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일전에 작성했던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 네이버블로그 리뷰에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그 책은 그동안 여성들이 겪어왔던 불합리한 상황들에 대해서 여성의 목소리로 떳떳히 이야기하는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책의 리뷰를 내가 작성한 의도는 작가의 의도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서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다른 방식에 대한 모색을 함께 생각해봤으면 하는 그런 의미였다. 뭐랄까 지금까지의 부조리함 혹은 시대가 바뀌면서 부조리함을 알게 된 사항들을, 무턱대고 외부의 특정한 적을 만들어 싸잡아서 비난하는 것은 여태까지 대중을 컨트롤 하려고 하던 구시대의 특정 계층의 수작질과 거의 비슷해보였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현시대의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최근의 여성우월주의 및 남성혐오 운동으로 변질되어가는 여성운동과 그것의 반작용으로 공론화되고 있는 여혐의 분위기를 바라보면서, 그 사회에 속해있는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이 흐름이 '혐오'를 기반으로 한 대결이 아닌 더 나은 대안을 찾기위한 생산적인 토론과 의견교환의 시간으로 활용되기 바랬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남녀, 특히 앞으로의 사회를 이끌어 갈 나와 같은 젊은세대들은 결국 남과 여의 동질감과 시대적인 공감대를 가지고 상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옮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거라고 나는 믿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물론 책의 내용 상 불편함을 가질 일부의 반응을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현 여성운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의 댓글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 역시도 현재의 자칭 여성운동이라 말하는 이들의 방식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가 전혀 이해가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단순히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떠나 작가의 의도와 모든 여성들의 목소리를 현재의 왜곡된 여성운동단체와 동일시하고, 더 나아가 '혐오'를 배척하고 '상생'을 주장하는 나 역시 그러한 극단적 여성주의자들과 궤를 같이 한다는 비난까지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왜 그런 소리를 하려고 굳이 이 소설의 리뷰를 검색해서 들어와서는 빠락빠락 댓글을 다는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왜 내가 욕을 먹어야하는지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보니, 한편으로는 극단적 방식으로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과 반발로 생겨난 일부 여혐 댓글러들 모두가 안타깝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82년생 김지영> 이후로 나온 조남주 씨의 비교적 최신작 <그녀 이름은>을 읽었다. 나의 생각과 작가의 생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다. 옳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맞는지, 무엇을 옳다고 해야만 하는지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나서 기존 나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동시에 그럴수록 혐오를 외치는 젊은 세대들이 더욱 더 안타깝게 여겨졌다.


