 위한 사색의 시간'을 확보해준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색의 과정과 결과를 타인들과 일정부분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고전읽기모임이 특히 도움이 되었다. 고전이 나의 삶을 지켜주는 튼튼한 뿌리가 되어준다는 것을 경험한 나는,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도서 이외에도 동양과 서양 고전들을 찾아 읽곤 했다. 그렇게 나는 <인생공부>라는 책을 읽고 있다.



논어에서 배우는 인생공부

책 속의 글들은 현학적이거나 딱딱한 표현들이 아니다. 고전 원문을 짧게 이야기하고, 그것을 현대적으로 핵심만 요약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래서 하루 한문장의 느낌으로 읽고 마음에 새기기에 좋다. 아래에 몇몇 문장을 소개해볼까 한다. 편의 상 한자는 생략하겠다.


증자가 말하길, 군자는 글로 친구를 모으고, 친구로 인을 덧댄다

저자는 이 문장을 언급하며, '글'의 개념을 학문에 한정시키지 않고 문화를 포함한 일종의 가치관으로 해석하여 관계를 어려워하는 현대인에게 사람사귀는 것의 방법과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자장이 공자에게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길, 공손 / 관용 / 믿음 / 민첩 / 은혜로움을 실천하면 인이 생긴다. 공손하면 남이 업신여기지 않고, 관용을 베풀면 민심을 얻으며, 믿음이 있으면 남들이 의지하고, 민첩하면 공로가 있고, 은혜로우면 남들을 부릴 수 있다

이 문장을 해석하는 것에서도, '인'의 속성을 통해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다섯가지의 핵심요소를 설명하고, 이를 통해 오늘 날의 인간관계의 변질과 상실의 문제에 대해서 지적한다.


공자가 말하길, 중용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을 바에야 반드시 미친 듯이 열정적인 사람이나 고집이 센 사람과 함께하겠다. 미친 듯이 열정적인 사람은 진취적이고, 고집스런 사람은 하지 않는 일이 있다

현실적으로 '적절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싶다. 공자 역시 그런 이상적인 모습으로만 단정짓지 않고, 현실적인 조언을 했던 모양이다. 적당히 살 수 없다면, 열정적이고 주관이 뚜렷한 이들과 함께 하라는 조언이다. 이것은 인간관계에서도 적용이 되는 문제이지만, 업무를 진행하는 것에도 적용이 되며, 나아가 타인이 아닌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적당히 살 수 없다면, 파격적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 단, 옳은 방향이라는 주관을 가지고서 말이다.


공자가 말하길, 정나라에서는 중요 문서를 작성할 때, 비침이 초고를 작성하고, 세숙이 그것을 가지고 토론하며, 행인 벼슬에 있는 자우가 문장을 더 좋게 가다듬고, 자산이 문채를 더했다

글쓰기의 단계를 창작 / 토론 / 수식 / 윤색(퇴고)의 4단계로 보고, 이 과정을 거치며 글을 쓰기를 권한다.


공자가 말하길, 가난하면서도 원망이 없기는 어렵고, 부자이면서도 교만이 없기는 쉽다

현실은 위의 말과 반대다. 교만하지 않은 부자들을 찾기 어렵고, 굳이 부자가 아니더라도 타인과의 차이를 차등으로 둔갑시켜 혐오를 통해 나를 치켜세우는 오만이 넘쳐흐르는 시대다. 저자는 이 교만을 '열등감'으로 해석해야한다고 한다. 반면 가난의 문제는 사회구조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석한다면 사회적인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는 게 궁극적인 주장이 아니었을지.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보면서, '세상이 쉽게 보이면, 그 때가 제일 위험한 시기'라고 했던 어느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한비자에서 배우는 인생공부

논어의 내용들이 대체적으로 개인에 대한 수양의 느낌이 강했다면, 한비자의 내용들은 경영학의 고전을 보는 느낌이다. 특히 법률 등의 시스템을 강조한 것이나, 리더쉽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을 보면 더더욱 현대의 경영학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일단 가정의 유지와 번창을 위해 어떤 금전적인 시스템을 고민하는 것부터, 작게나마 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러한 경영학적 관점은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두고두고 꺼내봐야겠다는 느낌이랄까.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목표와 계획을 평가하는 방법'과 리더로서 아랫사람들에게 '책임을 묻는 기준'에 대한 것이었다.


마구 허공으로 쏘아댄 화상에 호랑이가 잡혔다 하더라도 이는 우연에 따른 것이지 예정된 목표를 달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신하에게는 벌을 내려야 마땅하다. 군주는 우연을 경계해야하며, 반드시 신하가 목표를 제출하도록 해야한다. (중략) 목표는 강제로 할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하 스스로가 제출토록 해야한다. 이렇게 제출받은 목표와 성과를 비교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성과가 목표에 못 미치거나 넘치는 것이 아니라, 목표와 성과의 일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으로는 이 글은 상식과 다르다. 목표치를 초과한 성과를 내었을 때 벌을 받는 다는 것은 동기부여 측면에서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한비자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다만 한비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속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는 신뢰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평가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목표를 세울 때 정확히 계획적으로 세우는 것을 유도하여, 업무에 대한 몰입도를 올리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운 부분이지만, 부분적으로 일리가 있어 보인다.


군주의 도는 신하로 하여금 발언에 반드시 책임을 질 수 있게 하고, 또한 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그 책임을 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중략) 이리하면 신하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며, 침묵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을 하든, 침묵을 지키든 모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발언과 침묵에 대해서 모두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임이 능동적인 행동에만 뒤따른다고 생각하면 사회도, 조직도, 개인도 쉽사리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현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침묵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느끼는 조직을 만들 때, 그 조직은 더 좋은 생각들을 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마무리하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대체로 긴 글에 주관적인 해설이 많이 개입된 한비자의 부분에 비하여, 논어 부분이 지나치게 간결하고 해설이 아닌 해석으로 느껴지는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논어가 가진 특성 자체가 긴 문장이 아닌 짧은 대화의 언급이라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닐까한다. 논어의 해석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끝으로 쉽게 읽기 어려운 논어와 한비자라는 고전을, 조금도 낡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한 저자의 역량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고전의 힘을 느낀다. 삶에 쫒겨 마음이 흔들릴 때, 다급해진 나의 시각은 대체로 근시안적 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럴 때마다 필요한 것이 고전이 아닐까. 오랜시간동안 검증받고 읽혀져왔다면 시공간을 관통하는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이니까. 나는 그게 바로 기본기가 아닐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삶을 살아가는 이정표로서의 기본기는 언제나 중요하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고전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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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지만 여전히 유효한 것.

고전의 힘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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