결혼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P.90


내가 결혼을 하고 첫 명절이 지났을 때, 아내와 엄마는 화장실 앞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명절이 되면 수십 명의 어른들이 방문하는 우리집은, 낯을 많이 가리는 아내에겐 분명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집안의 첫 며느리였으니, 방문하는 이들 모두의 관심은 예쁜 한복을 차려입은 새아기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고가는 덕담에 누군지도 모르지만 늘 웃으며 응대했던 아내. 명절이 끝나고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던 아내는, 엄마의 '처음이라 고생많았지?'라는 말 한마디에 긴장이 풀려버렸는지 그만 울음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그런 아내를 안고 엄마도 같이 울었다. 새아기와 헌아기가 서로 안고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이자 아들로서 괜한 미안함을 느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게 없어, 멀뚱멀뚱 벙쪘있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또 본가에서 숙모들과 엄마와 함께 모두 이야기하던 중에 '호칭'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중학생인 사촌 동생이 숙모에게 물어보더란다. "왜 형(나)은 형수(아내)님을 '정아'라고 불러?" 실제로 나는 집에서든, 본가에서든, 혹은 처가에서조차 아내를 이름으로 부른다. 풀네임은 아니고 이름의 끝글자만 '정아'라고 부른다. 아내 역시 나를 이름으로 부른다. 10년여 간의 연애기간동안 입에 붙은 호칭이기도 했고, 서로가 가장 친숙하게 느끼고 그렇게 암묵적으로 동의된 것이었기에 특별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즉, 사촌동생이 호기심을 가질만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답했다. 호칭은 상호 간에 불편함이 없는 선에서 서로에게 인식된 존재의 나타내는 대표 단어라고, 그래서 나에게 아내는 이름 그 자체로가 가장 좋다고 말했다. 어른들이 보기에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가족으로서 예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정말 아내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한다면 각자의 호칭을 만들어 그것을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엄마도 숙모도 크게 말씀하지 않고 동의해주셨다. 엄마가 아빠와 결혼을 했을 때, 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호칭을 신경써주길 바랬다고 한다. 시동생 여럿을 데리고 시부모님까지 모시고 사는 엄마 입장에서 누나가 처음 태어나기까지 아빠를 부르는 것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썼을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아빠는 일부러 엄마에게 존댓말을 했다고 한다. 한 3년정도? 그 많은 가족 구성원들 중 혹시라도 누군가 엄마를 무시할까봐, 인격적으로 대해주길 바란다는, 그렇게 아빠 방식으로 엄마를 지켜주고자 하는 노력이었다고 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온 부모님이기에 나의 생각을 수용해주시고, 지금처럼 딸처럼 이름으로 아내를 불러주는 것이 나는 너무나도 감사하다. 아내 역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녀 이름은>의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바는, 그리고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도 이것이라 생각한다. 대상을 기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강요해오던 역할이나 틀에 가두지 말라는 것. 그런 역할와 기대를 부여받고, 그것을 맞춰살다보면 자신의 존재를 잃고 쉽게 '소외'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역할 강요로 인해 쉽게 소외되는 계층은 대체로 사회적인 약자들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여성이라는 큰 공통점 외에도, 동시에 학교급식 영양사 아주머니, 거주할 집 구하기 어려운 부부 중 여성 입장의 서술, 성주지역 사드 반대 할머니, 여성 버스 운전자, 외손녀를 봐주는 할머니, 엄마의 병간호를 한 프리랜서 딸, 성범죄에 노출될 뻔한 여성, 방송사 파업 부부 중 여성 입장의 서술, 직장 내 육아휴직 1호인 여성, 철도청 정직원 전환 시위 여성, 국회 청소담당 아주머니 등의 사회적 약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남성이 여성을 이렇게 소외되도록 만들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냥 여성이 그렇게 소외되는 경우가 많다는 수준으로 여성의 입장과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이러한 소외된 계층의 여성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그렇게 각자의 의미를 인정받기를 원할 뿐이다.


위에서 내가 왜곡된 방향과 방법으로 그릇된 여성운동을 하는 젊은이들과, 그것에 반발하여 여성 전체를 격하하며 여혐을 외치는 젊은이들 모두를 안타깝다고 여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젊은이들'인 이유도 그들 모두가 '소외'된 이들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마음의 여유가 없는, 먼 미래의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살 수없는 이들로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어떤 소리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것이 효율성을 강조한 경제논리, 자본주의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처럼 현 세대는 고도의 성장을 이루며 살기 어렵다. 물론 전처럼 찢어지게 가난하지 사는 비율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인구의 감소로 인해 경제규모를 줄어들 것이며, 생산의 영역에서도 기술과 기계에 밀려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전 세대보다 더 부유한 미래를 꿈꾸지 못하는 세대가 현 세대이며, 이러한 상황들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희망을 빼앗아버렸다. 여기에 자본주의를 부흥시켜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낸 전후 베이비붐 세대의 현 세대를 향한 반 협박에 가까운 기대가 더해졌다. 기성세대와 기존의 제도로는 현 세대의 생각과 생활방식을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젊은 세대들은 니트족이니 프리터족이니 욜로족이니 나름의 현실을 버텨낼 방법을 찾다가, 이제는 점점 3포, 5포, N포로 하나씩 삶의 가치들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막다른 코너에 몰렸다. 경쟁사회에서 이 젊은이들은 더 이상 포기할 가치가 없다. 그래서 선천척이라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니면 바깥의 자신보다 못한 존재들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것이 '성'이고, 여기에 '혐오'가 더해져 표출되는것이다.


[뉴스 링크 : 고립 자처하는 혜화역 시위 여성들…워마드 성체훼손 논란까지]


혜화역에서 자칭 '여성인권시위'가 열리고 있다.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극단적인 행위들, 말도 안되는 구호들, 그리고 그들의 발언과 대처들을 보고 있노라면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분노는 대체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분노의 끝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그들 스스로도 정확히는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저 화가나고 답답하니, 이것을 풀고 싶어 마구잡이로 총을 난사하는 느낌이랄까. 굳이 독립운동가들과 대통령을 성적 모욕이 담긴 단어로 희화하여 표현해야만 했을까? 지하철 낡은 역사 안 화장실에는 틀린 맞춤법으로 사회와 종교와 불특정 대상에 대한 저급한 욕설들이 낙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사회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노숙자들이나 할 이런 행동들을 종교의미를 담은 성체에 똑같이 자행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자랑인냥 굳이 자신들끼리 공유하고 낄낄대야만 했을까? 또 이해가 가지 않는 면은, 왜 시위를 하면서 찍지말라고 하는 것일까. 백번 양보해서 그들의 주장이 사회적인 성차별과 불평등을 없애자는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러한 주장을 널리 대중에게 알리고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행위가 시위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시위를 찍지말라니? 그렇다면 이들의 시위는 대중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아닌, 그들만의 놀이였던 것인가? 개인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뉴스 링크 : 성차별 규탄집회서 쏟아진 `남혐 구호`]


현실적으로 우리사회에는 성차별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차별은 여성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부조리와 여성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부조리가 모두 공존한다. 나는 사회적인 성차별은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이러한 남녀 모두에게 강요되는 차별, 부조리를 동시에 타파해나가자는 의미이다. 여성이 많이 힘들었으니 이제 남성이 힘들 차례라고 말하는 것도 굉장히 저급한 주장이고, 반대로 남성도 힘든데 참고 있으니 여성도 참아라 하는 것도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


또한 성적 불평등과 성범죄의 영역은 철저하게 구분하였으면 좋겠다. 불평등은 제도적으로 단칼에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의식과 꾸준한 행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반면 성범죄의 경우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엄벌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보면 기성세대들과 조직의 남성들끼리 그러한 성범죄를 싸고도는 듯한 뉘앙스의 사례를 말하곤 하는데, 그건 남녀를 불문하고 처벌받아 마땅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과거부터 그런 일이 있어왔고 지금까지 그러하다면, 그리고 그 조직이 그것을 개선할 생각이 없다면 강력한 처벌을 내려야한다. 같은 의미로 조직이나 사회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권력 우위에 있는 이가 그러한 지위를 남용하여 성범죄를 저지른다면 더욱 엄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준은 여성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어야한다. 혜화역의 시위 명분이 '홍대 누드모델 사진 유출' 사건에 대해 '가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빨리 수사가 진행이 되었다'는 것에 있다고 한다. 이게 어떻게 명분이 될 수 있을까? 범죄의 행위자가 분명하고 그 행위와 과정도 분명한데, 그렇다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수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일까. 시위에 대처하는 경찰 역시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유로 여성 경찰의 비율을 말도 안되는 수준으로 늘리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는가? 성 역할에 대한 차이와 차별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적인 개선이 필요한 소외계층들 그리고 일부 여성들의 상황들이 희석되어버리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목적없이 방황하는 무책임한 총구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음을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뉴스 링크 : “‘보이루’ 비판하니 발차기가 날아왔다” 학교폭력 대상된 청소년 ‘페미’]


이제 이러한 막다른 길에 내몰린 젊은이들의 혐오는 더욱 더 사회의 깊은 곳까지 확산되고 있다. 판단력이 부족한 청소년들 사이에서, 폭력이 더해진 혐오가 나타나고 있다. 서로를 깎아내려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고자 한 이들의 잘못된 행위들은, 서로를 좀 먹고 더 나아가 사회를 좀 먹고 있다. 앞으로 자라날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할지 걱정이 앞선다. 정말이지 이제는 기성세대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혐오'가 아닌 '상생'의 관점에서의 바른 성평등을 추구하는 목소리를 내야하는 때가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사회가 더욱 각박해질수록 당분간 지금처럼의 혐오 분위기는 더욱 확산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조만간 '세대 간' 갈등으로 혐오문제가 대두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미 노년층을 비하하는 '틀딱', '꼰대' 등의 단어가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확산되고 있다. 세대 간 혐오 및 갈등은 이성 간 혐오 및 갈등보다 더 거대한 흐름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갈등이 '상생'의 방향으로 해결하는 좋은 선례를 남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책임감 있는 참여가 필요하다.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사는 것이 당당하게 느껴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이 사회에서 내 이름 석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내 존재가 자랑스러운 그런 날이 오길 기대한다. 구성원 하나하나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존재감이 있는, 소외되지 않도록 함께 보듬어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책속의 한 줄, 한 문장 (발췌하며 읽기)


보람 있고 재미있는 일에 정당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나도 그랬어, 우리 때는 더 했어, 라는 말을 하는 메인작가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안 해야 하는 말을 안 하는 사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오늘 삼킨 말, 다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말들을 생각한다. P.29


심장이 딱딱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촌스러운 이름, 버거운 일상, 불안한 미래, 하지만 계속 두근거릴 줄 아는 김은순으로 살고 싶다. P.61


신난 조카들을 보면서 삼십 년 후, 어쩌면 그보다 더 이르게 찾아올 나의 마지막 순간을 상상한다. 아마도 곁에 가족은 없을 것이고 그때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뜨거운 내 손의 유골함을 들고 이 길을 걷게 될 이가 단정하고 예의 바르고 능숙한 사람이면 좋겠다.


결혼해. 좋은 일이 더 많아. 그런데 결혼해도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엄마가 되려고 하지 말고 너로 살아. P.90


결혼하고 애 낳았다고 회사를 못 다니고 육아휴직을 못 쓰냐고요? 네, 아직 그런 세상이에요. 여전한 회사 많아요. 일 년 후에 무사히 복직한다면 제가 저희 회사 육아휴직 1호예요. 일단 1호가 나오면 2호, 3호, 4호 계속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P.109


학교 행정은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고 여전히 학부모들의 무료 봉사를 필요로 한다. 회사는 업무량이 너무 많고 어린아이 키우는 직원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남편은 당연히 육아가 아내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사회는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엄마들을 '극성'이라 매도한다. 그럼에도 엄마들은 직장을 다니건 다니지 않건 서로 도우며 자기 몫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P.118


자리에 꼭 맞는 퍼즐을 끼우는 것처럼 모든 게 착착 맞아들어갔다. 아파트 크기와 구조도, 위치도, 입주 시기도 다 좋았다. 조합원 자격도 갖추었다. 그런데 계약을 못 했다. 왜 계약금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못 했을까.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생계, 대출, 이자, 육아, 그런 것들. 민주도 처음으로 오랜 생각을 입 밖에 꺼내놓았다. 남편이라서 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P.144


오후 반차를 냈으니 나갈 준비를 하란다. 부랴부랴 딸 간식과 저녁을 준비해놓고 옷을 막 갈아입었을 때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부터 전속력으로 뛰었다는 남편의 얼굴에서는 땀이 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P.149


내 복직만 생각했다면 이렇게 긴 시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불안정한 고용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승객의 안전을 비용과 효율로 계산하지 않고, 여성의 일을 임시와 보조 업무로 제한하지 않으려는 싸움. 나는 여전히 젊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P.153


비정규직, 최저임금, 근속수당 같은 단어들을 다시 검색했다. 낯선 단어들은 아니지만 정확한 사전적 의미와 관련 규정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중략) 임금 결정 시 고려되는 원칙 ㅡ 동일노동 동일임금, 외부적 공정성, 내부적 공정성, 최저 생계비...... P.158


"아이들이 선생님 파업하시는 거죠? 파업 왜 하세요? 막 그러는 거 있지." "그래서 뭐라고 했어?" "너네들 아줌마처럼 살지 않게 하려고 그런다. 그랬지." "엄마처럼 사는 게 어때서? 치."


매일매일 아홉 시간씩 무사히 운전하는 사람. 그게 달인이지 별게 달인인가. 그래도 오늘 인생의 목표가 한 가지 생겼다. 언젠가 운전의 달인으로 <달인을 찾아라>에 출연하는 것. P.173


청소노동자 임금이 '직접고용 예산'으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중략) 새벽 네 시, 그 시간에 예산안 통과를 알리는 단체 메시지가 왔다. 이제 청소노동자들이 용역회사를 거치지 않고 국회에 직접 고용된다는 뜻이었다. P.180


전보다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는 더 힘들고 누구는 덜 힘들고 하는 것 없이 공평하게 일하면 좋겠다. 손주들 봐야 할 때, 남편이 아플 때처럼 급할 때 한 번씩은 조금 늦게 출근하거나 일찍 퇴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오래 일하고 싶다. 진순은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계속 말할 것이다. P.182


전업주부 딸은 백점, 칼퇴근하는 공무원이나 교사 딸은 팔십점, 그래도 저녁 먹기 전에 집에 오는 직장인 딸은 오십점, 밤 열두시에나 퇴근하는 대기업 직원 딸은 빵점이라고. 딸이 일하는 시간이 길수록 손주를 오래 봐야하니까. 진명 아빠, 우리 딸, 우리 자랑스러운 딸이 빵점이래. 너무 서운하고 속상했는데 아니란 말이 선뜻 나오지를 않더라고. 사실 애들 보는 거 많이 힘들어. P.196


한 번은 기껏 손주들 내복이며 손수건을 삶아놨더니 향균 처리된 면이라 삶으면 안 된다고 짜증을 내더라고. 이유식 하려고 채소들 다져서 소분해놓았더니 유기농 아니라 애들 못먹인다고 지가 날름 볶음밥으로 먹어버린 적도 있어. 유치원 종일반 추첨에서 떨어지고 두 시에 끝나는 정규반이 되었을 때는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게 얼마나 얄밉던지. 그래도 제 자식 일에 뒷짐만 지고 있는 사위가 제일 밉긴 하지. 아니다, 우리 아들도 똑같은데 내가 누굴 탓해.


손녀는 한참 동안이나 꺄르르 꺄르르 하며 뉴스 얘기를 하다가 다치지 마세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손녀의 전화를 받고 나니 마음이 더 단단해진다. 자신만 생각한다면 사드 아니라 사드 할머니가 들어온대도 솔직히 상관없다. 사드를 이고 살든 깔고 살든 어차피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하지만 물려줄 것 하나 없는 처지에 손주들이 살아갈 이 땅에 사드를 남겨줄 수는 없다. P.210


나는 그래도 가벼운 부상에 속했다. 많은 학생들이 탈진했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멍들고 부러졌다. 깨진 유리 조각에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표정들이다. 끌려 나가는 제자를 팔짱 끼고 쳐다보던 교수들의 덤덤한 표정,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끼리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경찰들의 표정, 그리고 그 많은 경찰병력을 보냈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표정.


스스로 선택했기 때문인지, 곧 사회로 나간다고 생각해서인지 은미는 부쩍 어른스러워졌다. 나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은미가 재밌고 즐겁게, 때론 실수도 하고 방황도 하고 추억도 많이 만들면서 학창시절을 잘 보냈으면 좋겠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이다. 은미에게도 학창시절은 풋풋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P.247


누구에게나 열린 광장, 스스로 모인 사람들, 같은 생각과 목적, 같은 목소리, 광장에 서니 약간 벅찬 기분이 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 감정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굳이 가장 비슷한 단어를 찾는다면 죄책감일 것이다. 살면서 잠시라도 치열했던 적이 있었나. 고민하고 의심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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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리뷰

 : <82년생 김지영>, 혐오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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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복은 타인의 불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야 더 많이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이 그런 믿음을 잃지 않도록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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